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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가을수양회 1강 메시지                                                                                                        김바나바

로마서 7:7-8:11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저는 제 삶을 Best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Best가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고 애매했었습니다. Best로 살고 싶은데, 제 삶이 Best가 될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게임이나 하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고 말씀을 받게 되면서 그 Best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이를 메시지를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로마서를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호소입니다. Best를 추구하던 제게 바울 사도의 이 호소가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7-25)

바울 사도는 이제는 우리가 얽매었던 것에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6). 율법에서 벗어남으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게 된다 하니 우리로 하여금 죄에 얽매이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인 것 같습니다. 율법 자체가 죄의 근본 같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바울도 이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7절을 봅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죄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하지 않았다면 탐심과 우상 숭배, 간음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다 양심이 있어서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라는 것을 느끼지만, 왜 아닌지가 분명하지 않고, 또 그 양심의 기준도 다 다릅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간음에 대해, 어떤 사람은 간음은 가정을 파괴하는 흉악한 죄라고 하고,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간음은 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야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문제야라고 합니다. 하지만 율법은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 합니다. 율법은 무엇이 죄인지 분명하게 일깨워줍니다. 간음은 죄입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죄를 알게 하는 좋은 것임에 분명합니다.

8절을 봅시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 즉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습니다. 온갖 탐심을 막 불러 일으켰습니다. 내 속에 율법이 없을 때는 죄가 힘을 쓰지 못하였지만, 율법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율법이 있기 전에는 아무 일도 아니었던 일이, 율법이 있음으로 인해 탐심이 되고 간음이 되었습니다. 전에 바울이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살았었지만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그는 죽었습니다(9).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바울에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10). ‘율법도 지키지 못하는 너는 죽어 마땅해라며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바울을 속이고 그것으로 죽였습니다(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바울을 속이고 그것으로 죽인 것이지, 율법이 죄는 아닙니다. 이로 볼 때,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12). 죄라는 놈이 있기는 하지만, 선한 것이 우리에게 사망이 되었습니까? 바울의 또 다른 의문점이었고,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입니다. 그 목적이 우리를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에 있다 합니다(13).

어찌 되었건 율법은 신령하고, 우리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습니다(14). 15절을 봅시다.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합니다(15).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 율법에서 죄라고 말하는 것을 그 자신이 행함이었습니다(15).

만일 그가 자신이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그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한다고 하였습니다(16). 이는 그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런 일을 행하면서 이런 일을 하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 놀랍게도 바울이 발견한 것은, 17절을 봅시다. 그것을 행하는 자가 자신이 아닌 자기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그가 깨달았습니다(18). 원함은 있지만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는 것,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18,19). 그가 그 자신이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고 있으니, 이를 행하는 자는 그 자신이 아니요, 그 속에 있는 죄임을 발견하였습니다(20).

그러므로 그가 한 법, 원리, 법칙을 깨달았습니다(21).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그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법칙을 깨달았습니다(21). 22절과 23절을 봅시다. 그의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바울의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워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자신을 뻔히 보고, 보아야 하는 자신이 어떠하고 호소합니까? 자기가 즐거워하고 따르고 싶어하는 것과 반대로 행하며 사는 자신을 깨닫게 된 그의 마음입니다. 24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죄의 법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바울의 한탄입니다.

또 그에게 있는 소망의 고백입니다. 한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를 건져내실 분이 계십니다. 25절을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울을 포함한 사망의 몸에 매여 있는 자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율법이 아닌 영의 새로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께서 그와 우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그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증거합니다.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1)

81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정죄 받으면 사망입니다. 죄가 있으니 벌을 받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6:23).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2절을 봅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의 성령의 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3절을 봅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육신에 죄를 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곧 우리 죄를 예수께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다 치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4절을 봅시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죄에는 댓가를 치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 값을 다 치르심으로 그 요구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자에게 이런 큰 은혜가 주어집니까?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4).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5). 그런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을 아무리 들어도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7).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8).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육신의 생각을 벗어나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영의 생각을 하게 됩니까? 9절을 봅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바울 사도는 7장에서 자신의 속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그 몸은 죄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법을 섬기는 죄의 몸입니다. 이는 죽어 마땅한 몸이라,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겼습니다. 곧 율법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그는 담대히 증거합니다. 8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말씀에 순종하여 죄인들의 죄 값을 치르는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를 믿는 자, 곧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거하는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의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 죽을 몸이 사는 핵심입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의 죽을 몸이 당장 신령한 몸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하십니다. 바울사도가 고백한 것과 같이 우리 몸은 사망의 몸입니다. 하지만 몸은 죽을 몸이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는 주님 다시 오실 그날 주님과 함께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 있게 됩니다. 지금이 몸이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지금의 몸이 있는 것처럼 우리 각 사람이 믿음을 끝까지 지키면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됩니다(고린도전서 15:49-52).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시집도 가지 아니하고 장가도 가지 아니하는 신령한 몸으로 홀연히 변화됩니다(요한계시록 21:4, 마가복음 12:25). 죽을 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몸입니다.

 

저를 생각해보면, 제가 언제 예수님을 믿고 나름 이렇게 신앙투쟁을 하게 되었는지, 참 신기합니다. 저는 참 곤고한 자였습니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한 고백과 내용적으로 차이는 있겠지만, 죽을 것 같이 곤고한 자였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저는 외로웠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군대에서 저는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는데, 한 후임은 수첩에 써 놓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있었습니다. 신기해서 하나님이 진짜 있냐, 어떻게 믿게 됐냐 등 궁금한 것을 묻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진짜 살아 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 전에는 누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전도해도 전혀 들리지도 않았는데 마음에 갈급함이 있으니 들렸던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 하나님을 알고 제대 후에 교회를 다니고 말씀공부를 하면서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음란물을 보고, 정욕에 따라 행하여 낙태를 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양심에 조금 거리낌이 있기는 하였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는 것 같아 보이고, 또 제 자신으로는 책임도 질 수 없어도 자기합리화를 하였습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면서, 이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 제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는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제 죄를 다 감당하신 예수님은 제게 참 은혜요 또 제게 구주이셨습니다. 말씀에 따라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니 제 욕심을 위해 생명을 죽인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에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라는 대책 없는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책은 없었지만 감사가 있어 기뻤습니다.

그 후 학교에 복학하여 20102학기에 친구를 통해 이마태 목자님을 알게 되었고, 일대일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모임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방학 때 창세기 말씀으로 그룹공부를 하면서 창세기 154절 말씀이 제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당시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에 차선으로 자신이 아끼는 하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하셨습니다. 아끼는 하인이 상속자가 되는 것과, 내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베스트입니까? 당연히 내 몸에서 날 자가 베스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베스트를 주시는구나! 이 하나님은 따를 만한 분이다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따르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떻게 애를 썼냐 하면, 매주 소감도 쓰고 말씀공부도 하고, 싱프 특송, 기도, 캠퍼스모임 인도 등 주어진 일을 감당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습니다. 투덜대고 불평하고 우는 소리를 많이 해서, 바른 소리 잘하는 마리아 목자님에게 찍히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당하긴 했지만 무진장 애를 썼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따르면서 제게 생긴 일이 뭘까요? 제가 기대한 바는 공부한 것보다 학점도 잘 받고, 좋은 곳에 취업하고 돈도 잘 벌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생긴 일은 이런 것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계속해서 듣게 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생각했던 베스트의 의미를 조금씩 바꾸어 가셨습니다. 마태복음 419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 그 갈릴리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제게 들려왔습니다. 스스로의 생각으로는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 사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면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깊은 곳으로 초대하시고 이끄십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제 기분이 묘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고, 한편으로는 굳이 이런 삶을 살아야 되나 싶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을 따라갈 때 베스트를 주신다고 하니, 그렇게 살아야 하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스스로를 생각해볼 때 저는 저 한 사람 감당하기 벅찬 존재임에 분명하지만, 예수님 말씀 따라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을 살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학과 후배 형제를 말씀으로 돕고자 하고, 나의 부족함을 콕콕 찌르는 사람들이 있는 틈바구니 속에서 참으며 동역을 이루어가려고 하고, 그리고 이제는 세대차이가 확실하게 나는 1학년 형제와 일대일 말씀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예쁘고 또 뭐든지 잘하는 마리아 목자님과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기도하던 대로 김해에 직장의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셨습니다. 이제는 그야말로 동역하며 말씀역사에 쓰임 받으면 될 것 같은데, 이 일이 마음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현재까지 가정에서는 마리아 목자님이 아침도 잘 챙겨주고, 일 다녀오면 아로니아도 갈아주며 저를 섬겨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주일 내내 직장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소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늦게까지 야근해도 일은 쌓여만 가고 잔소리 듣는 건 일상입니다. 이런 중에 일대일을 생각해야 하고, 요회를 생각해야 하고, 메시지도 준비하다 보니 현실적으로 사람 낚는 어부의 삶이 가능한 일인지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런 삶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셔서 이렇게 두시는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해보려고 애를 써도 안팎으로 고생만 하며, 열매 없이 찌질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는 바울 사도의 호소가 제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이 마음으로 말씀을 읽으니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제가 이 땅에서 앞으로 더 고생할 수는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면 나의 죽을 이 몸이 다시 삽니다.

화려한 삶을 살다가 화려하게 죽으면 그 삶이 참 화려하기는 하지만, 베스트는 아닙니다. 이 땅에서 고난을 제대로 감당하고 새로운 몸으로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베스트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제가 경험한 것은, 정말이지 회사고 말씀역사고 다 때려 치우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가득차고 심신이 지쳤는데, 이러다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 것을 생각하고 참고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회사에서 다들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무례하게 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대일과 요회 등 말씀역사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조금 힘들면 포기하고 쉬운 길을 찾아 가다가 열매 없이 그야말로 찌질하게 살 인생인데, 다시 살 소망으로 감당하게 하시고, 한계에 도전하게 하심으로 앞으로 열매 맺게 하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능히 자비량하며 캠퍼스 영혼들을 살리는 어부의 삶을 살게 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 이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아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

 

2018 가을수양회 1강 로마서 0707-0811 김바나바.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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