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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일서 5강 정여호수아

요한일서 4:1-21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10)

 

오늘 본문에 사랑이란 단어가 31, 하나님은 30번 나옵니다. 그런데 사랑도 하나님도 사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있습니다. 존재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두 단어를 연결하여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고, 사랑은 여기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여기 있다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고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1-7)

1절을 봅시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교회 성도들에게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합니다. 이는 많은 거짓 선지자가 이미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짓 선지자들은 영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영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악한 영, 곧 미혹하는 영, 거짓의 영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런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자들도 놀라운 방언을 하고, 또 병을 고치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출애굽기를 보면 애굽의 술사들이 모세가 하듯이 이적을 따라 행했습니다. 또 사도행전을 보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그 주인을 부유하게 하였다고도 나옵니다. 이를 보면 악한 영에게도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속을 귀신같이 알아 맞추기도 하고, 말을 못하게 하기도 하고, 못 듣게도 하고, 허리를 꼬부라지게도 하고 별 일을 다 합니다. 사람이 이런 것을 보면 미혹될 수 있습니다. 분별해 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2,3절을 봅시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 그것을 보면 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느냐 그렇지 않으나가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구원과 심판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께서 육체의 몸으로 오셔서, 육체의 몸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육체의 몸이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 죽을 육체의 몸도, 그와 같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 있게 될 산 소망, 곧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무슨 허공을 치는 것 같은 그런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하다 하여, 우리 몸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런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몸이 죽으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셨습니다(히브리서 2:14,15). 이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12).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한 이를 시인하는 것으로 이미 그들은 이미 거짓선지자들을 이긴 자들입니다(4). 이는 그들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4).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세상에 속한 자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의 것들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고 따릅니다(5). 그러나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들의 말을 듣지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 있는 우리의 말을 듣고 따릅니다(6). 이로써 우리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6).

사도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다고 증거 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7-21)

7,8절을 봅시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합니다. 이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오직 하나 뿐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왜 보내셨습니까?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입니다(9). 우리가 과거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까?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랑의 목적은 언제나 그 사랑하는 대상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독생자를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일 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하나님은 이같이 나타내셨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확신가운데 전합니다. 다같이 10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음이라사랑이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This is love!” 이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은 우리가 사랑을 받을 만한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았습니다.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대적하고 미워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우리의 크고 무거운 모든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죄가 대속함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저를 향한 저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은 가난했습니다. 못 배우시고 늘 혈기를 부리시는 아버지로 인해 싸움이 끊이질 않았고, 그래서 저는 이런 못난 아버지가 미웠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다가 기계에 손가락이 잘리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수술받을 돈이 없다며 한사코 손가락 봉합 수술받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아버지가 사람들 앞에서 너무 창피하였고, 내 인생에 언제까지 이렇게 걸림돌이 되시려는가 하며 힘들어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그때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이 제 대학등록금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저는 한참 동안을 펑펑 울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아니하였는데, 사람 앞에 심히 부끄러워하고, 미워했는데,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기 손가락을 버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동안 제가 알지 못했을 뿐, 아버지는 제가 당신의 아들인 그 순간부터 이제까지 자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저를 말없이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말고는 아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시는 분이셨습니다.

저의 육신의 아버지의 사랑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지 자녀가 아픈 것은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하나님을 끊임없이 거역하고 배반하고 거스르고 대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도저히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그런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정말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자기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같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같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까? 11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서로 사랑 하되 이같이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는 좋은 마음, 선량한 마음으로 사랑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해 깊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사랑할 마음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상대방의 모습을 매일 마주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행했었는지를 생각하고,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생각하면 더 이상 자기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상대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나를 희생하고 죽이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사랑받은 자는 능히 이같이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서로 사랑하면 어떻게 됩니까? 12절을 봅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또 우리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게 하신 영, 곧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줄을 알게 됩니다(13-16).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입니다(17). 곧 예수께서 세상에서 그러하셨던 것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두렵습니다. 교통신호만 위반하여도 두려움 때문에 교통순경을 보면 숨게 됩니다. 죄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고 선을 행하면 경찰을 봐도 떳떳합니다. 이같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의 관계성을 맺게 될 때, 마음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18).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입니다(18).

그런데 무엇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9). 하나님께서 사랑받을 자격 없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생각하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생깁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의 그 심정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일하십니다. 누구든지 만일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가 됩니다.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20).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만 사랑하다가 죄 가운데 고통하고, 비참하게 끝나버릴 죄인에게 독생자를 내어주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하시고, 그 사랑에 계속 눈뜨게 하시고, 그 온전하신 사랑을 배우고 누리고 나누는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받은 사랑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주께서 보내주신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생명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또한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한일서 4:10)

 

2021 요한일서 5강 메시지 0401-0421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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