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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018.01.15 17:13

2018년 갈라디이서 2강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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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갈라디아서 2강                                                                                                   김요한

갈라디아서 2:1-21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내 안에 무엇이 사는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제 속에 괴물이 살고 있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 사신다고 믿는 바울 사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1-14)

1절을 봅시다. 십사 년 후에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헬라 사람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바울 사도가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습니다. 이에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왜 갔습니까? 계시를 따라 올라갔습니다(2상). 하나님으로부터 나타난 방향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역사를 예루살렘 총회에 제시하였습니다(2중).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그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습니다(2하).

바울 사도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는 많은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와는 관계없이 안디옥에서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데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이방 가운데 전파된 복음역사가 헛되지 않게 하려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그 믿음이 헛되지 않도록 바울 사도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복음을 세우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우고자 하는 그 한 가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 교회 역사의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 사도의 진정한 겸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 한 가지 점에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하나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헬라사람 디도가 있었습니다. 3절을 봅시다. 그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하나가 되고자 하면서도 그는 왜 이렇게 하였습니까? 4절을 봅시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습니다. 거짓이란 참과 다른 것입니다. 원래 있던 것에 더하기도 하고, 뺀 것이 거짓입니다. 워낙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리신 예수께서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내가 죄에서 사함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것을 증거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거짓 형제들이 가만히 들어와 있었습니다. 누가 나는 거짓 형제다 하고 교회에 들어오겠습니까? 내가 거짓말한다 하고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합니다(4하). 할례 받아야 한다며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율법의 종이 되면 믿음에서 오는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들에게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5상).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성도들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바울 사도가 할례를 행하게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절을 보면 바울이 헬라인 디모데를 데리고 가면서 루스드라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어떤 때는 할례를 받지 않게 하다가 또 어떤 때는 할례를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볼 때 복음 진리가 그의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할례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생명을 얻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할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력하다는 이들 중 어떤 이들과도 그와 상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6상). 사람들은 대개 높은 사람을 만나면 자기 뜻을 꺾고 높은 사람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나라 같이 장유유서의 문화가 깊은 곳에서는 나이 든 사람이 말하면 나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를 본 어떤 형제가 ‘썩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므로 나이가 많든, 유력하든지 어떤 이들이든지 그와 상관이 없다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총회 유력한 이들은 그에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6하), 도리어 그들은 바울이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7).

8절을 봅시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셔서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또한 바울에게 역사하사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음을 그들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습니다(9상).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었습니다(9하). 이분들은 다 바울, 베드로, 바나바, 야고보, 요한 모두 다 다른 복음은 없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 진리를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습니다. 각기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로써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는 가운데 예루살렘 총회에서 안디옥 교회에 특별히 부탁한 바가 있습니다. 10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왜 이 말씀이 복음진리를 세우는데 있어 중요하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은 점에서는 하나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사는 사람이 실제로 행하여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시험 잘 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믿음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0:27).

이웃을 사랑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부자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마가복음 10:21). 이웃을 사랑한다 함은 필요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옷 두 벌이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셨습니다(누가복음 3:11). 제가 아직 예수님을 모르던 학생 때에 어떤 얼굴 아는 학생이 12월 어느 날 제게 와서 외투를 벗어라 하였습니다. 성탄에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나중에 제가 우리 모임에서 보니 그는 벌써 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이든, 안디옥 교회이든, 지금 우리든 가난한 자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사도행전 20:35) 말씀은 자기 밖에 모르던 어떤 형제에게 복음으로 들려 왔습니다. 결혼 메시지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저는 부전공으로 경영학을 공부하는데, 많은 성공한 경영자들을 연구한 보고에 의하면 성공비결 중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섬기는 삶입니다. 우리 모임에서 탁구를 제일 잘 치는 Peter Lee 선교사가 항상 우리에게 탁구를 가르쳐주면서 말해주기를 ‘상대방이 잘 칠 수 있도록 공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리더가 됩니다.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우리가 할 일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게바, 베드로 사도를 얼굴을 보며 책망하였습니다(11). 베드로 사도가 안디옥에 있을 때에 예루살렘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오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습니다(12).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슬그머니 자리를 떴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도 그들을 따라 자리를 떴습니다(13).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를 책망하였습니다(14상). 그는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습니다(14하).

이 책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경선생이 되어서 너무 많이 가르치려고 자기 아는 것을 자기도 지키지 못하면서 지키라하기 쉽습니다. ‘아침 일용할양식을 먹으라’ 하고는 매일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 편리에 따라, 여행을 한다든지 하면 양식을 먹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뭐라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담대하게 말 하고 살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15-21)

15절을 봅시다. 베드로든 바울 사도든 바나바든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하여 이방인의 모든 상태를 잘 알고, 또 이방인이어서 이방인 역사를 이루는데 쓰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경상도 사람이 경상도에 가서 복음을 잘 전할 것으로, 그 대학 출신이 그 캠퍼스를, 그 나라 사람이 그 나라를 잘 섬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방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인데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16절을 봅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됩니다(16상). 이를 바울 사도가 알았습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어디 출신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자냐, 여자냐, 무슨 체험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함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16중).

정말 잘 사는 것이 무엇일까,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 참된 삶이 무엇일까 라고 투쟁하며 찾아낸 답입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16하). 어떤 사람도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는데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17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큰 은혜를 받아서 성경 말씀을 읽고, 죄 사함의 은혜를 입어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평강과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빛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면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 자신이 얼마나 되먹지 않은 사람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주기 보다는 받기에 익숙하고 내 편한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나로 하여금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였으니,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 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그가 그 자신을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18). 그래서 바울 사도가 증거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율법에 따라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입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20절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모든 율법으로부터 그는 이제 관계가 없게 되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 안에서 살고자 하면 할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육체인 나는 도저히 안 된다며 믿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마찬가지이니 믿음생활을 그만두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백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씀을 읽으면 말씀의 빛이 내게 비춰지고 그 빛으로 인해 내 속에 있는 어두움이 자꾸만 발견됩니다. 곤혹스럽고 혼란스럽습니다. ‘나는 좀 제대로 살고 싶은데, 왜 나는 자꾸만 죄인으로 발견되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경 읽는 것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뭔가 잘못 된 것 같기는 한데, 자신으로 죄인으로 드러내고 인정하기가 힘들어서, 자꾸만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은 이것이다고 자신을 주장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발견된 자신을 보고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 고백했습니다(디모데전서 1:15).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이제 그가 사는 것은 오직 자신을 사랑하셔서 자신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백합니다. 이는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20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21절을 봅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내가 죄인일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대속제물이 되신 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을 뿐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도 바울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다고 담대히 증거 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책망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주장대로 막 산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지만 당시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겼던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세우는 일에 쓰임 받고자 하였습니다. 이 일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비난을 이방인들에게는 거부를 당하였습니다. 유대인 중에는 바울을 죽이려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들이 사십 명이 넘었습니다(사도행전 23:21).

사람 살리는 일, 복음 전하는 일은 내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죽으려면 죽을 것 같이 힘듭니다. 저 자신을 볼 때 언제 제가 괴물이 되는가 보니, 제가 죽기 싫어 발광을 할 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바울 사도 안에 사시는 분은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리는 일에 자신을 내어 놓았습니다. 남이 보이고 남, 사람 살리는 길이 무엇인지 보였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죄인의 괴수 바울이 세상사는 비결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는 사람이 되어 나 자신이 살 뿐만 아니라 남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2018 갈라디아서 2강 메시지 0201-0221 김요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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