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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16강 정여호수아

사도행전 17:1-34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사도행전 17:11)

 

오늘 본문 말씀은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을 개척하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베뢰아에서 믿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만 있는 다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이를 자세히 미루어 살펴서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전파자로서 바울 사도, 그리고 말씀에 대한 베뢰아 사람들의 자세를 겸손히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무엇을 했습니까?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1-10)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가를 지나 마게도냐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어 많은 고생을 했지만, 이곳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1). 그래서 그는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였습니다(2). 강론한 성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뜻을 풀어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3).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하였습니다(3). 바울은 이를 하되 세 안식일동안 꾸준히 했습니다. 그러자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4).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다른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의 뜻을 풀어주는 것이 복음전파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 역사입니다.

우리는 오늘 같은 시대에도 과연 말씀을 듣는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처음부터 말씀보다는 다른 것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정말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가 증거한 바 대로 오늘날 이 말세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양식이 없어서 주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없어서 갈한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함에서 오는 기갈에 고통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아모스 8:1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는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요즘 양들이 당장에 보기에 성경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지만, 우리는 그들의 겉모습에 속으면 안됩니다. 실제로는 누구보다 애타게 하나님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싶어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그것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와 같이 성경을 가지고 승부를 해야 합니다. 말씀을 풀 수 있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에서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는 그 사람의 내면에 친히 믿음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제가 이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알고,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이런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5절을 봅시다. 그들은 누구도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경건한 헬라인은 믿었는데, 정작 가장 잘 믿을 것 같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지 아니할 뿐 아니라, 시기심에 사로잡혀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였습니다. 믿은 사람중에 한 사람인 야손의 집까지 쳐 들어가서 바울 일행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습니다. 바울이 없자 야손과 함께 있던 형제들을 대신 잡아서 읍장에게 끌고 가 고소하였습니다(6). 그들은 이들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6). 또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곧 예수를 왕이라고 하는 무리라고 했습니다(7). 읍장은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을 잡았다가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었습니다(8,9). 이 소동으로 인해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 밤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급히 베뢰아로 보냈습니다(10). 그런데 베뢰아에서는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0-15)

그들이 베뢰아에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10). 그런데 그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습니까? 다같이 11절을 한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먼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습니다(11). ‘너그럽다를 이전 개역 한글에선 신사적이다’, 공동번역에서는 마음이 트여있다로 표현했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은 편견이나 선입견 때문에 바울이 증거하는 메시지를 처음부터 원천 차단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대해 열린 자세로 듣고자 했습니다.

요즘 많은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나 반감 때문에 말씀 자체를 아예 듣지 않으려 합니다. 자신들의 귀를 닫아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이나, 신앙생활한지 오래된 사람들도 자신이 말씀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기초해서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이제까지 사도행전을 공부해오면서 우리는 이 사실을 매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는 유대인들이 실제로는 가장 복음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이런 자세를 취하지 않고, ‘Open mind’를 가지고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11). ‘간절한 마음자발적이고 열정적인 마음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소원과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열정만 앞세운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11). ‘상고한다는 말은 자세하게 골라내다’ ‘조사하다’ ‘탐색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이 정말 맞는지? 틀리는지? 구약성경을 열심히 뒤져가면서 찾고 탐색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고민하고 살피고 또 고민하고 살폈습니다. 잘 이해가 안되면 이해가 되기까지 말씀과 씨름했습니다. 이를 하되 날마다 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을 봅시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인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였습니다. 귀부인들의 관심은 인생에 대한 심각한 고민보다는 패션이나 화장품, 또는 보석과 같은 것에만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또 새기고 생각하는 가운데 귀부인들까지 마음에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와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말씀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말씀을 들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것이 정말 그러한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이는 말씀에 대해 늘 삐딱한 시선과 딴지 걸려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늘 보던 그 말씀이 아니라, 낯선 마음으로, 잘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일테면 긍정적 의심’, 더 나아가 거룩한 의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의 성경공부로 쌓인 지식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대충 다들 안다고 여기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대충 하다보면 정작 중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기 쉽습니다.

제가 학생시절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다시 성경본문을 관찰하면서 생각하는 중에 깨달은 중요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열왕기서를 보면 여러 왕들의 이야기가 수없이 반복됩니다. 북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왕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여로보암의 길을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열왕기상 16:19.22:25) 그렇다면 그 반대는 여호와 보시기에 선을 행하여다윗의 길로 갔다고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다윗의 길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열왕기상 15:5,11). 이를 통해 저는 여호와가 보실 때 악한 왕들의 그 악함, ‘정직하지 않은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자생활하면서 가장 힘써서 해야 할 일이 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것임 알게 되었습니다. 올해 초에 제가 이를 잃어버렸을 때 실제로 어떻게 되는지를 확실히 보았고, 또 깊이 체험했습니다. 진실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십니다(시편 19:7,8).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시편 1:1,2). 아멘!

지금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2년전까지만 해도 저는 목자님이 말해주시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받아 적기 바빴습니다. 그것이 물론 도움이 안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목자님이 깨달은 것이지, 제가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전히 제 것이 되지는 않았고, 제 속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가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또 증거해야 하기 때문에 본문 한 절, 한 단어도 그냥 대충 넘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의 생명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아야 겠기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받고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제가 어떤 목자님이 말한 것처럼 가장 큰 수혜자는 메신저임을 여러 모양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입은 이 복된 자리와 직분을 깊이 감사하며,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고 증거하는 이 은혜와 특권을 잘 누리고,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뿐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가운데 이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3절을 봅시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소문을 듣고 베뢰아까지 몰려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베뢰아 형제들은 급히 바울을 내보내어 아덴으로 떠나보내고,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게 했습니다(14,15). 여기서 아덴아테네입니다. 곧 헬라 철학의 중심지요, 그리스 신화의 중심지입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어떤 메시지를 전했습니까?

이제는 회개하라(16-34)

16절을 봅시다.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기를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헬라인들과 변론했습니다(17) 그러자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도 쟁론을 벌이게 되었습니다(18).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 메시지는 몸을 강조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에도 반하고, 영혼을 강조하는 스토아에 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이 바울을 붙들어 그들의 종교재판소인 아레오바고로 데려가서 더 자세히 듣고자 하였습니다(19). 이는 당시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1).

어떻게 보면 이들은 베뢰아 사람들과 좀 비슷한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갈급함과 단순한 지적인 호기심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우상들이 만족을 주지 못하니까 끊임없이 새 것을 찾았습니다. 만족을 주었다면 또 다시 새로운 우상을 찾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새 것으로 호기심을 채웠다가 지루해지면 또 다시 다른 것을 찾았습니다. 이런 아덴은 현대 사회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은 새로운 제품, 새로운 패션, 새로운 문화상품, 새로운 여행지, 새로운 사람을 만남으로 공허한 내면을 채우기를 원합니다. 존재감을 느끼기 원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채워줄 수 없음을 느낍니다. 어느 시대보다 많은 경험을 하지만, 어느 시대보다 공허하며 불안하며 스트레스와 정신병이 많고 우울증 환자가 많아지는 이유입니다.

이런 아덴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너희가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고 합니다(22). 알지 못하는 신들을 위한 제단까지 만든 것을 보니 정말 그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 신이 누구인지 내가 알려주겠다고 합니다(23). 그분은 바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다른 우상신처럼 사람이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24). 또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의 섬김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십니다(25). 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에 살게 하신 분이십니다(26).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우상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닙니다(29).

30절을 봅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여기서 바울은 역사를 알지 못하던 시대이제’, 둘로 구분했습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BCAD로 구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는 각종 우상들을 섬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으니까 당연히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간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간과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이미 주셨다고 합니다(31).

이 메시지를 들은 아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조롱하고 어떤 사람은 다음 기회에 다시 듣겠다며 거절했습니다(32). 믿고 돌아오는 역사는 그렇게 없었고 이에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떠났습니다(33). 다만 디오누시오와 다마리와 소수의 몇몇 사람들만 믿었습니다.

이를 보면 아덴역사가 조금은 실패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아덴 사람의 문화와 생각과 가치관을 제대로 파악 놀라운 메시지였습니다. 우상숭배의 본거지에 들어가 과감하게 던진 도전적인 메시지 였습니다. 결과가 어떠했든 오늘날 우리가 양들을 말씀으로 섬기고자 할 때 배워야 할 복음전도자의 참 모습입니다. 바울을 잘 배워 말씀 듣는 대상을 잘 알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노력과 시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이상에서 우리는 바울의 선교사역은, 곧 말씀전파였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상고한 베뢰아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구원을 얻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를 바꾸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나 깨나 우리가 집중하여 붙들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갈수록 말씀이 희귀해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 가운데서도 우리가 성경 말씀에 대한 우리의 마음의 자세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겠습니다. 성경 자체를 증거하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믿음의 자리로 계속 나아가야 겠습니다. 이 귀한 씨름을 하고자 하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안에 계속해서 말씀을 의지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수양회가 한달 정도 남았는데 우리가 많은 일을 하려 하기보다 먼저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받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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