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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10.08 15:48

2017년 누가복음 39강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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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39강                                                                                                    김요한

누가복음 19:1-10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18:32,33)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미 여러 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 우리 죄를 없이 하시고, 우리로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실 일, 해야만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18:34).

그러면 누가 깨닫습니까? 예수께서 맹인의 그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로 보게 하셨습니다(18:35-43). 예수께 나아와 어찌하든 보고자 하는 사람이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예수께서는 하시는 말씀이 보임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에게 소외당하는 삭개오를 만나십니다.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하심으로 예수께서 왜 고난 받으시고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사시는 인자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삭개오는 어떻게 구원,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인생문제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1-4)

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셨습니다. 여리고에서 23km만 가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부산 사상에서 김해 삼계동에 이르는 경전철의 총거리가 23km입니다. 약 38분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조금만 더 가시면 예루살렘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방인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께서 왜 고난을 받으시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 여리고에 누가 있었습니까? 2절을 봅시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란 ‘깨끗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였습니다. 이름과는 달리 별로 깨끗하게 살아온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당시 세리는 사람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죄인 취급 받았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일부는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몫으로 챙겼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나라 팔아 자기 이익 챙기는 매국노로 보았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세금수입이 좋은 여리고 세관에서 세리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왕따시켰습니다. 장이라는 지위도 있고, 돈도 많았으나 그는 늘 혼자였습니다. 삭개오의 아내도 삭개오의 아들, 딸들도 삭개오를 멀리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사람들이 삭개오를 돈개오, 삭개오 아들을 돈개오jr라 불렀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장이고 부자였지만 그의 이름 ‘깨끗한 자’와는 멀어진 찜찜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3절을 봅시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삭개오 자신은 세리 장이요 부자인데도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나사렛 시골 목수의 아들이고, 무슨 장이라는 타이틀도 없는데, 돈도 없는데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삭개오에게는 이상했습니다.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알고 싶었습니다. 진짜로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예수님을 보려면 예수님 지나가시는 길 바로 옆에 서야 하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려 해도 사람들은 일부러 그러는지 삭개오를 은근히 밀어내었습니다.

이에 삭개오가 어떻게 했습니까? ‘에이 오늘은 안되겠다, 언젠가 또 오시겠지’ 하며, 길바닥을 발로 차며 집으로 돌아갔습니까? ‘이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밀어낸다 이거지, 다음에 세금을 세게 때려야지’ 하며 앙심을 품었습니까? 아닙니다. 4절을 봅시다. 예수님 지나가시는 길 앞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가 정말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보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고자 하면 무슨 일이든 하게 됩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지붕을 뚫었습니다. 맹인은 사람들이 잠잠하라 해도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이런 그를 보고 사람들이 ‘오 삭개오, 나무 잘 타는데.’ 하며 비아냥해도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체면 차리지 않았습니다. 맹인은 그의 눈이 떠져 보기를 원한 것처럼 삭개오도 예수님 보기를 원하였습니다.

삭개오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을까요? 그는 장이 되고 돈이 있으면 행복할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를 외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사촌형 한 분이 서울역 앞에서 노점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정도 형편이 되어 작은 건물 안에 있는 점포에 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건물주인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면 이런 건물을 가질 수 있나요?’하고 물었습니다. 주인 할아버지가 그 비법을 말하기를, ‘나무에 올라 최대한 나무 가지 끝까지 가서 그 가지를 놓치면 죽게 되는데, 그처럼 10원짜리 하나라도 그렇게 죽을힘으로 꽉 잡으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촌 형이 말하기를 추석이 되어도 설날이 되어도 그 집에 아들, 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꽉 붙드느라 나누어 줄줄 몰랐습니다. 곁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가 말하기를 우리 중에 꼭 보고 싶은 사람 두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천사라 사모고, 또 한 사람은 유니스 목자입니다. 둘 다 그 자매보고 돈 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두 분 다 그 자매가 오면 환하게 웃고 맞이합니다. 주는 사람 곁에 사람이 있습니다. 요구하는 사람 옆에 사람이 없습니다.

삭개오의 인생문제는 그의 곁에 사람이 없고 사회적으로 소외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그에게 타이틀이 있고 돈이 있어 부족함 없이 보인다 하더라도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면 진짜 살기 힘듭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눈에 예수님께 니고데모도 밤에 찾아가고, 중풍병자도 지붕을 뚫어서라도 찾아가고, 맹인들도 소리 질러 찾아가고, 별별 사람들이 예수께로 모여 들었습니다. 삭개오는 정말 예수님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피터 리 선교사는 처음 우리 모임에 긴 생머리 예쁜 여학생을 따라 왔습니다. 그 여학생은 떠나고, 피터 리 선교사는 남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알고자 투쟁을 하였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을 알고자 그의 힘을 다하였습니다.

이런 삭개오에 대해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8)

5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 있는 그 곳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 있는 그를 쳐다보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 많은 공식적 죄인, 세리장 돈만 아는 삭개오를 쳐다보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예수께서 나같은 사람을 쳐다나 보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죄가 많아서. 죄가 깨달아질 때마다 예수께서 지금 보시면 어떡하지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그 삭개오를 쳐다 보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야”하고 이름을 어떻게 아셨는지 부르셨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고자 하는 삭개오야’ 하는 뜻일 것입니다. 돈만 알고 자기중심적으로 무엇이든 자기 쪽으로 잡아들이는 삶을 살던 그가 깨끗하게 살고 싶은 소원이 있음을 예수께서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셨습니다. 왜 내려오라 하셨습니까? 야단치시려고, 아닙니다. 예수께서 오늘 그의 집에서 자겠다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학생들은 누구랑 같이 자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숙사도 혼자 자는 방을 선호합니다. 4인실, 싫어합니다. 원룸, 좋다 합니다. 매년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부모님들이랑 학생 간에 기숙사냐 원룸이냐로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런데 왜 같이 살려 하지 않을까요?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발냄새뿐만 아니라, 사람의 냄새, 그 이기적인 냄새, 나도 이기적이고 저 사람도 이기적이니 같이 있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차라리 혼자 있고 싶습니다.

삭개오는 어떠했을까요?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며 늘 혼자였습니다. 이런 삭개오에게 예수께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 어서 오시지요. 우리 집에 가시지요.” 하며 영접하였습니다(6).

그러자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렸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였습니다(7). ‘예수님, 돈 좋아하시는 거 아닌가?’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건 말건 삭개오는 예수께 말씀드렸습니다. 8절을 읽어봅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주님께 그의 결심을 말했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하였습니다. 물론 앞에서 예수께서 부자관리에게는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셨습니다(18:22). 이를 알고 있었던 삭개오가 먼저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내어놓겠다고 먼저 예수께 말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유의 절반을 내어놓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의 것이 적든 많든 누구에게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린이 마가는 자기 먹으려고 했던 과자를 아빠가 먹었다고 제게 일러주러 왔습니다. 소유의 절반을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결정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이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자기 집에 머무시겠다는 말씀을 듣고는 너무 기뻐서 그렇게 했습니다.

또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그가 세리로서 세금을 걷다보면 혹시 이런 일이 있을지 몰라 그가 항상 염려가 되고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왜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하였느냐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출애굽기 22:1). 그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늘 마음이 찜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유하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그는 스스로 말씀대로 행할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것이 무엇입니까? 주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세리장인 삭개오의 옛동료였던 세리 레위도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것을 내어놓아 그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잔치를 하였습니다(누가복음 5:29). 주는 것은 실제로 힘듭니다. 우리가 늘 해보듯이 손을 안으로 접기는 쉽지만 밖으로 펴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려면 손을 펴야 합니다. 우리 피터 리 선교사님도 어릴 때 동생에게 주기 보다는 동생으로부터 빼앗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나서 주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양 동하형제에게 사도행전 20장 35절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그래서 동하 형제도 이 말씀을 듣고는 주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 복이 있다 하시니.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세금 거두는 사람이 주는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10)

9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가 결단하자, 예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하셨습니다. 그 구원은 바로 매국노 취급 받던 세리, 세리장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우리가 내 자신을 누구의 자손인지 아는 것이 우리 자신의 삶의 기초입니다. 우리 피터 리 선교사님은 이상필 시절에 자신을 ‘성산이씨 ㅇㅇㅇ파 삼십오 대 손’으로서, 삼강오륜을 지킨다 하였습니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선포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자랑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족속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반드시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삭개오는 바로 그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왕따당하였습니다. 곧 그는 지옥의 땔감으로 여겨졌습니다. 스스로를 생각할 때 너무나 마음이 따갑고 아팠습니다. ‘내가 왜 그런 삶을 살았을까?’ 싶었습니다. 인생에 있어 돈이 다인줄 알고, 장이 되고 타이틀을 얻으면 다인줄 알고 살아왔는데, 사람들로부터 ‘매국노’라고 따돌림을 당하였을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는 삶을 결단하였을 때, 그는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포 받았습니다.

이같이 예수께 나아와서 나아와 결단하는 사람, 잡아들이는데서 주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아니다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그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 믿고 장 되려하고, 예수님 믿고 부자 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삭개오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곳을 내어놓고 주려는 삶을 살 때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있게 될 사람이 있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같이 10절을 읽어봅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인자(人子)란 사람의 아들로서, 곧 하늘 보좌에서 사람에게 태어나신,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신 아기로 오셨다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왜 그런 고난을 받으시는가 하면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려 하심이라” 하십니다. 예수께서 왜 그렇게 고난 받으시는지,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지, 제자들은 당시에 깨닫지 못하였지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자”, “lost”, 길을 잃은 자, 목표를 잃은 자는 그냥 잃어버린 자로 잊혀져 갑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인자이신 예수님은 그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십니다. 목표를 잃어버리고 뭔가 잘못 된 것 같은데,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모르는 그 사람에게 생명과 빛을 비추시기 위해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삭개오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삭개오가 지금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주의 종들로 인해 예수님의 사랑의 그 냄새를 조금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가면서 자꾸만 내 시간도 빼앗기고 내 물질도 빼앗기고 무엇보다 나의 수고가 빼앗기는 것 같고, 내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 같이 때로는 낙심이 됩니다.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이런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데, 이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로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을수양회에서 들어야 할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입니다.

저는 그냥 잘 쉬면서 살려고 경영학과를 선택하였습니다.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을 했습니다. 돈이 생겨 좋았습니다. 택시를 탈 수 있어 좋았습니다. 회사에서 회식으로 곱창전골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런데 회사 생활을 조금 하면서 뇌물을 가져다주어야 했습니다. 선배들을 따라 룸싸롱도 가야 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술을 마시되 취하지 않는 것이 사나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술에 취해 전봇대 밑에서 얼어 죽을 뻔 했습니다. 그때 저의 친구가 말씀공부에 초청했습니다. 말씀공부를 통해 예수님 따르는 삶이 진실로 생명의 삶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뇌물 가져다주며 살지 않고도 살 수 있음을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스물여덟 살 때 삭개오가 결단한 것처럼 제 뿐만 아니라 대대로 예수님을 기념하는 삶을 살리라 결단하였습니다(출애굽기 12:13,14).

이 삶은 끊임없이 주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나의 생각의 흐름이 끊기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저의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다 내어놓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십니다. 삭개오 같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삭개오랑 일대일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각 사람의 믿음과 믿음생활에 대해 무엇이라, 무엇이라 하는 것을 듣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생기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일대일로 만나 주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에게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참 생명과 평강과 기쁨이 임합니다(요한복음 16:22,33).

삭개오가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예수님을 만나 그가 즐겁게 주는 삶을 결단하였습니다. 이로 볼 때 예수께 나오는 사람, 예수께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지금 시대에서 먹고 사는 것은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많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아이들도 그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집에서는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이지만 밖에서는 바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람하고 어떻게 얘기하여야 할지.. 그러나 삭개오가 결단한 것처럼 예수님을 만나면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도 주는 삶입니다. 다른 문화권에 가서 전도를 하는 선교역사도 주는 삶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주는 삶을 결단하였을 때, 그의 내면에 구원이 임하였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내 자신이 어떠하든, 사람들이 뭐라 하든, 시대가 어떠하든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께 나아가 온전한 생명 얻기를 기도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10)

 

2017 누가복음 39강 메시지 1901-1910 김요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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