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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12.01 00:23

2017년 누가복음 44강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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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44강                                                                                                    김요한

누가복음 21:1-38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36)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더 확실하게 알려줍니다. 이를 위해 누가는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 1:3,4). 오늘 본문인 21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며칠 전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한 시간, 한 시간이 예수님께 절실한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습니다(37). 모든 백성이 예수님 말씀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왔습니다(38).

예수께서 성전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사람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1).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1-4)

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아마도 부자들은 좀 당당하게 헌금 한 것 같습니다. 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는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당시 가장 적은 금액의 동전 두 개를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100원 아니면 500원 짜리 동전 두 개가 헌금함에 떨어지니, ‘땡그랑’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과부에게 쏠렸을 것입니다.

이를 보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절을 봅시다.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하셨습니다. 왜 그렇다고 하십니까? 4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부자는 헌금 하고 남은 돈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생활비라야 얼마 안 되어서 그렇게 했을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 넣었으니 그가 이제 무엇으로 사나요? 과부, 의지할 것 없는 과부는 그의 남은 삶을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작정이었습니다. 그가 의지할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살아가려면 돈도 필요한데, 꼭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 의미를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5-28)

5절을 봅시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였습니다, 성전 지붕이 황금으로 되어 있었는데 빛을 받아 번쩍번쩍 황금빛이 났습니다. 이를 본 어떤 사람들이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라 되어 있습니다(마가복음 13:1). 그는 아마도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성전 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고 예수께 말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끔 제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6절을 읽어봅시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였는데, 예수님은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성경을 읽다보면 전혀 나의 생각과 다른 말씀을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삶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누가복음 9:20). 그러자 예수께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습니다(누가복음 9:22). 베드로가 너무 기가 막혀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고 예수께 항변하였습니다(마가복음 8:32). 이제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고난의 때가 다가왔습니다.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께서 물었습니다. 7절을 봅시다.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들은 징조를 알면 그 때 준비를 하겠다는 생각이겠지요. 지진이 났을 때 이것이 전조인지, 본진인지, 여진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래야 다음 준비가 됩니다. 제자들도 성전이 무너지는 그 마지막의 징조를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는 죽기 전에 예수님으로부터 낙원을 약속받았습니다(누가복음 23:40-43). 어떤 사람들은 죽기 직전에 이같이 낙원을 약속받은 이 행악자가 참 복 받았다고 생각하며 사모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징조를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첫 번 째로 하신 말씀입니다. 8절을 봅시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징조이다’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라, 내가 재림 예수다.’ 라고 말합니다. ‘때가 가까이 왔다 나를 따르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9절을 봅시다. 난리와 소유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여기에서 몇 백Km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생깁니다. 여러 가지 별별 소문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지만 끝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이런 징조를 알고자 하겠습니까? 사람이 떳떳하다면 언제라도 예수께서 오셔서 심판하셔도 염려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데 지금 예수님이 오시면 큰 일입니다. 어떤 징조라도 보이면 믿음의 자세를 보일텐데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10절과 11절을 봅시다.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런 징조들은 예수님 이전에도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12절을 봅시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그들이 집권자들에게 잡혀 갈 것이지만 이 일이 도리어 그들에게 증거가 될 것입니다(13). 이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잡히면 어떻게 말해야지 궁리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하십니다(14). 예수께서 예수 믿는 자들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15). 우리 생각으로는 사람들의 온갖 희한한 말에 대응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주시는 구변과 지혜가 있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 말씀에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뭐라 하면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받으면 됩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제자들을 넘겨주어 제자 중 몇을 죽이게 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16). 17절을 봅시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 믿겠다고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너 혼자 천국 갈려고..’ 하며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같이 18절과 19절을 읽어봅시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우리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미혹 받지 아니하고, 염려하지 아니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곧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얘기 해주셨습니다. 20절과 21절을 봅시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로마군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말씀을 명심한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말씀대로 하지 않고 성전이 안전하다 싶어 성전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습니다. 말씀 따라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에 기름통이 길에 떨어져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이 기름통이 자기 차에 부딪히자 차를 세우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놓아둔 폰과 자동차 열쇠를 가지러 가려다가 다시 도망하자 바로 자기 차가 펑 터졌습니다. 폰이 중요하겠습니까? 이같이 작은 자존심을 세우려다가 자기 인생 전체를 다 날려먹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중요한 이유가 진실로 무엇이 나를 구원하느냐를 아는데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먼저 알아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22절부터 봅시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입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하셨습니다(23).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하셨습니다(24). 주후 70년에 실제로 이 일이 있었습니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할 것입니다(25).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기 때문입니다(26). 이때 진실로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가끔 엄마하고 아내하고 물에 빠졌으면 누굴 먼저 구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기도 하고 하기도 합니다. 엄마를 구한다고 답하여 옆에 있는 자매들로부터 눈총을 받습니다. 저의 중학교 때 윤리 선생님은 아내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종족 보존을 위해서. 공리주의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는 ‘나는 아무도 구하지 않을 거다.’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셋 다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는 성경 말씀을 성경대로 읽고 듣고 행하고자 합니다.

성경이 무엇이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까? 27절과 28절을 봅시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 다시 오날, 그 날은 마지막 날입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됩니다(고린도전서 15:2).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영원한 형벌에 처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내하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주님 다시 오는 그 날 일어나 머리를 들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속량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량은 당시 쓰던 말입니다. 종이 자유를 얻으려면 주인에게 몸값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속량이 됩니다. 곧 우리는 죄에 팔려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행합니다. 죄에 팔린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이 잘 압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오실 그 날, 죄 없다 하지 아니하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신령한 몸으로 속량을 받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해방입니다. 두려움에서 해방이고 염려에서 해방입니다.

사람이 왜 그렇게 돈 버는데 마음을 많이 쓸까요? 돈이 사람을 염려와 두려움에서 구원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하거나, 잠시 양심의 눈을 감더라도 돈을 벌고, 부자가 되어 일부는 헌금하고, 일부는 남겨놓습니다. 그러나 돈이 사람의 죄를 속량시키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속량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무엇을 행하였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 하셨습니다(마태복음 7:22,23).

예수께서 그 말씀이 얼마나 확실한지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29-38)

29절부터 봅시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하십니다.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30).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십니다(31).

같이 32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하늘로 가신지 이천년이 더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주님께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32절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오늘 당장 있을 일을 하지 한참 후에 있을 일은 잘 하지 않습니다. 소감이나 연구 발표, 또는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을 때 약속한 날짜가 되면 반드시 카톡이나 문자나 메일이 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는 이해가 됩니다. 논문을 쓰거나 프로젝트를 하거나 메시지를 준비하다보면 꼭 마지막 날 아이디어가 생각납니다. 이렇게 무엇인가 생각이 축적이 되어야 어떤 결과가 나옵니다. 예수님 오시는 날이 한참 후라고 한다면 생각만 하고 있지 실제로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루어지리라.” 곧 지금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33절을 봅시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주의 말씀은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겠습니까? 34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스스로 조심하라” 하십니다. 누가 사람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있습니까? 아내도, 남편도 남편에게, 아내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믿음을 아무리 강요해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어떻게 강요할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믿음은 스스로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가르쳐서 될 것 같으면 세상에 믿음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가르쳐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의 원래 뜻은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이며, 심히 좋아하신 존재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께서 심히 좋아하신 하나님의 특성을 끌어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섬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조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합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35). 나는 믿지 않기 때문에 그 날이 나와 상관없다?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날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장조주이십니다.

같이 36절을 읽어봅시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미혹당하지 아니하고 두려움에 떨지 아니하고 예수님 주시는 말씀 따라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밤에 잠도 안자고 눈 뜨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언제든지 내 속에 들리도록 내 심령에서부터 하나님과 관계성이 되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죄인 된 우리가.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며”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1:2-4).

저는 이를 따라 기도하면서 제가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 자신이 스스로 주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하여야 하는데,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 기도하는 중에, 사랑은 오래 참음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고린도전서 13:4, 누가복음 17:3,4). 그래서 어제 결혼예식에서 여러 일들 가운데서도 평안하게 주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 참음이란 그냥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 나의 몸이 속량받기 위해 인내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도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항상 죄인인 우리에게 예수께서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각 사람이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 말씀을 들은 대로 믿음으로 행하여 주님 다시 오실 그 날 속량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1:36)

 

2017 누가복음 44강 메시지 2101-2138 김요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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