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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7강 정여호수아

누가복음 5:33-6:16

 

 

열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누가복음 6:13)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이번에는 우리는 금식하는데 당신들은 왜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고 비난합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새포도주는 새부대에(5:33-39)

 

33절을 봅시다. 그들, 곧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께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세례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였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금식은 1년에 딱 한번 대속죄일에 하면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 금식하는 전통을 만들어 이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이를 신앙생활의 척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일인데도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죄인으로 낙인 찍혀 출교당한 자들과 함께 떠들썩한 잔치까지 벌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에 너희는 왜 금식도 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느냐고 매섭게 따졌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봅시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예수님은 제자들을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집 손님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실제로 당시 유대인들은 혼인잔치를 일주일간 하였는데 그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금식일이 되어도 금식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되고, 병든 자가 나음을 받고 귀신들린 자들이 해방됩니다. 온 몸에 나병걸린 자가 깨끗함을 받고, 중풍병자가 죄사함을 받고 일어나 걸어나고 손가락질받던 죄인 세리가 회개하여 하나님을 섬깁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이 함께하는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혼인 잔치가 열립니다. 그러니 그와 함께 하는 제자들은 금식할 수 없습니다. 즐겨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에는 금식할 것입니다(35). 예수님은 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36,37절을 봅시다. 새옷을 찢어서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습니다. 그리하면 새옷을 찢을 뿐이요 또 낡은 옷에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새포도주가 발효되면서 부대를 터트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38).

예수님과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죄사함의 복음은 새포도주와 같아서 바리새인들이 내세우는 율법 신앙과 섞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기존의 낡은 전통과 생각과 가치관으로는 담을 수 없습니다. 담을려면 그들 자신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좋아하는 자가 없듯이, 그들은 묵은 것이 더 좋다고 할 것입니다(39).

이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6:1-5)

1,2절을 봅시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습니다. 제자들이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섬기느라 배가 많이 고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어떤 바리새인들이 다가와서 말합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지금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제자들이 남의 밭에서 밀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곧 추수와 탈곡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절을 봅시다.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다윗과 그 일행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 몹시 시장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4). 그러니깐 다윗이 제사법을 어겼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윗과 그 일행이 당시 몹시 시장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제사법도 안식일법도 이런 배경과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장한 제자들을 이해해 주셨고, 다윗의 예를 통해 제자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보다 더한 말씀을 하십니다.

5절을 봅시다.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누가 안식일을 만들었고 안식일에 예배받으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그전에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시더니, 이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곧 예수께서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신 것은, 사람으로 참된 안식을 주실 수 있는 것은, 그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를 만지면 안되는데도 예수님은 만지십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면 안되는데 함께 하십니다. 죽은 자를 만지면 안되는데 만지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또 무엇이라 하십니까?

어느 것이 옳으냐(6-11)

6절을 봅시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시는데 거기에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한 손으로는 일을 하는데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두 손을 맞잡아야 뭔가를 해도 제대로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손, 그것도 오른손이 말랐습니다. 일을 못하니 매일 빌어 먹어야 했습니다. 손뿐 아니라 그의 모든 인생이 말라갔습니다. 안식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낫고 싶었을까요? 그런데 그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예수께서 그의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았습니다(7).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8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한 손 마른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그리고 그가 일어나 서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9) 어느 것이 옳습니까? 당연히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렇게 당연한 것을 예수께서 왜 물으시는 것일까요? 그들은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이라 여겼습니다. 그것을 옳다 여겼습니다. 그것이 정말 선입니까? 진실로 옳은 일입니까? 선을 행할 수 있음에도, 생명을 구할 수 있음에도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악입니다. 자비를 베풀 수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악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손 마른 사람에게 있어 하루는 두 손 다 쓸 수 있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하루입니다. 혼자 자립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냥 쫄쫄 굶어야 하는 너무나도 절박한 하루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한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셨고(10), 그가 믿음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말라버렸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10). 그가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1절을 봅시다.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말씀대로 한다고 하는 그들이 진실로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도리어 옳은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고 듭니다. 그야말로 낡은 가죽부대입니다. 이들에게서는 어떤 개선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암울한 때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12-16)

12절을 봅시다. 이때에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지도자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완전히 돌아섰고, 힘들고 아픈 사람들은 계속 몰려오고, 무엇을 해도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은, 어떤 소망조차 보이지 않는 이때에도 예수님은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산에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구하셨습니다. 13절을 봅시다. 그러자 어두운 밤이 물러가고 날이 밝았습니다. 위로부터 빛이 비치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심으로 무엇이 옳은 지를 확신하시고, 이를 행할 힘을 얻으셨습니다.

이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13절을 다시 봅시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울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제자예수님을 따르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고 배우고자 하는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보내심을 받을려면 보내시는 분이 있고, 또 그 보내는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는 제자중에서 열둘을 사도로 택하여 세상가운데로 보내고자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이들을 통해 율법에 의해 숨막히는 나라가 아닌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나라, 악을 행하는 나라가 아니라 선을 행하는 나라, 사람을 죽이는 나라가 아닌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열둘을 택하셨을까요? 열 두 사도는 구약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곧 예수님은 열 두 사도를 통해 새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열둘은 소수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120명의 사도도 양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다다익선이라지만 꼭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소수더라도 제대도 된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들을 돕고 또 일대일로 양들을 섬겨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실제로 한 사람을 감당하고 세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열두명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께 택함받은 열두 사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다같이 14-16절을 봅시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예수님은 자신을 대신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말 대단한 사람들을 선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인 니고데모 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또는 가말리엘 같은 빼어난 율법학자들을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중에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이고 어부들입니다. 좀 특이한 사람이 있다면 매국노 취급받는 세리 출신인 마태가 있고, 로마에 저항하는 열심당원 출신의 셀롯이라는 시몬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도 별로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별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실제로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듣고, 있는 그대로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었습니다. 낡은 가죽부대처럼 되어버린 바리새인들과 다르게, 무엇이 선한 일인지, 어느 것이 옳은 일인지를 진지하게 찾고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 살리는 하나님의 일이 관심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새 부대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열두 사도로 택하셔서 새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이들을 통해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지난 봄수양회 때 한 목자님이 지목한 것처럼 저는 책 읽기를 싫어하여 말과 글이 이상하고, 또 지성을 갖춘 대학생들을 섬기기에는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자입니다. 후유증을 휴유증이라고 말할 정도로 덜떨어진 자입니다. 요즘도 밤을 새워가며 메시지를 준비해도, 늘 오류와 실수로 가득한 메시지를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쉴 때가 많습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이 시대 지성인들을 돕는 목자요, 리더로서 이 시대를 먹이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항상 가슴이 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진정 소망을 두고 계신지 보게 됩니다. 머리 좋고 탁월한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좀 모자라고, 허물이 있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듣고, 겸손히 배우고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하는 그 사람들을 사도로 택하시고 세우셨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이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람살리는 하나님의 일에 쓰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고 싶은 제게 이 소망의 말씀을 새롭게 들려주심에 감사합니다. 제가 이 소망을 따라 저의 부족함 때문에 절망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고 배우는 일에 힘쓰길 기도합니다. 저의 마른 것 같은 손을 주께 계속 내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즘 한 형제님도 자신이 쓰는 글이 너무 엉망인 것 같아서 절망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부끄러움을 이기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매일 자신이 쓴 일용할 양식과 소감을 한절 한절 퇴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어떤 한 자매님은 새롭게 도전하는 전공 수업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도 포기치 않고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른 손을 예수께 계속 내밀고 있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예수께 나아와,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새 부대입니다. 예수님께서 꾸셨던 그 꿈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 시대의 사도들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선을 행하시고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배우고 따라 우리 자신이 살고, 주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사람 살리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누가복음 6:13)

2022년 누가복음 6강 메시지 0533-0616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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