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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10.29 13:56

2017년 누가복음 42강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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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42강 정여호수아

누가복음 20:1-18

 

 

모퉁이의 머릿돌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누가복음 20:17)

오늘 말씀의 제목은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집을 세울 때 기준이 되는 돌입니다. 모퉁이에 두어서 이 돌을 기준으로 하여 집을 세워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하십니다. 건축자들, 집을 짓는 전문가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 집을 건축하는 기준석이 되었습니다.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 예수님이십니다. 건축자들이 버렸는데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먼저 건축자들이 왜 예수님을 버렸습니까?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라(1-8)

 

다같이 1절을 봅시다. 하루는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 들어가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집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고 계실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께 가까이 왔습니다.

이들이 무엇을 하러 예수께 가까이 왔습니까? 2절을 봅시다.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지금 누구 허락받고 이곳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맡은 자들인 자신들은 제쳐두고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가서 말씀을 듣는 것이 영 못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까지 다 내쫓으시니 크게 화가 났습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고, 또 그로 인해 그들이 거두어들이는 수입이 상당했는데 예수께서 이를 막아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전에까지 예수께서 들어와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시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누가 나의 권위나 자격을 운운하면 마음이 멈칫하기 마련입니다. 저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강단에 나와 메시지를 전합니까? 누군가 제게 대놓고 묻는다면 조금은 위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3절을 봅시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예수님은 조금도 위축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한 질문을 그대로 받아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4)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온 이스라엘에서 거국적인 대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무슨 타이틀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무슨 자격증이나 허락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전한 메시지에는 힘이 있었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요한을 그리스도라 생각할 정도로 그를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따르고 존경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그 시대 대부분 사람들이 추구하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고 기도하는 데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엘리야의 능력과 심령을 부어 주시고, 많은 사람들이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이처럼 요한의 세례는 하늘로부터 온 것인 줄 다 알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이 질문을 받고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5절을 봅시다. 먼저 그들은 서로 의논했습니다. 여기서 ‘의논했다’는 것은 ‘이해득실을 따졌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사건의 진실성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자신들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그것을 따져보고 이를 확실히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들이 의논한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했습니까?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며 추궁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7절을 봅시다.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We don’t know.‘ 그때나 지금이나 불리하다 싶으면 모르쇠로 나가는 것이 사람들이 쓰는 수법입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상황에 따라 자신들에게 유익한 길을 찾았습니다.

이런 그들의 대답에 예수께서 무엇이라 하십니까? 8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들에게 예수님은 단호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아무런 대답도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을 끝까지 영접하지 않고 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 한 가지 비유를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되신다고 하십니까?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9-18)

 

9절을 봅시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습니다. 이사야 5장 1,2절을 보면 포도원 주인은 심히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까지 팠습니다. 주인은 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취업하기 힘든 시대에 이렇게 좋은 환경과 대우와 조건가운데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주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포도원 주인을 만난 농부들은 그야말로 은혜를 입었습니다. 농부들도 아마 이 주인에게 크게 감사하면서 더욱 힘을 내어 열심히 일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봅시다. 때가 이르자 주인은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돌려보내었습니다. 주인이 포도원의 주인으로서 소작농인 그들에게 소출 얼마를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주인은 자신이 보낸 종이 무슨 실수라도 해서 농부들이 이렇게 나오나 싶어 주인은 이번에는 그보다 더 지혜롭고 겸손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습니다(11). 주인은 이번에도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종마저도 상하게 하고 내쫓았습니다(12). 이제 주인도 참을 만큼 참은 것 같습니다. 당장 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3절을 봅시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이제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주인은 “어찌할까?”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고민 끝에 주인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들이 혹 자신의 아들만큼은 존대해 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13).

이로 볼 때 주인이 농부들에게 정말 원하는 것은 소출 얼마를 세로 거두어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주인의 주인 됨을 알고, 주인을 주인으로서 존대해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아들을 보내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농부들이 이제까지 한 것을 보면 그들이 자기 사랑하는 아들을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보냈습니다.

주인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농부들이 자기를 존대해 주길 원했습니다. 공포심 가운데 마지못해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주인은 농부들을 존중했습니다.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들이 한 일이 아무리 괘씸하다 하더라도 끝까지 참았고, 이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고 자 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아들만 존대하면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다 용서해 주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인은 자기 사랑하는 아들을 잃을 각오까지 하며 실제로 농부들에게 아들을 보냈습니다. 이제 농부들은 아들을 존대하기만 하면 모든 잘못을 다 용서받고 계속해서 주인의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4절과 15절 상반 절을 봅시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들은 주인의 마지막 기대마저 저버렸습니다. 주인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일을 하였습니까? 주인에게 받은바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주인에게 너무나 감사하여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주인의 은혜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졌습니다. 또 포도원에서 열심히 수고한 것은 자신들이고 주인은 일한 것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주인에게 꼬박꼬박 세를 바치려하니 왠지 억울하고 아깝다는 손해의식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주인의 포도원은 더 이상 주인의 것이 아니고 열심히 일하는 자신의 몫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탐심입니다. 이런 탐심에 사로잡히자 그들은 탐심의 노예가 되어 분별력과 자제력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세를 내기 아까워하는 작은 욕심에서 출발한 그 죄는, 후에 포도원을 통째로 삼키고자 하는 큰 죄로 발전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들까지 죽이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욕심대로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주인이 살아 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어떻게 하였습니까? 16절을 봅시다. 당장에 달려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이처럼 내 아들을 존대하리라는 주인의 마지막 기대마져 저버린 그들은 더 이상 주인에게 긍휼을 얻지 못합니다. 철저히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지만 무골호인은 아닙니다. 결코 만홀히 여김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오래 참고 기회를 계속 주시지만 끝까지 회개치 않을 때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비유를 들은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6절 하반 절을 봅시다. 그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였습니다(16하). 그들은 이런 불행이 자신들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다같이 17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기록된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2절로 예수께 대하여 예언된 말씀입니다. 여기서 건축자들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깁니다. 모퉁이 돌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건축자들인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이라 하여 버릴 것입니다. 농부들이 자기 탐심에 사로잡혀 주인의 아들을 죽였듯이, 종교지도자들도 결국은 자기 탐심을 따라 예수님을 영문 밖으로 끌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들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로 인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완전히 실패하신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버린 돌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였지만, 예수님을 저주하며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이렇게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베드로전서 2:4-7). 하나님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이 예수님을 택하사 보배로운 산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보배로운 돌이 되셨습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는 돌 곧 살아있는 돌, 사람을 살리는 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산돌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 인생의 집을 세우는 자는 산 돌 되신 예수님과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거룩한 제사장이 됩니다. 그 인생이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다같이 18절을 봅시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겸손히 영접하고 존대하지 않는 사람의 결말은 멸망일 뿐입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든지, 이 돌이 그 사람 위에 떨어지든지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은 반드시 멸망당하게 됩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농부들과 같이 철저히 진멸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끝내 자기 탐심을 따라 예수님을 버리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이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는 결코 실패함이 없으십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그런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비록 죽임을 당하시나,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아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렸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믿고 주를 따르며 살고자 할 때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물론이고 직장 동료,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습니다. 심지어 믿음의 동역자와 양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매주 일용할 양식 발표자와 리더 소감모임 발표자를 정할 때 외면과 버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일용할 양식 발표를 언제 하실 거냐고 물으면 거의 버림을 당합니다. 또 양들로부터 버림받을 때도 많습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할수록 버림받는 일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버림받는 고통으로 마음에 크게 상처를 받고 믿음에서 완전히 떠나고자 마음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때 제 인생이 완전히 다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고, 죽을 것 같이 힘들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가복음 2:17)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죄인이지만, 예수께서 이 죄인을 살리셨습니다. 언제나 저를, 죄인인 저를 살리십니다. 무너져 내리고 있던 저를 예수께서 이 말씀으로 붙들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은 제가 모든 죄와 부끄러움을 이기고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아 갈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줍니다. 제가 어떤 죄와 고통가운데 있더라도 사람에게는 버린바 되셨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 되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산돌 되신 예수께서 저 인생의 집을 견고하게 세워 주시고, 저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저로 부끄럽지 않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누가복음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버린바 되셨으나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 그 인생을 예수님 위에 세우는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아니합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세상이 어떠하든 사람들이 어떠하든 내 모습이 어떠하든 내 인생을 예수님 위에 세우길 기도합니다. 그리하면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삶을 살 것입니다. 아멘!

 

2017 누가복음 42강 메시지 2001-2018 정여호수아.hwp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 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누가복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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