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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인제·양산 여름수양회 1강 메시지 김드보라

요한복음 4:1-30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3,14)

저는 대학 입학하기 전까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진짜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전도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저는 온 힘을 다하여 그들이 전하는 말을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던 제가 성경을 공부하게 되고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아가 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증거 하기 까지 되었습니다. 제 자신을 볼 때 예수님은 저 같은 사람에게도 찾아와 비추시는 “참 빛”, 곧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멸시 받던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말을 붙이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 처음에는 톡톡 쏘아 붙이다가, 나중에는 예수님에 대해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1-4)

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Pharisees, 여기서 separate가 나왔습니다. 즉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스스로를 세상과 구별시키며 완전하리만치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께 쏠리는 것은 두고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서도 언젠가는 이들과 부딪혀야 하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3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사 다시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던 갈릴리로 가시고자 하였습니다.

4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다 하십니다. 당시 유대에서 북쪽에 있는 갈릴리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는데 하나는 산길로 걸어 3일 걸리는 길이고 또 하나는 요단강을 건너 6일 걸리는 길입니다. 유대인들은 굳이 6일 걸리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혈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경멸의 대상이라 사마리아로 가는 길을 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의지가 엿보입니다. 사마리아에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음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십니다. 사람들이 경멸하는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찾아오시는 참 빛이십니다.

여름수양회 장소로 함양두레마을과 청풍 유스호스텔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우리는 시간도 더 걸리고 수양회비도 더 비싼 청풍 유스호스텔에서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학생회장님이 청풍 유스호스텔로 가야하겠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친구들, 후배들과 함께 무엇보다 그 자신이 여기서 하고 싶었던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하셨을까요?

우리 인생에도 항상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쉽고 편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나는 길도 있고 어렵고 불편하며 진짜 만나기 싫은 사람들을 마주해야 하는 길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은 미친 바람도 만나고 미친 사람도 만나고 배에 물이 가득하여 죽을 지경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유는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건 몰라도 생명의 방향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산길이든지,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는 길이든지, 때로는 좀 오래 걸리고 돈이 많이 드는 길이라 하더라도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님께로 가야하겠는지라 작정하고 예수님을 만나는 길로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하여 가서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두 가지 물을 소개합니다.

 

야곱의 우물물과 예수님이 주시는 물(5-15)

5,6절을 봅시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습니다. 야곱은 창세기 50장 중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믿음의 계승자이며 4명의 아내와 12명의 아들을 둔 족장이었고 아들들에게 땅을 나누어 줄 정도의 재력가였습니다. 그가 판 우물이 아직 남아 있었고 사람들과 가축들은 이 물에 의지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7절을 봅시다. 이곳에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런데 때가 여섯 시쯤이었습니다. 우리 시계로 낮 12시인 때입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낮 12시에 물을 길러 오는 건 보통의 여자가 하는 행동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일부러 아무도 없는 시간을 골라 나온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떨 때 사람들을 피하고 싶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사람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까? 잘 한 일도 없고, 잘 하는 일도 없고, 잘 될 것 같은 일도 없을 때 그러합니다. 고3 시절에 명절이 되어도 친척집에 가지 않는 이유는 시간을 아껴 공부하기위해서라기보다 공부는 잘 하느냐? 어느 대학에 원서 넣느냐? 묻는 어른들을 만나기 싫기 때문입니다. 졸업할 즈음이 되어도 친척집에 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취업은 했냐, 연봉은 얼마냐 묻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차고 결혼 할 때가 되어도 마찬가지겠지요. 뿐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도 세상 누구보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봐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목자님들이지만 한번 씩 피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잘 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왠지 만나면 양식생활은 잘 하느냐, 소감은 썼느냐, 양들은 잘 돕고 있느냐 물어 볼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질문을 들어보면 나에게 관심이 있어 하는 말인 것 같으나 실상은 내 속이 어떤가 보다 그냥 겉모습이 어떤 가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전공 하고 싶은지, 어떤 분야의 일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고민하는지, 무엇으로 고통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반대로 내가 잘 하거나 못 하거나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 보다 나라는 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을까요? 나아가 내가 가장 못난 순간에라도 나를 이해하고 감당해 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이런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 더더욱 사람을 피하고 그래서 또 외롭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 어떤 사람과도 함께 하시며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고통하는지 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하시고 실제로 사마리아로 오셔서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물을 좀 달라”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자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사람들과 마주하기 싫어 한 낮의 뜨거운 태양이라도 감내하고 물 길러 왔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 그것도 유대인 남자 사람이 우물곁에 있다가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하니 한 낮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것이 속에서 훅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 합니다. 9절을 봅시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간에 쌓인 감정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매들이 이렇게 나오면 형제들은 참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라도 다 들어주는 아브라함목자님도 때로는 제가 뭔 얘기를 하려고 하면 슬쩍 자리를 피할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목자님이 아무리 저를 사랑한다하여도 제가 고민하는 몇몇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 줄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10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에 대해 자신으로부터 뭔가를 뜯어갈 유대인 남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 남자로서 대화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셨습니다. 무엇보다 뭔가를 뜯어내러 온 것이 아니라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사마리아 여자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줄 알았더라면, 지금 자신에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선물이 있고 예수님이 그 선물을 주실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물은 생수입니다.

생수는 저수지나 우물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입니다. 바닷물인 염수와 구분되는 담수입니다. 곧 생수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을 생수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은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이기에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이 생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있어야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무엇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생수를 듣고 관심이 생겼습니다. 11절을 봅시다. 그런데 가만 보니 예수님께는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다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생수를 주신다 하였는지 의심스러워 졌습니다. 12절을 봅시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을 야곱과 비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곱이 크냐, 내가 크냐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사마리아 여자가 생수를 마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려는 물은 어떤 물입니까?

13,14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야곱의 우물은 깊이가 33m 정도 되는 깊고 신선한 생수가 나오는 우물이었습니다. 자기와 12명의 아들들과 그 족속들, 짐승이 다 마셨습니다. 얼마 전 같이 마른 날이 계속 되어도 물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물은 우리 몸으로 들어가 몸의 여러 가지 신진대사에 쓰임 받고 땀과 소변의 형태로 밖으로 나가버려서 다시 목마르게 되고 그래서 또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 물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데 생수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우물은 다시 목마릅니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만 가면 좋겠다 합니다. 대학생이 되면 좋은 직장을 얻으면 좋겠다 합니다. 그런데 직장인들의 로망은 회사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살아가는데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돈이 아니라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명예나 명성을 얻는 것은 어떻습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싶고, 식스팩 복근도 가지고 싶습니다. 여행도 가고 싶고 여행을 못 간다면 집에서라도 좀 푹 쉬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쉬어도 쉬어도 또 쉬고 싶습니다. 제 몸무게가 44kg 나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허벅지가 굵다며 만족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랬을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이 있어야 된다 생각하고 많은 것들을 움켜쥐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쥐고 또 쥐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다시 목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은 그 물을 마신 사람의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봅시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묻던 사마리아 여자가 이제는 예수님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간구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목마르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18)

16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하십니다. 그러나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왜 아무도 없는 시간을 골라 한 낮에 물 길으러 갔는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여자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았을까 싶습니다. 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 다섯을 바꾸고 지금 있는 자도 남편이 아닌 사람과 살고 있는 이 여자의 속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녀라고 이렇게 여러 번 남편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고 존중하며 남편으로서 또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을 맹세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합니다. 발도 안 씻고 자는 부인을 오래도록 참아주는 남편이 어디 있을까요? 더하여 안 씻은 발을 들이밀며 주물러 달라고 까지 하니 기겁하고 도망가지 않을까요? 결혼만 하면 매 끼니 밥상을 차려줄 것을 기대하는 남편과 사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말로는 저 하늘의 별도 달도 다 따줄게 니가 제일 예쁘다 사랑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 셋을 혼자 키워야 할 때는 또 어떨까요? 미루고 미루었던 자동차 운전 연습시간과 시누이 아들 돌 잔치 시간이 겹쳐 피치 못해 돌잔치에 못 갔는데 남편으로부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을 들으면 과연 저 사람이 나를 소중히 여기는가 싶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지만 아직도 남편이 없었습니다. 더 많은 남편을 얻는다 하여도 그녀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다시 목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경멸의 대상인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하겠는지라 하셨습니다. 남편 다섯을 바꾸고 지금 있는 자도 남편이 아닌 사람과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자의 속을 다 아시고 그녀의 하는 말이 옳다 하시고 참 되도다 하십니다. 우리가 죽고 못 살 것 같은 사람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고도 언제 그랬냐며 원수만도 못하게 여기고 헤어지는 것은 내 마음이 변하고 상대방의 마음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잘 할 땐 한없이 좋아라 하다가도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괄호 밖으로 내 모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8). 죄에 악을 더할지라도 ‘너는 안 되겠다’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라 하시므로 용서하시고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실 때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저는 1남 4녀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인정과 칭찬 듣는 것을 좋아하여 집안 청소를 도맡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찾는 물건이 있을 때마다 저를 부르셨는데 그 때마다 참 뿌듯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살 터울인 오빠와 다툼이 있으면 어머니는 항상 오빠 편을 들었습니다. 내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오빠 편만 들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여 엄마 몰래 오빠 신발을 짓밟으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싫어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한 가지는 내가 약속이 있어 길을 가는데 일방적으로 붙잡아 세워서는 자기들 하고 싶은 말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학 입학 후 내가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하는 만큼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 선배나 동기들은 날씬하고 예쁜 친구들만 좋아하였습니다. 누구라도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였습니다. 내 모습이 어떠하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에 초청받은 친구를 막으려고 따라온 인제UBF에서 처음 만난 선배들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며 만난 하나님은 나를 지으시고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창세기 1:31). 제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에 대한 목마름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이 그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믿음의 길을 간다고 온갖 욕을 다 들어도 기쁘고 행복하고 자유로웠습니다.

99년에 인제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백병원에서 근무한지 올해로 19년째 됩니다. 아픈 사람들의 집합소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의대 자매 중 하나는 자기 목숨 팔아 다른 사람 목숨 살리는 것이 의사의 길인 것 같다 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제가 하는 일에 작은 실수가 있게 되면 환자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기에 병원에 일하러 갈 때마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의 특성상 24시간을 내가 환자 곁에 있을 수 없으니 끊임없이 인수인계를 해야 하는데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이 안 들었다 하면 그만이니 참으로 답답한 때가 많았습니다. 해명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근무지가 바뀌어 급성기 치료가 끝난 환자들을 2차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보내기 위한 면담을 주로 하는데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은 제가 말을 길게 한다고 답답해 합니다. 제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유라도 전하고 싶지만 ‘됐고’ 하며 ‘니는 안 되겠다’ 합니다. 그런데 그룹공부 중에도 무슨 얘기를 하다가 목자님으로부터 ‘됐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냐’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말을 좀 길게 하고 많은 말을 해도 그 말 하는 이유가 있는데 ‘됐고’ 하며 말을 자르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하는 말을 듣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아시고 “네 말이 옳다, 참되다” 하셨습니다. 제가 말을 길게 할 때 사실상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 할 때마다 한소리씩 들으니 말하는 것이 스트레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 들어주시고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알아주시고 네 말이 옳다 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내 속을 다 시원하게 해주시는 예수님은 저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성경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께 구하여 허무하고 목마른 인생에서 구원을 얻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의 말에 공감해주시는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 그동안 하고 싶었던 질문을 하였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다 말해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라(19-30)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19절을 봅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20절“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게 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 예배에 대해 물어봅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은 남편이 아닌 사람과 동거 중인 여자라도 예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므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배장소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예배하라 하십니까? 21절에서 24절까지 보겠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눈에 보이는 그래서 서로 여기가 맞다 저기가 맞다 주장하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때가 이르러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코 내 마음대로 이랬다 저랬다 예배할 수 없습니다. 여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알고 기다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므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 때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피하여 한 낮에 물 길으러 갈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남편 문제를 드러내시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감당해 주시던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마리아 여자에게 더 이상의 부끄러움은 없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목마름도 없어졌습니다. 이렇게 기쁘고 만족스럽고 자유로운 순간은 처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은 만나고 그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동네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오시는 참 빛이십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도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이 피하려던 사마리아 사람, 문제 많은 사람, 도와줘도 답이 없을 것 같은 사람, 자꾸만 목마를 것을 찾는 어리석은 사람, 그러면서도 콧대 높은 여자, 심지어 예수님 믿는 사람 그렇게 싫어하던 저에게도 오십니다. 참 빛이신 예수께서 이같이 누구에게나 오십니다. 예수께서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받아, 있는 그대로 질문하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다 답하여 주십니다. 때로 대답을 하지 않으실 때도 있기는 한데, 그때는 다 이유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때는 내 자신이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지 스스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우리 각 사람이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

 

1강 김드보라 2017 071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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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디모데후서 2022년 인제 학생수양회 1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2.26 50
310 베드로후서 2022년 베드로후서 2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2.20 43
309 베드로후서 2022년 베드로후서 1강 메시지(천모세_ file 정여호수아 2022.02.13 63
308 베드로전서 2022년 베드로전서 5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2.06 49
307 베드로전서 2022년 베드로전서 4강 메시지 (김아브라함) file 정여호수아 2022.01.30 43
306 베드로전서 2022년 베드로전서 3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1.23 44
305 베드로전서 2022년 베드로전서 2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2.01.16 42
304 베드로전서 2022년 베드로전서 1강 메시지 (김요한) file 정여호수아 2022.01.09 49
303 누가복음 2022년 신년 3강 메시지 (천모세) file 정여호수아 2022.01.02 50
302 출애굽기 2022년 신년 2강 메시지(김아브라함) file 정여호수아 2022.01.02 40
301 디모데후서 2021년 신년 1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1.12.26 60
300 마태복음 2021년 성탄 2강 메시지(김요한)_ file 정여호수아 2021.12.19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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