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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06.17 08:29

2017년 누가복음 24강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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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24강                                                                                                   김요한

누가복음 10:25-42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누가복음 10:27,28)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제대로 해야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으면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면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25-28)

25절을 봅시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였습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면 생명을 얻는다고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율법교사는 얼마나 율법에 대해 잘 알았을까요. 그래서 예수님 하시는 일을 이렇게 보면서 예수님은 과연 율법의 요지, 엣센스를 알고 있을까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테스트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테스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다 알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를 아셨는지,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셨습니다(26). 그러자 율법교사가 자신있게 대답하였습니다. 27절을 읽어봅시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하셨습니다(28상).

이 율법교사가 창세기로부터 말라기까지 관통하여 읽는 가운데 그가 발견한 것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 하십니다.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 마음에 다른 것 없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α를 기대함이 없이 깨끗하게, 순전하게, 온전하게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 사람이 영생을 얻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찌끼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천사항으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십니다. 사람은 누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죽고 싶다 해도 자신을 사랑해서 살아갑니다. 자신이 찍힌 단체사진을 보면 무엇보다 가장 먼저 자신이 어떻게 나왔는지 찾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그렇게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28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을 아시고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말씀 그대로 밝히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하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십니다.

그런데 말씀이 옳다 하더라도 그대로 행하기가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율법교사는 사람들 앞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에 따라 무엇이 옳은가를 늘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생활은 자신을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는데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비를 베풀라(29-37)

우리가 29절에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는 이 율법 교사를 보면서 신앙생활, 종교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신앙생활하기가 쉽습니다.

사람이 교회 공동체에 나오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를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어떤 남학생은 예쁜 여학생이 마음에 들어, 또 어떤 여학생은 교회 오빠가 좋아 교회에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서로 좋아져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떠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남학생은 예쁜 여학생을 따라 왔다가 말씀을 듣고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여 누구라도 결혼할 수 있다고 하였고, 워싱턴 자매와 결혼하여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교회 공동체에 나온다면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보다는 다른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서 내 역할이 무엇일까를 찾습니다.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역할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한다면 이 또한 다른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고 묻는 이 사람에게 예수께서 무엇이라 답하셨습니까? 30절부터 봅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강도 만난 그가 다 죽어가고 있었는데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어 강도 만났네’ 하고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31).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레위인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제사장이 되는 지파입니다. 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어~’ 하고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32).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이 그를 피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33절을 봅시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말씀공부 하러 가거나 예배 보러 가는 길도 아니었습니다.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이르러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나의 것으로 여겨서 기꺼이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긍휼이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아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갔지만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특별히 무슨 율법을 지킨다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그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34절을 봅시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이틀 치 품삯인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습니다(35).

그리고 그 옳게 보이려는 그 율법교사에게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이에 그가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37절 상반 절을 봅시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하였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세 사람 중에’라 하셨으니, 율법교사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그는 유대 율법교사인 그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는 차마 말을 못하였던 같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자비를 베푼 사람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임을 틀림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는 그에게 그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좋은 성경선생님이십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가 진리를 따라 스스로 생명 얻는 길을 깨닫도록 하는 질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하) 그가 여기서 예수님 붙잡고 실랑이 하지 말고, 그가 아는 대로, 그가 말한 대로 자비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우리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들었으니 주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합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하는 사람이 결실 얻는다고 들어왔습니다. 말씀 듣지 않는 사람,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 그래서 강도 만난 자 같이 되어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면 ‘어~’하고 피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잘 사랑하고 있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헌금하면 돕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라” 하십니다.

자비는 이웃을 볼 때, 내가 당하는 것처럼 당하고 있구나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내 자신이 강도 만났을 때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야말로 강도 만난 자처럼 술에 취해 통금을 앞둔 차가운 가을밤에 전봇대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추위를 이기고 싶어 명함을 꺼내 두 손으로 내밀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 좀 어디 데려가 주세요’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은 저를 피했습니다. 그러다 어떤 모녀가 저를 부축하여 술 취한 사람 거절하는 여관들 여럿을 거처 아주 허름한 어떤 여인숙에 저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침에 깨어나니 지갑도 없고, 시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숙 주인이 제게 어제 밤에 어떤 모녀가 자칫 잃어버릴 수 있으니 지갑과 시계를 맡겨두었다면 제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강도 만난 저를 돌본 이웃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분들의 얼굴을 모릅니다.

그때 저는 창세기를 3장까지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사는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전봇대 밑에서 얼어 죽을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진실로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계속 읽어가는 가운데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저 같은 자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긍휼하심, 저 같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저를 여인숙에 데려다준 그 분들이 예수님을 믿었는지는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저를 불쌍히 여긴 것은 압니다.

그 이후 저 같이 예수님 사랑을 모르고 헤매고 있는 캠퍼스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고 캠퍼스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그렇게 쉽지 않은 길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하고, 저 또한 제 자신을 옳게 보이고 싶어,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그러니 심령이 괴로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십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또 강도 만난 자는 누구입니까? 말씀은 사람이 사탄에게 잡혀 죄의 종노릇하고 있음을 밝힙니다(로마서 6:17). 사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충만한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 탐욕을 심어 죄를 범하게 하였습니다(창세기 3:1-6). 사람이 강도만난 자입니다. 예수께서 칠십 인의 제자들을 이리 같은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보는가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사장이 되었든, 레위이인이든, 율법교사이든 예수께서는 강도 만난 자로 보십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탄에 잡힌 강도 만난 자로 보십니다. 그래서 이 이웃을 살리기 위해 예수께서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오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시되 마음을 다해 사랑하셨습니다. 다 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을 알고 붙들 때 우리 또한 예수님의 사랑, 불쌍히 여기고 자신을 내어 놓아 강도 만난 자를 살리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이번에는 이 사건과 대조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면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꼭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더라도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계속하여 증거합니다.

 

말씀을 들어라(38-42)

38절을 봅시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가 주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더니(39), 언니인 마르다가 예수님 섬긴다고 여러 가지로 바쁜 줄 알면서 도울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였습니다. 물은 끓고, 파를 넣어야 하는데, 파는 아직 다듬어져 있지 않고,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자신을 돕지 않고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는 동생 마리아가 얄미웠습니다. 참다 참다가 예수께 일렀습니다. 40절을 봅시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어떤 형제는 마르다의 이 말이 그렇게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41절과 42절을 봅시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속을 뒤집으셨습니다. 마르다의 속을 뒤집어 정사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 곧 말씀 듣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대접하느라,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를 보느라 자비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교사이든지, 마르다이든지, 누구든지 자비를 행하라 하십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행하려면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죄 값을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대신 치르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예쁜 여학생이, 아무리 예뻐도, 같이 저녁 먹어도 하루 기쁘다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고 붙들면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유일한 한 분이시니, 하나님이 주신 아내도 유일하다’ 하여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행복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하는 사람이 결실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하여,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주의 사람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누가복음 10:27,28)

 

2017 누가복음 24강 메시지 1025-1042 김요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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