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INJE UBF

메시지

누가복음
2017.08.24 09:00

2017년 누가복음 32강 메시지

조회 수 22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2017년 누가복음 32강                                                                                                   김요한

누가복음 15:1-32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7)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또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를 우리에게 명료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께 가까이 나아왔습니다(1).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였습니다. 세상과 분리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여서 거의 매일 말씀 붙들고 사는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매국노인 세리들과 또 다른 형태의 죄인들과 어울리며 같이 밥 먹는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인들하고는 되도록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오염되지 않은 거룩하고 영적인 삶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께서 세 가지 비유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십니다(3). 특히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4-10)

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먼저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을 들으면 좀 당황스럽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깨웁니다. 변화시켜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질문을 들으면 굳이 무리를 떠난 양 하나를 찾아다닐 필요가 있는가 싶습니다. 말 잘 듣고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양들이 더 중요하지 않는가? 잃은 한 마리 찾아다니다가 아흔 아홉 마리 잃어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늘 이런 생각에 젖어 왔습니다. 예수께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는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하나님을 증거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양 일백 마리가 있을 때 그 하나를 잃으면 그 하나로 인해서 백마리 그 완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래서 그 한 마리 찾아내기 까지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백 마리가 채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찾아내면 즐거워 어깨에 메고(5),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까지 불러 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십니까? 7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돌이켜 회개할 때,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 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예수께서 증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래도 아흔 아홉 마리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께서 열 드라크마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8절을 봅시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습니까? 당시 여자들은 동전 드라크마 열 개를 하나의 세트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트 중 하나를 잃어버리면 그 세트는 의미가 없습니다. 공룡그림 퍼즐에서 하나를 없어지면 그림이 완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인해 기쁘시기도 하지만 채워지지 않은 잃은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아프십니다. 그 한 사람이 돌아와서 완전하게 된 공동체로 인해 큰 기쁨을 누린다 하십니다.

그래서 열 드라크마에서 잃은 하나를 찾아내면 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하며 잔치를 할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그래서 내 하나가 어떻게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위협할 것은 없습니다. ‘내 하나 없어질텐데 어떻게 하실래요?’ 라고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면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스스로 돌이켜 일어나서 돌아가니라(11-20상)

11절을 봅시다. 이번에는 두 아들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양 하고 동전은 없어도 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면 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들이면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였습니다(12상).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중) 둘째는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을 때 자신이 받게 될 상속분을 미리 달라 했습니다. 대담하고 당돌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습니다(12하). 둘 째 뿐만 아니라 맏아들에게도 나눠주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인가 싶습니다. 이 아버지는 인격적인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희한한 것을 요구해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요구만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맏아들에게도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이 무엇을 하였습니까? 이를 보면 둘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겠습니다. 13절을 봅시다. 그렇게 자신에게 돌아올 상속분을 받고 며칠이 되지 않아 그가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현금으로 바꾸어 먼 나라에 갔습니다. 여기서 멀다는 뜻은 아버지로부터 멀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아버지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지고 싶어서 충청도 어느 도시에서 제일 먼 대학을 찾아 김해에 있는 인제대학교로 왔습니다. 그도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어쨌든 되도록 아버지로부터 멀어지면 자주 독립이 될 것 같습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늘 맏이인 형의 편을 드는 것 같다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아버지가 ‘동생이 형 말을 들어야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있는 자기 것을 찾아내었습니다. 그것이 죄인 된 사람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자기 권리는 충분히 행사하고 싶고, 자기 의무는 잊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지면 참으로 자유롭고, 자기 혼자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꼴 보기 싫은 형, 잔소리하는 부모로부터 벗어나 자기 혼자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상이 어떠했습니까? 거기서 허랑방탕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자기의 죄악된 본성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목적 없이 그냥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버지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여졌습니다(14). 여기서의 “비로소”는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없이 돈만 의지해서 살고자 하였을 때, 목적이 없고, 방향도 없었습니다.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먹고는 살아야 해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살게 되었습니다(15상). 그는 돼지치기 알바를 하였습니다(15하). 16절을 봅시다. 사람이 사람임을 절실히 실감할 때는 배고플 때이지 않을까요? 배고프면 뭔가를 먹어야 되는데,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지만 그에게 돼지 먹이라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가 자신에게 유익되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주겠습니까? 돼지는 쥐엄 열매를 주면 나중에 팔아서 돈이라도 되겠지만, 알바 생에게 그 귀한 것을 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는 고프고, 자신에게 돼지 먹이 주는 사람 하나 없자, 그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17절을 봅시다. “이에” 비로소 궁핍해서 아무도 자신에게 돼지 먹이 조차 주는 사람이 없자, 그가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돌이킨다는 것을 내 자신을 깨닫고 앞으로 가야 할 바를 아는 것이지요. NIV에서는 “came to his senses”로 되어 있습니다. 정신이 났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가 주려 죽게 되었을 그 때에서야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가 보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품꾼에게라도 양식을 풍족하게 주시는 아버지였습니다. 풍성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고용한 돼지치기 주인은 돼지에게 주는 쥐엄 열매도 아까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공동체를 떠나 소감도 안 쓰고 일대일도 안 하고 일용할양식도 하지 않고 살다가, 방학에 일용할양식 공부를 했더니 날마다 양식을 하라 하고, 소감도 쓰라 하고, 발표도 하라 하고, 그리고 또 잔소리 듣고, 참석해야 할 모임은 자꾸만 늘어나고 이를 내가 왜 하여야 하는지 생각이 듭니다. 누구든지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때때로 믿음 생활하다 보면 이제까지 감당해온 고난도 힘든데, 앞으로 더 많은 고난이 있다 하니 과연 이 길을 계속 가야하는지 싶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을 멀리 떠난 둘째 아들이 궁핍하여 그가 정신이 들어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하고, 돈이 생기면 헌금하며 복음역사에 쓰임 받고 있는 천사라 사모님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풍족한지를 알게 됩니다. 사라 사모님이 하신 미역국은 맛있습니다. 밥도 맛있습니다. 웃음과 활기가 사람을 힘 있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요? 회개란 먼저 하나님께서는 나의 아버지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풍족한 분이신지를 깨달을 때 회개가 시작됩니다. 어떻게 이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비로소 궁핍해졌을 때 아버지의 풍족하심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어릴 때 교회 다니는 사람은 뭔가 좀 불안한 사람, 좀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저보다 더 센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곤욕을 치르고, 병들고, 연애에 실패하고 나서야 과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을 그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이 작은 아들이 마음에 깨달음이 왔을 그 때 마음에 결단을 하였습니다. 18,19절을 봅시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가 예전에 아버지께 그렇게 한 것은 죄였습니다. 살긴 살아야 하겠고, 세상에서 살기는 주려 죽을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께 가기에는 자신이 한 일을 생각하니 도저히 아들로서는 갈 수가 없어, 품꾼의 하나라도 받아주시면 살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그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20절을 봅시다. 마음을 먹은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곧 회개란 스스로 정신이 나서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회개입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아버지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측은히 여겨 안고 잔치 하십니다(20하-24)

20절 하반 절을 봅시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아이고’ 하면서 그를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너무 당황스러워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였습니다(21). 아들이 확실히 회개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에 아버지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22절을 봅시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갔지만 아들의 옷과 가락지와 신은 그대로, 제일 좋은 것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이 자기 나름의 세계에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있을 처소를 예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요한복음 14:2).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하였습니다(23). 왜 그렇습니까? 24절을 읽어봅시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그 아들이 집을 나갔을 때 끊어진 연처럼 아버지에게 있어 아들은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 그가 살아 돌아왔으니,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잔치에 다 기뻐 동참하지는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이런 잔치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버지께서 맏아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5-32)

25절을 봅시다. 맏아들은 밭에 있었습니다. 동생이 그렇게 분란을 일으키고 집을 나가고 나서, 가끔씩 투덜거리면서 풀이라도 뽑던 동생도 없이 맏아들 혼자서 밭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해야 할 밭일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가 쓰는 이 건물만 해도 할 일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 옥상, 주차장, 앞뜰, 옆 공간, 베란다... 손 볼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비가 오면 우리 여호수아 목자가 옥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디 막힌 데는 없는지 다 살핍니다. 그것을 알고 따라 나와 같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가끔씩 우리는 이 건물 어딘가 좀 이상해진 것을 보면 여호수아 목자가 이것도 살피지 않았는가 하게 됩니다.

맏아들은 동생도 없이 혼자서 밭일을 책임지고 하다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웬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뭐야 이거’ 하며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26), 종이 대답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였습니다(27). 작은 아들이 배를 곪아 측은하게 보였지만 건강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자 맏아들이 노하였습니다. 자신의 생각하고 다른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속에서 갑자기 ‘욱’하고 뭔가가 솟아올랐습니다. 집에 들어갈 생각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에 아버지가 그에게 나와서 집에 들어가자고 권하였습니다(28).

아버지의 권함을 듣고 그가 거세게 아버지께 대답하였습니다. 29,30절을 봅시다. 평소와는 다른 톤이었고 눈빛이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의 노가 대단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의 이 이야기를 듣고 ‘내 아들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 하고, ‘나가!’라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31절을 봅시다. “얘” 아들로 불렀습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살림을 나눴을 그 때 이미 아버지의 것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맏아들이 생각할 때, 자신의 것인 그 살진 송아지를 아버지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렇게 살림을 말아먹은 동생에게 잔치를 한 것은 그것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음과 아버지의 것이 다 맏아들의 것임을 확정시켰습니다.

우리가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12:33상)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내 뜻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뜻대로 그렇게 자꾸 말씀하시니 그러면 나는 어떤 존재이지 싶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하십니다.

그리고 말하였습니다. 32절을 봅시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맏아들에게 있어 그의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인 자신과 동생의 형인 네가 같이,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는 끝이 났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것은 무엇이 마땅한지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증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증거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리든, 죄인이든, 바리새인이든, 서기관이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오기를 원하십니다.

또 인격적이십니다. 재산 달라 했을 때 다 나눠 주십니다. 그리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스스로 돌이켜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가져간 재산 다 떨어 먹고 거지꼴로 와도 기뻐서 잔치하십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로 맞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그 모습 그대로 그 존재 자체를 좋아하십니다. 자신의 귀한 아들, 딸로 좋아하십니다. 심히 좋아하십니다. 사랑하십니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살리시는 풍성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회개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기쁨에 나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온 죄인들과 세리들과 잔치할 때 나도 같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집을 나갔던 작은 아들이 되었든지, 집에 있으면서 투덜대는 맏아들이 되었든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기로 기뻐 잔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잔치에 함께 기뻐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복음 15:7)

 

2017 누가복음 32강 메시지 1501-1532 김요한.hwp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21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9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5.02 49
320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7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4.24 63
319 누가복음 2022년 부활절 특강 (천모세) file 정여호수아 2022.04.17 64
318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6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4.10 63
317 누가복음 2022년 봄수양회 메시지(이다윗) file 정여호수아 2022.04.03 67
316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4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3.27 70
315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3강 메시지 (김아브라함) file 정여호수아 2022.03.20 61
314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2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3.13 64
313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1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3.06 61
312 디모데후서 2022년 봄학기 개강특강 (김바나바) file 정여호수아 2022.02.27 53
311 디모데후서 2022년 인제 학생수양회 1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2.26 50
310 베드로후서 2022년 베드로후서 2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2.20 43
309 베드로후서 2022년 베드로후서 1강 메시지(천모세_ file 정여호수아 2022.02.13 63
308 베드로전서 2022년 베드로전서 5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2.06 49
307 베드로전서 2022년 베드로전서 4강 메시지 (김아브라함) file 정여호수아 2022.01.30 43
306 베드로전서 2022년 베드로전서 3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1.23 44
305 베드로전서 2022년 베드로전서 2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1.16 42
304 베드로전서 2022년 베드로전서 1강 메시지 (김요한) file 정여호수아 2022.01.09 49
303 누가복음 2022년 신년 3강 메시지 (천모세) file 정여호수아 2022.01.02 50
302 출애굽기 2022년 신년 2강 메시지(김아브라함) file 정여호수아 2022.01.02 40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22 Next
/ 2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