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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7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누가복음 6:17-49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누가복음 6:35)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는 일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프셔서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제자 중에 열둘을 택하셔서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는 같지 않은 사람 살리는 지도자요 리더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이 소망을 따라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사 평지에 서셨습니다(17). 거기에는 그 제자의 많은 무리뿐 아니라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받고자 나아온 많은 백성들이 있었습니다(18). 예수께서 병자들뿐 아니라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치심을 보고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만지고자 하였습니다(19). 그 때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6:20-26)

20절에서 23절을 봅시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놀랍게도 예수님은 너희 가난한 자, 지금 주린자, 지금 우는자, 나 때문에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반면에 부요한 자, 지금 배부른자, 지금 웃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자가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24-26). 어떻습니까? 동의가 되십니까? 혹시 순서를 뒤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박해받는 자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받는 삶에 행복이 있다고 믿습니다. 누구나 이런 삶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어째서 지금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박해받는 자가 행복합니까?

20절을 다시 봅시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것임이요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대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예수께서 주시는 은혜, 곧 하나님 나라를 체험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름으로 스스로 가난하게 되기도 하고, 굶주리기도 하고, 우는 자들이 됩니다.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미움과 박해를 받는 자들이 됩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수도,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주시는 진리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그 영혼의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것으로는 진정한 만족과 안식을 누릴 수 없고, 어떤 소망과 위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그 마음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있는 자들이야 말로 진실로 "복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자들은 어떠합니까? 세상에서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지금 별로 아쉬울 것이 없으므로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과 위로도 맛보지 못합니다. 맛보지 못하니 관심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오직 세상이 주는 위로, 세상이 주는 기쁨, 세상이 주는 칭찬만을 양식으로 삼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이미 위로를 받았으므로 받을 위로가 없고, 또 주릴 것이며, 애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어떤 목자님은 실업하고, 실업 급여로 양들을 먹이느라 생활이 쪼들린다고 합니다. 또 어떤 목자님은 죄가운데서 허덕이는 양들을 도울 수 있는 믿음이 없어서, 또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괴로워서 웁니다. 또 어떤 형제는 똑같은 죄에 계속 넘어지고,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여 웁니다. 저도 역사에 대한 스트레스로 스스로 감당이 안되어 자녀들에게 화를 내는 자신이 너무 못나서 많이 울었습니다. 때마다 발견되는 나의 부족함과 허물과 죄로 인해서 괴로워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같이 가난한 삶을 살고 굶주리고 애통합니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이런 거룩한 투쟁을 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있는 사람은 갈급한 마음으로 주를 찾게 되고,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를 의지하고, 주의 은혜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주께서 채워주시는 은혜와 돌보심과 위로를 경험합니다. 현실은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고, 배고프고, 슬프고, 괴로운데, 내적으로는 그 영혼과 마음에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위로가 있고,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미친 사람입니까? "복 있는 자"입니다.

이 복에 대해서 바울 사도도 고린도성도들에게 이같이 증거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 6:9,10) 비록 가난할지라도 하나님 나라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기고 감당할 수 있는 우리는 진실로 복 있는 자입니다.

이같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복 있는 자로서, 제자는 지금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27-36)

27절을 봅시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세상 사람들은 원수를 어찌하든지 복수하고자 합니다. 미워하는 자를 대적합니다. 조금이라도 부당한 대우나 모욕을 받으면 평생에 원수가 되기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녀에게까지 원한을 물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듣는 자, 곧 제자들은 달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하십니다.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28). 심지어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29).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30),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십니다(31). !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부담스런 말씀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생각을 아십니다. 그래서 무엇이라 하십니까?

32-34절을 봅시다.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자는 사랑하고, 선대하는 자는 선대합니다. 받기를 바라고 돈을 꾸어줍니다. 제자로서 이 정도 죄인들도 하는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진실로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이보다는 더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라 하십니다(35).

제자로서 죄인과는 좀 달라야 하는 것도 알겠고, 또 그렇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이 있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현실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과연 이 높은 수준의 삶을 실제로 살아 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오직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너희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우리가 바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곧 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35).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그 나라를 유업으로 잇게 된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자녀인 우리 모습을 보고 세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알고 경험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이십니다(35). 그 해와 비를 선인뿐 아니라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악한 자에게까지도 골고루 비추시고 내리십니다(마태복음 5:45). 무엇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8).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기도하셨습니다(누가복음 23:34).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주께로부터 이 같은 자비와 사랑을 입어 주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따라 그 자비하심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36)? 우리가 나 같은 죄인도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며,  원수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수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비판하지 말고 용서하라(37-45)

37,38절을 봅시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적인 사고는 해야 하지만, 비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정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비판과 정죄는 사람을 질식시킵니다. 사랑을 메마르게 합니다. 메마르게 할뿐 아니라 반발심, 적대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낳습니다.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결국 서로간에 관계성을 파괴시키고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므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대신 용서해야 합니다(37). 그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용서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습니다. 그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헤아림을 받습니다. 어느 정도로 헤아림 받습니까?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십니다(38).

그런데 용서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39절을 봅시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습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듯, 그는 맹인이 되어 선생으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합니다(40).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여 외식하는 자가 됩니다(41,42).

바리새인들이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 잘라먹는 것으로 비방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오른손 마른 자를 예수님을 고발할 수단으로 여기는 더 큰 악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 자기 발견이 안된 사람이 하는 일이 실제로 이러합니다. 원수에 대한 용서와 사랑은 먼저 자기의 허물을 보고 형제자매를 대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앞에서 나를 제대로 보고 상대를 볼 때 관대해 질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맹인된 상태에서 벗어나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뺄 수 있습니다(42).

그 분명한 증거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입술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43절을 봅시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합니다(44).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합니다(45). 결국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이 말로 다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말로만 나타날까요?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46-49)

46절을 봅시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주여 주여말하는 사람은 선을 쌓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주님이 하신 말씀을 행하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 말씀대로라면, 자비와 용서를 베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누구와 같은지 보여 주겠다고 하십니다(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48). 주추를 반석 위에 놓으려면 땅을 깊이 파야합니다. 깊이 팔려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시간도 많이 들고, 비용도 많이 들어갑니다. 겉으로 볼 때 이 사람은 괜히 엉뚱한데 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아닙니다.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는 날이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그때에 그 집은 잘 지어졌기에 요동치 않습니다(48). 반면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아서,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게 됩니다(49).

결국은 기초공사가 중요합니다. 주추를 반석 위에 놓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볼 때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주의 사랑, 주의 자비하심과 은혜 안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감당해주신 주의 용서와 사랑을 알고, 믿고, 배우는 일에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는 어떤 크고 거친 탁류가 부딪혀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원수 같은 사람도 실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초를 놓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따라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봐야 하고, 또 눈에 박혀있는 들보를 빼내야 합니다. 이는 마치 반석위에 구멍을 뚫어 주추를 놓는 것처럼 느리고 더디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안정하고 튼튼하고 지혜로운 인생의 집을 짓는 길입니다.

우리가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는 가짜 축복에 속지 말아야 겠습니다. 말씀을 따라 지금 여기서 자기를 발견하는 씨름, 이런 나를 주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알고 배우는 씨름, 그리하여 지금 내 곁에 있는 원수를 실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씨름을 계속 해야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말씀을 따라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주의 사랑을 알고 또 그의 자비를 배워, 지금 여기서 나를 괴롭게 하는 그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주의 제자요, 빛의 사도로 능히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누가복음 6:35)

 

2022년 누가복음 7강 메시지 0618-0649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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