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INJE UBF

메시지

조회 수 24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2017 전국학사목자수양회 주제 메시지 (유사무엘 선교사 이디오피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했으니”(히브리서 11:9)

 

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던 한 선교사가 60대가 되어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친구들이 그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노후대책은 세워졌니?”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기 때문에 잠시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대답했습니다. “노후대책은 없지만 사후대책은 세워졌다.” 요즘 모두들 수명이 길어져서 노후대책이 중요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노후대책을 세워야 할까요, 사후대책을 세워야 할까요?

 

금년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말이 쉬워 종교개혁이지 실제로는 개혁의 와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게 그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절대적이고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5세기가 지난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많고,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게 그렇게 절대적이거나 절대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UBF는 한때 대한민국의 해외선교를 주도했습니다. 특히 평신도 선교에서는 독보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겪은 후 선교의 열기는 식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UBF맨이라면 예수님을 영접하면 으레 선교사가 되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도 모르면서 선교사가 되겠다고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말씀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목숨이라도 바치고자 했던 우리의 초기정신은 희미해져 갑니다. 선교의 열정만 식은 게 아니라, 국내에서 양을 치기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올해에는 나라마저 많은 문제에 휩싸여 있습니다. 대통령이 탄핵 당하고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있습니다. 남북관계도 심상치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에 빠지는 사람도 있고, 앞날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 개인은 어떻습니까? “내가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하는 자괴감이 일어나고,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단어도 부담스러워지고, 사후대책은 믿음으로 사는 건데,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노후대책에만 매여 있는 게 두렵기조차 합니다. 뭔가 새로운 방향이 필요하고 분명한 결단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엄습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다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잘 압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이 말씀을 새롭게 조명해 주시고, 우리 마음에 새로운 결단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제 메시지의 제목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리고 그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었습니까?

 

1. 고향을 떠났습니다(8)

8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아브라함은 고향 땅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문제만 생기면 도와 줄 친척들과, 언제든지 만나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도 받고 사랑도 받으며,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1.2) 이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부르심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때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말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는 말이 제게는 새롭게 다가옵니다. 요즘 웬만한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다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선교사로 나가던 90년도 초에는 정보를 얻는 게 지금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책자가 있어서 황열병 예방접종을 하고 우간다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무조건 떠났습니다. 뭘 알아보려 하거나, 따지거나,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믿음은 떠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역사는 그가 고향을 떠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으로 떠나보내심으로써 구속의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Therefore 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마태 28:19)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The Great Commission’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떠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떠나고자 하는지요? 아니면, 떠나기보다 집 살 생각, 차 살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그렇게 크게 쓰임 받았던 것은 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선배들은 구두 한 켤레와 성경 한 권만 준비되면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다.” 말하곤 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모든 믿음의 선배들처럼 우리도 이 시간 언제든지 떠날 마음을 새롭게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믿음은 순수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난 것은 그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믿음은 그렇게 순수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선교지에 다른 동기로 오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선교지에 가서 학위를 땁니다. 아프리카에만 해도 자녀를 영어 공부시키기 위해서 오는 선교사들이 꽤 많습니다. 물론 그게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선교사로 간다면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지금 세계에 나가 있는 한국 선교사의 수가 약 27,000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반적인 평가로는 그 중의 3분의 1은 선교지로 가면 안 되는 사람들이고, 3분의 1은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이고, 3분의 1만 진짜 선교사라고 한답니다. 그러니까 3분의 2의 선교사들이 다른 이유때문에 선교지에 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교지마다 문제들이 많습니다. 선교사가 많은 일을 할 수 없을지라도 동기만은 순수해야 합니다. 다른 이유보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 때문에 선교지에 가야 합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자기는 추운 곳(미국)으로는 갈 수 있는데, 더운 곳(아프리카)으로는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순수하면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사로 가는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동기를 다시 순수하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약속의 땅에 우거했습니다.(9-10, 13-16)

9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했으니이 말씀은 영어로 읽는 게 더 은혜롭습니다. “By faith he made his home in the promised land like a stranger in a foreign country; he lived in tents, as did Isaac and Jacob, who were heirs with him of the same promise.”

요즘 많은 분들이 한국은 헬조선이니,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민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더 좋은 생활을 위해 약속의 땅에 간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외국에서 ‘stranger -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외국에서 사는 나그네의 설움과 아픔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길을 걸어가면 동네 아이들이 뭐라고 소리칩니다. 심지어 돌을 던지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학교에서 왕따 당합니다. 강도와 도둑들의 타겟이 됩니다. 여러 가지 풍토병과 알 수 없는 곤충들에 시달려야 합니다. 현지 사람들은 이런 데 강하지만, 나그네들에게는 큰 고생이요, 또 큰 위험입니다. 또 걸핏하면 이사해야 하는데, 집구하기도 힘들고, 트럭 구하기도 힘드는 등, 이사 한 번 하고나면 병이 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그네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정든 땅, 익숙한 곳에서 정착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외국에서, 그것도 장막에 거했습니다. 텐트생활은 프라이버시와 치안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삶입니다. 잠시 텐트에서 지내는 거야 괜찮습니다. 대학교 일학년 때 친구와 함께 설악산에 여행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텐트에 거해 보았는데, 낭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지나니 불편해서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며칠이나 몇 주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장막에 거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 손자, 3대에 거쳐 텐트에 거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계속되는 텐트 생활이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번듯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은 없었을까요? 자식과 손자에게까지 텐트에서 살게 하는 자괴감이나 슬픔은 없었을까요? 사람들이 나는 고생해도 자식에게만은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 합니다. 나는 벼룩에 물려 벅벅 긁으며 살아도 상관없지만, 자식이 물려서 얼룩덜룩해 진 다리를 긁는 것을 보면 참기 힘듭니다. 어떤 분은 나는 목자요 선교사로 살지만, 자식이 자신같이 사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만 나그네로 산 게 아니라 아들 손자까지 나그네로 살며 텐트 생활을 하도록 도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처럼 나그네로 살 수 있었습니까? 10절을 봅시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For he was looking forward to the city with foundations, whose architect and builder is God).” 여기서 터가 있는 성은 장막과 대비됩니다. 장막은 언제든지 말아들고 떠날 수 있는 임시 거처지만, ‘터가 있는 성'은 한 곳에 고정된 영구한 집입니다. 은 지상에 있는 어떤 도성이 아니라, ‘진동치 못하며, 장차 올 영원한 하늘 도성(12:28;13:14), 하나님에 의해 견고하게 세워진 새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냥 바라본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잠시 있을 세상에서는 텐트생활을 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삶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자녀와 손자들에게까지 그 삶을 살도록 도왔습니다.

요즘 설계, 건축기술이 무척 발전했습니다. 한국에도 500미터 이상 되는 화려한 건축물이 생겼습니다. 강남에는 화려한 집들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시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the city with foundations, whose architect and builder is God” 이라는 말씀이 너무 은혜로워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92년에 우간다로 나가서 23년간 그 곳에서 마케레레 대학과 챰보고 대학을 개척했습니다. 그 후 정든 우간다를 떠나 스와질랜드로 가서 1년간 양들을 섬겼습니다. 작년부터는 에티오피아 짐마에서 개척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죄인이 아프리카에서 25년을 선교사로 살 수 있었으니 주님의 은혜가 큽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의 문제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서울에서 공부를 하게 되니 서울에 머물 곳이 필요했습니다. 제 집이 없으니 아이들이 기숙사, 원룸, 전세, 전월세 등으로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한 번은 전세를 얻었는데 그 집은 빌라 형태라 겨울에 춥고 곰팡이가 피었습니다. 저야 어떤 곳에서 지내도 상관이 없지만 아이들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습니다. 아이들 결혼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아이들이 결혼한다면 살 집도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자꾸 집에 대해 관심이 생겼습니다.

저는 이 곳 저 곳 다니면서 아름다운 집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간다에는 앞뒤로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저택들이 있습니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 가 보면 사람이 만든 도시이지만 정말 아름답습니다. 세계 7대 자연경관 중의 하나인 테이블 마운틴이 있고,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곳에 케이프 포인트와 희망봉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곳에 사람들이 멋진 건물들을 지었습니다. 재작년 둘째 딸과 그 곳을 여행을 하면서 그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많은데, 제 소유의 집은 하나도 없다는 게 슬플 때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아프리카에서 25년을 보내니 주위에서 여러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재작년 아산상 시상식에 참석했을 때 아산재단 이사장님이 또 아프리카로 나가느냐? 언제까지 부인을 고생시키려고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마리아 동역자 얼굴을 보니 그 말에 동감하는 듯 보였습니다. 사실 저도 알게 모르게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개척역사를 네 번째 감당하려니 힘이 들어 그만 은퇴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이들도 이제 이산가족 그만하고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살았으면 좋겠다고, 가끔 불평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은 그래도 에티오피아에 세 명, 한국에 두 명, 이렇게 두 군데로 헤어져 있지만, 어떤 때는 네 곳이 흩어져 살던 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한참 힘들 때 본국에 자리를 알아보니 그럴듯한 자리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번 term이 끝나면 한국으로 갈까?” 하고 떠보니 모두들 좋아하는 눈치입니다. 좀 안정된 삶, 작더라도 내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제 마음에 있었습니다. 가능하면 제주도나 남해안의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운 때에 오늘 말씀 ‘the city with foundations, whose architect and builder is God’은 제 마음을 깨끗하고 시원하게 정리해 줍니다. 주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지은 곳에서 살게 된다니, 이 얼마나 감격적인 말씀입니까? 저는 이 집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행복합니다. 제 대학 동기들이 사는 강남 고급 아파트도 부럽지 않습니다. 케이프타운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집도 부럽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만드신 그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 소망이 선교사지에서 겪는 모든 아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비록 지금 사는 에티오피아 집에 방이 하나밖에 없고 모기는 많고 물과 전기가 자주 끊기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도시를 생각하며 약속의 땅에 우거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그러나 들에 핀 꽃과 같습니다. 당장은 아름답지만 곧 시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건축하신 그 도시는 영원합니다. 우리가 잠시 있을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마치고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로 가면, 그곳에는 그 분이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도시, 우리의 본향에 가기까지 끝까지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이제 13-16절을 봅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했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했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했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가 나온 고향 땅을 생각하면 자꾸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제가 우간다에 처음 갔을 때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한국이 그리웠고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유사무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기를 부끄러워하십니다. 우리가 진정한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며 목자와 선교사의 삶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저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때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순간이라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에서 좀 오래 살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상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이 주는 훈장도 받았고, 모교의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선정되어 동창회상을 받았고, 제 이름이 모교 본관 정원에 새겨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해외봉사상도 받았고 상금 1억 원의 아산 의료봉사상도 받았습니다. 욕을 먹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좋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정과 그들이 주는 상은 제게 기쁨이 되기보다 부담이 됩니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사람들이 주는 상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받고 싶은 것은 주님의 인정이요 주님께서 주시는 상입니다. “잘 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태 25:21) 제가 믿음으로 선교지에 거할 때 주님께서 저를 당신의 충성된 종으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인정보다 더 큰 위로와 기쁨이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한국에서든지 선교지에서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그네의 삶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자랑스러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3. 잉태하는 힘을 얻었습니다.(11-12)

11,12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했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했느니라.”

사라는 이미 90세가 되었습니다. 도저히 임신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잉태할 수 없는 힘을 얻었습니까? 저자는 믿음으로 잉태할 힘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입니까?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because he considered him faithful who had made the promise)."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나도록 큰 민족은커녕 자식 하나 없었고, 사라는 이제 잉태하지 못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믿음으로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자식 낳는 문제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다. 더 이상 마음 상하지 말고 포기하자.”는 생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브라함과 사라는 머리를 좌우로 세게 흔들며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다.” 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잉태할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인 그들을 통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요즘 캠퍼스에서 새 양을 얻고 그를 제자로 키우는 게 아주 힘듭니다. 특히 학사 목자님들이 제자양성의 열매를 맺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교회들이 다 그러합니다. 가히 영적인 불임 시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제 단산하고 죽은 자와 같이 되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우리가 이 영적 불임시대에서 어떻게 잉태할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캠퍼스 목자로 쓰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이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그 약속이 우리의 소원, 이루지 못하면 죽을 수도 없다는 강렬한 소원으로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미쁘신 분이요, 그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믿는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어도 열매가 없는데 믿어야 하다니, 자신을 속이는 것 같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만 같습니다. 열매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차라리 믿지 않으면 속이라도 편한데, 계속 믿자니 억지 부리는 것 같고, 위선적인 것 같고, 마음만 괴롭습니다.

제가 우간다에서 마케레레 대학을 개척할 때 그랬습니다. 겨우 양들이 좀 섰다 싶었는데, Top Leader들이 두 차례에 걸쳐 모두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일 예배는 황폐화되었고, 저는 영육간에 지쳐 드러누웠습니다. 거기다가 결핵에 걸려 6주간이나 열이 나니 몸무게가 51킬로까지 빠졌습니다. 침대에서 돌아눕기도 힘들었습니다. 저는 선교지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빨리 주님 나라에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야속하게도(?) 제 건강을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건강을 기적처럼 회복시켜 주셨으니, ‘안 되는 것은 안 된다는 생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자기를 부인하고 다시 개척 역사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저에게 하나님의 한 약속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시편 126:5,6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저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으로 마음 깊숙이 아로새겼습니다. 그러자 정말 잉태하는 힘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 힘으로 계속해서 마케레레 대학을 오르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약속대로 기쁨으로 단을 거두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마케레레 대학에 믿음의 조상들이 세워지고, 챰보고 대학까지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 나이로비에서 동부 아프리카 수양회를 했는데, 그 믿음의 아들딸들과 재회했습니다. 정말 반갑고 기뻤습니다. 줄리우스 목자 부부는 저만 보면 행복해 진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들을 보면 더 없이 행복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 하나님은 진정 미쁘신 분이시오,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 수양회를 통해서, 그리고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약속의 말씀 하나씩을 새롭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우리 심장에 아로새겨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잉태할 힘을 얻게 하실 것이며,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고향을 떠났고,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 우거했습니다. 또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어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후손들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의 피, 그의 유전인자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노후대책이나 세우며 살라치면 재미도 없고 힘도 나지 않습니다. 다소 고생스럽더라도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거룩한 나그네로 살아야 기쁨도 있고 힘도 납니다. 이 뜻 깊은 해에 우리가 소망을 새롭게 하고 삶의 자세를 바로 함으로써, 우리의 삶에 개혁이 일어나고, 우리나라에 개혁이 일어나고, 온 세계에 개혁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했으니”(9)


2017 전국학사목자수양회 주제 메시지.hwp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99 마태복음 2021년 성탄 1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1.12.12 39
298 요한삼서 2021년 요한삼서 1강 메시지(천모세) file 정여호수아 2021.12.05 39
297 요한이서 2021년 요한이서 1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1.11.28 37
296 시편 2021년 추수감사 특강메시지(김아브라함) file 정여호수아 2021.11.21 41
295 요한일서 2021년 요한일서 6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1.11.14 42
294 히브리서 2021년 가을수양회 주제메세지(박엘리야) file 정여호수아 2021.11.07 30
293 요한일서 2021년 요한일서 5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1.10.31 41
292 요한일서 2021년 요한일서 4강 메시지(김요한) file 정여호수아 2021.10.24 40
291 요한일서 2021년 요한일서 3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1.10.17 42
290 요한일서 2021년 요한일서 2강 메시지(천모세) file 정여호수아 2021.10.10 43
289 요한일서 2021년 요한일서 1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1.10.03 39
288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26강 메시지(김아브라함) file 정여호수아 2021.09.26 40
287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25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정여호수아 2021.09.19 37
286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24강 메시지 (김요한) file 정여호수아 2021.09.12 70
285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23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1.09.05 50
284 요한복음 2021년 2학기 개강 준비수양회 메시지 (천모세) file 정여호수아 2021.08.29 52
283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22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1.08.22 42
282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21강 메시지 (김아브라함) file 정여호수아 2021.08.15 46
281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20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1.08.08 41
280 요한복음 2021년 요한복음 19강 메시지 (김요한) file 정여호수아 2021.08.01 65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11 ... 21 Next
/ 2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