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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13강 정여호수아

사도행전 14:1-28

 

 

환난과 하나님의 나라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사도행전 14:22)

 

성경에서 우리는 역설의 진리가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마태복음5:3). 고난이 유익이라고 합니다(시편 119:71).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합니다(로마서 8:24). 죽으면 다 끝난 것 같은데 도리어 죽어야 산다고 합니다(고린도전서 15:36). 핍박이 교회를 망하게 할 것 같은데, 도리어 복음 전파를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사도행전 11:9). 유대인들의 배척이, 도리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줍니다(사도행전 13:46).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따라 이 역설의 진리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으로 듣고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먼저 이고니온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1-7)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박해로 인해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으로 와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1). 그러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1). 그러자 순종하지 아니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믿은 그 형제들에게 악감정을 품게 했습니다(2). 이때 두 사도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3절을 봅시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가르쳤습니다(3). 그 결과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그들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은혜의 말씀임을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3). 이후 유대인을 따르는 자들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4). 해가 비추면 빛과 어둠이 있는 것처럼, 말씀 사역이 있는 곳에도 믿는 사람과 함께 믿지 않는 사람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그들을 중심으로 관리들까지 연합하여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5). 두 사도가 이를 알고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도망했습니다(6). 이때 그들은 마음이 위축되어 잠시 숨어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7). 박해가 복음 전파를 멈추게 할 것 같았지만 그 박해가 도리어 더 많은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하게 하였습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역사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끌어 내치니(8-13)

8절을 봅시다. 루스드라에 나면서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눈을 반짝이면서 들었습니다. 말씀을 집중하여 듣는 그를 주목하면서, 바울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확신하고(9), 그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그러자 그 사람이 즉시 일어나 걸었습니다(10). 마치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일으시키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켰던 것과 같은 사건이 이곳 루스드라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1절을 봅시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이들은 그 시대 공용어인 헬라어를 주로 썼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방언으로 소리를 지릅니다. 우리도 평소에 표준어를 쓰던 분들이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전화하다가 흥분하면 막 그 지방 사투리가 나옵니다. 이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렀다는 것은 이들이 바울을 통해 일어난 일에 대해서 얼마나 흥분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기들 방언으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하였습니다. 그래서 좀 풍채가 좋았는지 바나바를 신들의 대장인 제우스, 앞서 말하는 바울을 신들의 대변인인 헤르메스라고 하였습니다(12). 그리고는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가지고 와서 무리와 함께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하고자 하였습니다(13). 처음에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이들이 소리 지를 때는 무슨 소리인지 바울과 바나바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들을 신으로 제사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고니온에서는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했는데, 루스드라 사람들은 정반대로 신처럼 대우를 해준 것입니다. 이때 두 사도는 나는 신이다에 나오는 누구처럼, 자신을 신격화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카리스마가 커질수록 설교의 위력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이 유대인들의 박해와 공격을 막아줄 수 있는 방패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14절을 봅시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고 무리가운데 들어가서 소리 질렀습니다. 먼저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신들에게 제사하는 헛된 일을 버리고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5).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신들이 우리처럼 서로 사랑하기도하고 싸우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신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 같지 않은 신들에게 제사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허접한 신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신화적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경배하고 섬겨야 할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16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그냥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렇다고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때마다 수확을 하도록 하시며 돌보셨습니다. 그 수확한 것으로 먹고 살며 기쁨을 누리며 만족하게 하셨습니다(17). 하나님은 이렇게 자연만물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여 오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일을 제우스와 같은 신들이 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러한 신들에게 제사했습니다. 헛된 것을 섬겨 온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그렇게 했을지라도 이제는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곧 복음을 전하는 목적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겨우 무리를 말려라고 했습니다(18). 그만큼 사람들의 요구는 강렬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은 이들보다 더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오직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19절을 봅시다. 그때 마침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쳤습니다. 여기서 그들이누구입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나바와 바울을 신이라고 하면서 열렬히 추앙했던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유대인의 충동을 받더니, 갑자기 돌변하여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그가 죽은 줄로 알고는 시외로 끌어 내쳤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에, 수많은 백성의 무리들은 열광하며 찬송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가복음 11:9)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왕이 되기를 거부하자, 실망한 그들의 열광과 찬송은 갑자기 돌변하여 비방과 저주와 폭력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누가복음 23:21) 사람들의 인정이나 인기라는 것은 이 만큼이나 허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고 하였습니다(이사야 2:22). 그의 호흡이, 코에 있는 셈할 가치가 없는 인생을 의지하는 순간 그는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누구의 인생이 더 망한 것 같습니까? 누구의 삶이 더 허망한 것 같습니까? 바울 사도인 것 같아 보입니다. 믿어봐야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습니다. 선교 역사고 뭐고, 이제 다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돌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바울 사도가 일어나 말합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받아야(20-28)

20절을 봅시다. 제자들이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성밖에 버려진 바울을 삥 둘러섰습니다. 여러 힘들고 복잡한 심경가운데서도 바울에게 장례라도 치러주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바울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 성, 곧 그를 돌로 쳤던 바로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물론이고, 돌로 친 대적자들이 더 놀랐을 것입니다. 그가 사람인가 유령인가 혼비백산하여 감히 손을 대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음날에도 그는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20),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21). 그리고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을 심방하고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21). 무슨 오뚜기도 아니고, 불사조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상처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트라우마도, 또 상처 준 사람에 대한 미움과 원망 같은 것도 없습니다. 아무 거리낄 것도, 거칠 것도 없습니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이같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게 한 것일까요?

다 같이 22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이로 볼 때 다른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버려졌을 때 마음이 흔들리고 약해졌습니다. 이 믿음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믿으면 항상 좋을 일만 있을 것 같고, 꽃길만 걷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늘 마음의 평안을 얻고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을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그 그런 기대와는 다르게 도리어 더 큰 고난과 환난을 겪습니다. 믿기 전보다 더 상황이 악화되는 상황으로 내몰리기도 합니다. 이런 환난을 계속 겪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서 점점 회의적이고 불신적인 생각에 시달립니다. 그렇게 처음 가졌던 그 믿음이 점점 흔들리고 믿음의 삶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22) 우리는 고난 받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고난 그 자체가 힘들기보다 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모르겠을 때가 더 힘듭니다. 그 고난에 대한 해석이 되지 않아 힘듭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의미를 알고, 해석이 되기 시작하면 그 힘들게만 느껴졌던 고난이 어느 순간부터 고난이 아니요, 도리어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 시작합니다. 너끈히 감당하는 자리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볼 때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우리가 받는 고난은 우리 인생을 망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시선을 돌려 이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로부터 돌려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환난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좋은 것, 곧 하나님 나라를 주고자 하시는 특별하신 은혜요, 선물입니다. 또한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하는 축복의 통로요, 그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로마서 5:3). 히브리서 기자도 환난이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히브리서 12:11). 베드로 사도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장에 있는 고난에 눈이 가려지지 말아야 겠습니다. 고난뒤에 있을 장차 얻게 될 더 큰 영광,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생각할 수 있어야 겠습니다(로마서 8:18, 베드로전서 1:4). 주 안에서 고난받는 일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부인하고 결단하여 영혼들을 도왔는데도 오해와 비난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많은 시간과 물질을 희생했는데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하여 낙심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착한 마음이 바닥을 드러내고 자기가 깨어지는 고통과 우울함으로 절망의 터널을 지나야 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저도 여러 가지 실수와 허물, 그리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여러 고난으로 인해 자책과 번민과 우울함으로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 이래서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지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 고난이 하나님 앞에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귀한 양분이 되었습니다. 저의 인간적인 좋은 마음이 다 깨지고, 제 속에 실제로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독불장군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귀를 열고 들을 생각을 하고, 엎드려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저 같은 자도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빚어 가고자 하시는 소망의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평생 혈기를 부리다가 여러 사람 괴롭게 하고,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사는 고난과 수고와 고통으로 끝나버렸을 저의 비참한 인생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것을 위해 수고하고 고난 받는 축복된 인생으로 바뀌었다는 이 사실이 지금 저는 너무도 감사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저의 죄와 허물과 실수조차도 선으로 바뀌는 통로가 되며, 제가 하는 모든 수고가 영원한 것을 위한 수고가 됩니다. 제가 이 믿음안에 계속 머물러 있어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계속해서 깨닫고 누리고 나누며 증거하는 믿음의 삶을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23절을 봅시다. 이후 바울은 개척했던 교회들을 하나씩 돌아다니며 장로들을 세우고 그들에게 양들을 돌아보도록 부탁하였습니다. 비시디아와 밤빌리아를 거쳐 버가에서 복음을 전하고(24-25),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하고 제자들을 돕기에 힘썼습니다(26-28).

갈수록 시대가 악해져 갑니다. 또 어렵습니다. 이런가운데 우리는 믿음의 중심 지키는 것 조차도 쉽지 않습니다. 믿음 지키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이 고난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고난입니다. 없어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것을 위한 수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영원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과 소망을 따라 지금 있는 고난을 실제에서 감당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와 복음을 증거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난에 우리의 눈과 귀가 가려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며, 이를 있는 대로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2023년 사도행전 13강 메시지 1401-1428 정여호수아.hwp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사도행전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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