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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인제·양산 여름수양회 2강 메시지                                                                           이동진

마가복음 2:1-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17)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제 심령을 울리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제 심령이 울렸는지 본문 말씀을 따라 증거 하겠습니다.

먼저 중풍병자가 예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께로(1-5상)

예수께서 나병을 고치셨습니다. 나병은 피부가 문드러져 심하면 코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병을 고치셨다는 소문이 나자, 너도 나도 각자의 병을 고치려고 예수께로 몰려왔습니다. 얼마나 몰려왔는지 예수께서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는데도 사람들이 나아왔습니다(마가복음 1:40-45).

1,2절을 봅시다. 그로부터 수 일 후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났고, 많은 사람이 그 집에까지 모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 道, the Word, 곧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사람을 어떻게 살리시는지 보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 지는 것이 그 사람의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보다 훨씬 좋은 선물입니다. 병이 나아도 또 다른 병에 걸리거나, 또 그 나은 몸으로 욕심을 채우다 끝나면 허무한 인생일 것입니다. 볼펜 자국만한 겨자씨 한 알 같이 작은 말씀도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면 자라나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됩니다(마가복음 4:31,32). 말씀 듣는 사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게 합니다.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건강하게 만들어 어떤 사람도 품고 사랑하고 살려낼 만큼 큰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문제들을 바로 해결해주시기 보다 먼저 “말씀”을 듣게 하셨던 일들이 감사합니다. 저의 대학 1학년 때 해결하고 싶었던 인생문제는 평생 함께 할 여자, 예쁜 여자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학년 여름방학 때 제가 좋아하던 예쁜 여학생이 기숙사에 남는다 하여 저도 토익 공부한다며 집에서 기숙사비와 생활비를 지원 받고 기숙사에 남았습니다. 몇 번 같이 밥 먹고, 몇 번 같이 테니스를 쳤나? 그 여학생은 집으로 돌아갔고, 낙동강 오리알이 된 저는 포항 집에 갔다가 김해로 오는 시외버스 안에서 여름수양회 실무자였던 소희누나를 만났고, 얼떨결에 돈을 내고, 여름수양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2007년 여름수양회에서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씀이 제게 들렸습니다. 감사합니다.

3절을 봅시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그렇게,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듣고 있는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중풍(Stroke)은 뇌혈관이 터지거나 막혀서 뇌신경이 기능을 하지 못하여, 몸의 일부 또는 전부 마비가 되는 병입니다. 최근에도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최소한의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아직 살아있는 뇌신경이 이미 죽은 뇌신경의 역할을 대신 해줄 거라는 기대로 재활치료를 하는 것이 다입니다. 저는 요즘 제가 연구 중인 재활로봇을 임상 실험하느라 반신 마비된 중풍환자를 많이 만납니다. 어떤 환자 분은 제게 “암은 걸려도 중풍은 걸리지 말라, 암은 도려내거나 죽으면 끝인데, 중풍은 죽는 병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낫는 사람은 한명도 못 봤다. 돈은 돈대로 들고, 주변 사람들은 엄청 고생시키지..” 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 중풍병자는 네 명의 친구에게 메워가지고 온 것으로 봤을 때, 온 몸이 마비가 된 것 같습니다. 생각도 하고 말도 어눌하게나마 하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는 상태, 굽어질 수 있는 것은 다 안쪽으로 굽어지고 굳어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매일 오그라드는 손을 억지로 펴고, 대소변도 받아 주고, 밥도 먹여주고 하는데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곁에서 수발 드는 가족 친지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중풍병자는 중풍병자대로 자기 뜻대로 안 해준다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데, 참 답답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도 예수라는 분이 나병환자를 싹 고치셨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래 우리 중풍이도 “예수께로” 데려 가보자. 그가 우리 중풍이도 싹 고쳐 주 실거야.’ 하며, 중풍병자를 누워있는 침상 째로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4절을 봅시다. 그들이 벅찬 희망을 가지고 “예수께로” 와서 본 것은, 정작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집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모인 ‘무리들’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뭔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다가도 ‘많은 사람’이 보여 불평, 불만을 가지지는 않습니까? 저는 나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잘못된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 잘 만나고 부모를 잘 만나면 좋은 대학 가고, 좁아터진 대한민국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경쟁이 심해도 너무 심하고, 하고 싶은 일 하려도 이 경쟁을 이겨야 하니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중, 고등학교 때에 쟤만 없으면 내 등수가 올라가는데 하며, 정작 해야 할 공부에는 집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에 갇혀있으면 이도저도 아니고, 계속 그대로 중풍병자로 남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이러이러해서 나도 이러하다,’ ‘다른 사람이 저러저러해서 내가 못한다.’ 는 생각이 있다면, 스스로 중풍 병을 의심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풍 병의 특징이 바로 생각만 굴뚝같고 몸은 의욕 없이 가만히 누워있으며, 입만 살아서 환경에 대해, 사람에 대해, 불평불만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가서 보면 중풍 병자 중에서도 다른 사람 안보고, 자기 훈련에 열심이신 분들은 확실히 다릅니다. 절룩거리지만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치료사들에게 마사지 받듯이 몸을 맡기고, 자기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신 분들,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며, 신세한탄만 하시는 분들은 회복이 느립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한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4절 하반 절을 봅시다. 무리들 때문에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갈 수 없자,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명이 긴급회의를 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오늘은 안 되겠네, 다음에 오자.’ 하니 또 다른 친구가 ‘무슨 소리고, 언제 또 오노, 그때라고 상황이 달라지겠나. 어떻게든 해봐야지. 지금 뭐라도 해보자.’ 하였습니다. ‘어찌하든지 이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음..’ 그들의 생각은 “예수께로” 향하였고, “예수께로” 나아갈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계신 곳 위의 지붕이 보였습니다. ‘저거 뚫으면 예수께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들은 예수께서 계신 곳 위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뭐야 이건’ 하고 쳐다보니, 뚫린 지붕 사이로 네 명이 ‘예수님..’ 하고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 분위기가 어떠했을까요? ‘뭐 저런 이기적인 놈들이 다 있냐.’며 수군수군 거리고, 먼지도 떨어지고, 곱지 않은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5절 상반 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신 그들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먼저, 그들도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듣고는 ‘에이 말도 안 돼’, 하며 흘리지 않고, ‘예수께로 가면 이 중풍병도 낫겠다’는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둘째로, 듣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온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께로” 라는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다’며 상황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든 지붕을 뚫어서라도 예수께로 나아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 때문에 못 만났다.’ 핑계 대고 살았다면 예수님은 못 만나고 항상 사람만 보고 돌아가는 이도 저도 아닌 삶을 반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께로”라는 믿음을 지켰고, 예수님도 그들의 믿음을 바로 알아보셨습니다.

또한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의 믿음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중풍병자의 아주 작은 믿음도 믿음이지만, 그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께로” 데리고 온 ‘친구들의 믿음’이 있었음을 생각해봅니다.

저는 2007년 3월 2일 금요일 B동 1층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예쁘고 친절한 누나 두 분이 인사하며, ‘예수라는 이름 들어봤어요?’ 했는데,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날 저녁, 얼떨결에 새내기 초청 카페에 참석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술로 끈끈이 맺어진 친구들에게도 연락해, ‘거기가면, 밥 공짜로 준단다’ 하며, 그날 바로 UBF 교회로 우르르 갔습니다. 그때 참석한 학생들 다섯명의 이름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학기가 시작되고 저는 온갖 술자리 참석하랴 바빠졌고, 다른 친구들은 ‘거기 이상하다며, 가지마라’고 하였는데, 저는 그래도 먹은 게 있어서 예의상 일요일 주일 예배는 드리고 있었습니다. 또 당시 기숙사는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해 모세 형이 똑똑 문을 두드렸습니다. 모세 형 뿐 만이겠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동하 형도, 태현 형도, 현태 형도 일요일 아침에 기숙사 문을 두드렸습니다. 특히나 저는 2007년도에 하나 밖에 없는 양으로써 모든 목자님이 저 하나를 “예수께로” 데려가고자 희생했음을, 제 기억 속엔 잊혀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중풍병자 하나를 예수께로 데려가는데, 여러 명의 동역이 필요합니다. 저 같은 중풍병자를 “예수께로” 데려 가고자한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하-12)

5절을 다시 한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실까요? ‘중풍병’과 ‘죄 사함’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그 전에 ‘죄’란 또 무엇일까요? 흔히 말하는 ‘죄’란, ‘양심이나 도리에서 벗어난 행위.’ 그래서 ‘벌 받을 만한 일’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 도둑질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넓고 제대로 된 의미에서의 ‘죄’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여 따르지 않는 것’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내 욕심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로마서 3:23)’ 입니다. 여기에는 속으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창4:7), 마음에 드는 모든 여자 또는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창6:2) 등, 하나님을 의심하며(창3:5),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는 중풍병과 같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마비시킵니다. 그나마 양심이 살아 있을 때 느끼는 죄책감도 여러 번 죄를 반복하고, 그런 죄에 대한 큰 문제의식이 없는 세상에서 나이를 먹다보면, 무감각해집니다.

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는데, 그렇다고 우리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보면 죄와 싸우라고,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고 되어 있습니다(히브리서 12:4). 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도 되어 있습니다(로마서 3:10). 죄와 처절히 싸워도 의인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쩌라는 말입니까? 어차피 죄인이니까, ‘어쩔 수 없다’며 죄 가운데 그대로 살면 되는 것인가요? 그건 예수님을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아직 모르는 무언가에 눈이 가려져,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죄 사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6,7절을 봅시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바로 어떤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당시 인쇄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일일이 옮겨 적고 연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말씀대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봤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그들에게 신앙이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라, 정치적 또는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사람이 두 사람만 모여도 누가 우위에 있는가하며 기싸움을 합니다. 저도 그런 거 해봐서 아는데, 말씀이고 뭐고 정말 내 생각대로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듯이, 이번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속을 바로 아셨습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알게 하고자 하십니까? 10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인자가” 즉,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께, “땅에서”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지금 여기, 지금 이 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죄 가운데 있어서 어쩔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게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믿음, “예수께로”라는 믿음을 보시는 예수께로 나아가,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의 빛을 죄로 인해 마비된 내 마음 깊은 곳 구석구석 비취도록, “예수께로”의 믿음을 가지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예수께로” 집중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이 땅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근본 원인, 죄 문제에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에 대한 답은 둘 다 어렵다 인데, 예수님은 ‘둘 다’를 말 하십니다. 11절을 읽어봅시다. “가라” 까지. 내 마음 속 죄에게, 내 마음 속 중풍이에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믿음으로 다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중풍병자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 집으로 갔습니다. 이 일은 그 곳에 있는 서기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놀라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 하였다”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2).

예수님께 이 땅에서, 지금 여기서, 우리 속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있는 죄 문제에 대하여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고 “예수께로” 나아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그 은혜가 임합니다. 본문 말씀에서의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이 그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 속의 죄가 사함 받고, 자기 할 일을 하는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였지만 제가 기대했던 만큼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온라인 컴퓨터 게임 세계로 도망하였습니다. 그 세계에서 저는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컴퓨터 앞에 앉아 손만 까딱이는 ‘중풍이’ 였습니다. 대학교도 점수에 맞춰 취업하기에 공대가 좋다 해서, 재밌어 보이는 인제대학교 전자지능로봇공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공부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젖어 있었고, 이 사회가 잘못된 거라고 여기며, 그냥 즐기며 살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니 아, 재밌었습니다. 놀면서 취직도 잘 하려니, 인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모임 저 모임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술에 취하며, 맛있는 음식과 놀이를 즐겼습니다. 지금 배가 그 술 배입니다. 인제대가 길쭉하게 생겨서 10m만 가도 아는 사람과 인사를 하니, 제가 뭐라도 된 줄 알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1, 2학년 당시 ‘밑져야 본전이다, 손해 볼 건 없다’라는 생각으로 이름도 신기한 ‘모세’라는 형이랑 성경공부도 하고 있었습니다. 공짜로 그 유명한 성경이란 것도 공부 시켜주고, 밥도 얻어먹고 좋았습니다. 부모님과도 친구들과도 잘 하지 않는 깊은 대화, 그것도 답 없이 끝없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그런 무의미한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하는 깊고, 명확한 진리가 있는 대화, 방향이 되는 말씀이 좋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제게 조금씩 들리면서, 그 동안은 내가 왜 공부하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남들이 다 하는 대로 수동적으로 살아왔는데, 조금씩 말씀대로 할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군 제대 후 2학년을 시작하면서 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2,23) 말씀은 제게 ‘세계최고의 로봇공학자’라는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다른 사람이 어떠하든, 내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고, 중학교 1학년 때 반에서 1등 한번 한 이후로 처음으로 학과에서 일등을 해보았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저를 할 일을 하는 사람이 되도록 일으켰지만, 동시에 내 속에 있는 죄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하였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제게 비치는데, 죄가 안 들어날 수 없습니다. 애써 모른 체 하려하들, 가린들, 뭐로든 다 드러나게 됩니다.

3학년 때 UBF 동아리 회장을 하였는데, 친구들이 ‘동진이 니 UBF 회장이라며~’ 물을 때 저는 당황하여 ‘아, 어.. 응..’ 답하였습니다. 친구들과 술을 먹고 밤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장막에 들어가기가 좀 그래서 교회 1층 식당에서 잤습니다.

또 동아리 방에서 말씀공부를 하였는데, 한번은 마태복음 5장 27절부터 30절,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제가 인도를 했었습니다. 굳이 아내 외의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고 다른 여자를 본 것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목자님들한테 칭찬받을 정도로 자알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찝찝하였습니다. 조금만 짧게 입은 여자가 지나가도 음욕을 품고 쳐다보는 저였고, 무엇보다 군대 있을 때 선임들과 외박 나와 술집에서 여자를 만나 성관계를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진실 된 말씀공부 모임 때라 하더라도 이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또 저는 성격이 아주 급하고 감정적이라, 조금이라도 내 뜻대로 안되면 보이대로 뭐든지 부수고 던지고 깨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나를 무시하는 듯 하는 말을 들으면, 하루 종일 그거 묵상한다고 시간을 다 보냈습니다. 저는 분명 ‘화병’ 이나 ‘암’에 걸려 죽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가 제게 빛으로 임하셨을 때, 그 모든 것들이 소멸됨을 경험하였습니다. 내가 왜 그랬던 거지? 정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음성이 들렸고, 내가 미워했던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요즘엔 기분 나쁜 말 들었다고 막 그거 묵상한다고 시간 소비하지 않습니다. 또 요즘엔 뭘 부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음욕을 품고 지나가는 여자를 보게 되지만, 그래도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어, 아직 누군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제 하나 밖에 없는 나의 돕는 배필을 다시는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친구들에게 또 가족들에게 당당히 나 예수님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도 주셨습니다.

죄 사함이 얼마나 좋습니까? 무엇보다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어린 양들을 먹이고 돕는 삶을 살까를 생각하니, 저절로 ‘세계 최고의 로봇공학자’라는 꿈이 ‘사람을 살리는 로봇 공학자’로, 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어린 양들을 먹이고, 주를 증언하는 일꾼’이라는 더욱더 완전한 꿈이 되게 까지 하십니다. 게임하고 그림 밖에 그릴 줄 모르던 제가 DGIST란 곳에서 똑똑한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선 말 한마디 못하던 제가, 거의 매일 사람 앞에 서서 발표를 합니다.

그러면 중풍병도 안 걸리고 잘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떤가 볼까요? 예수께서 취업해서 직장에 앉아 있는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13-15)

13절을 봅시다. 집에 오신지 얼마나 됐다고, 또 많은 무리로 인해 얼마 쉬지도 못하셨을 텐데, 예수님은 다시 바닷가에 나가서 큰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집에서든지, 바닷가에서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14절을 봅시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몰려온 무리들에게 힘써 말씀을 전해주실 뿐만 아니라, 흩어진 양들을 찾아다니시는 분입니다. 세상 구석구석을 밝히시는 빛(Light), 살아 있는 빛이십니다.

빛이신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을까요? 레위의 직업은 세리(Tax collector), 세금을 거두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세리는 로마 정부를 위하여 세금을 거두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거둔 세금에서 얼마의 돈을 남겨 자기들의 호주머니를 부풀렸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레 동포인 유대인들로부터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창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레위는 세리가 되었을까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뭐니 뭐니 해도 머니, 돈이 최고다.’ 라는 자신만의 뚜렷한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선 컴퓨터 게임의 세계로 도망쳤던 저보다 훌륭합니다.

그렇게 돈을 따라 세리의 길을 선택한 레위였지만, 지금 레위는 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레위의 모습은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린, ‘목적’을 잃은 모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 가는 길이 맞는 방향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가다보니,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무엇을 위해 이렇게 돈을 따라 아등바등 살았는가.” “잘 가고 있는건가?”,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지?” 허무하고 앞이 컴컴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14절을 다 같이 다시 읽어 봅시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세리 레위를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그만 일어나 따랐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목적이 주어졌습니다.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빛입니다. 저는 일학년 때 ‘행복하게 해주세요.’ 기도하였습니다. 행복은 누구나 바라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한 기준이 다릅니다. 레위의 경우 그것이 돈이었다가, 이제는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엇이 돈이라는 목적보다 더 좋은 것일까요? 저는 예수님이 나의 마음을 보시고 치료해주시고, 제대로 된 인생 목적이 되어주신다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4학년 때 제 주위에 친구들과 목자님들은 많았지만 저는 외로웠습니다. 졸업하고 나서 뭐할지 깜깜했습니다. 분명 돈이 목적인 삶은 아닌데, 그러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왜 사는거지? 행복이란 무엇인가? 질문이 들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은 사람을 끊임없이 욕심을 채우는 쪽으로 가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돈을 따라 움직이는 세상은 너무나 어둡고, 허무합니다. 하지만 빛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은 이것을 덮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 예수님을 따라간 세리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되어, 마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마태의 메시지 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태복음 13:44) 예수님은 내게 있는 것을 모두 팔아서라도 쫒아갈 만한, 가장 값진 보화입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세리 레위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자기와 비슷한 처지일 수 있는 사람들도 많이 초청하였습니다. 15절을 봅시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이전에 돈만 알고 돈만 따르던 레위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따르고 나서는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기쁨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따르면 자신의 문제에만 갇혀 끙끙대는 좁아터진 것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까지 챙기고 먹이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넓은 사람이 됩니다. 빛을 발하는 사람이 됩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그렇게 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6,17)

16절을 봅시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 이 광경을 보고,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문제 삼았습니다. 왜 그들에게 이게 문제가 되었을까요?

말씀을 잘 아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죄인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죄인들이 행하는 죄로부터 오염도 안 되고, 거룩함, 의로움을 지키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나쁘진 않은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괜히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하는 걸 보면, 순전히 정말 이해가 안 돼서 묻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상하고, 자기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악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17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병든 자가 의사를 찾아가지, 건강한 자는 의사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병든 자는 죄인이고, 건강한 자는 의인입니다. 당연히 건강한 자, 의인이 좋지요. 또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건강한 자, 의인은 스스로 건강하다 생각하여 의사가 필요 없다는 사람,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본문 말씀에서의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17절에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의인’입니다. 스스로 건강하다 생각하여 자신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건강하다, 의인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저를 포함하여 예로부터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때 몇 사건 이후로는 잘못을 지어본 적이 없다고, 그래서 저 스스로, 꽤 괜찮은 사람, 저 사람보단 나은 사람, 정의로운 사람, 성경식으로 표현하면, ‘의인’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이 제 속에 비추이자, 제가 병든 자,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문구점에 아이들이 엄청 붐빌 때 사탕 하나를 몰래 가지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또 더 어릴 땐 어떤 여자 애 밥에 김 방부제인 실리카겔을 뿌려 선생님한테 엄청 혼났습니다. 4학년 때에는 전학 온 친구를 놀려 울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저의 경솔함에 죄책감을 느끼고 사과를 하였지만, 용서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아이가 저를 마구 때렸습니다. 저는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도 미안하고, 후회가 됩니다. 어린 마음에 느낀 것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내 뱉은 말이, 그렇게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고, 나에게 큰 마음의 부담이 되는지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저는 다시는 어떤 물건도 훔치지 않게 되었고, 말도 함부로 하지 않는 등, 양심에 걸릴 일은 일절 하지 않고자 애를 쓰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처음 배운 ‘성경’은 제게 옳은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지침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전엔 오로지 양심에만 의지하였는데, 이제 명확한 지침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가며 성경을 공부할수록, 저의 경우엔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본문 말씀의 바리새인들과 비슷하게, “저 목자는 왜 저러는 가!” 하며, 타겟이 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씩 하였습니다. 소감발표시간이 제일 적합한 시간이었고, 또 일대일 목자님들에게 꼬치꼬치 따져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흠을 자꾸 들쑤시고 드러내는 날 보고 몇몇 목자님들은 저보고 ‘동진 목자도 죄인이야’ 라고 하였고, 일대일 목자님은 ‘동진 목자가 가장 흉악한 죄인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난 저런 죄인들과 달리 말씀을 지키고 양심에 따라 살고자 하는 거고, 양심 없는 놈들을 분별하고 닮는 쪽으로 가지 않아야 하지 않겠냐며 대꾸하였습니다. 처음엔 몇 사람에 대한 저의 정죄가 나중엔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번졌습니다. 지금도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그렇게 되는 저 자신을 봅니다.

본문 17절 말씀에 따르면 저는 스스로 건강한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 예수께서 부르러 오지 않은 쪽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선 저를 오래 참으시고, 저로 그 따뜻하고. 눈부시게 밝고, 어둠을 단번에 소멸시킬 만한 빛을 제 속에 비추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치료가 필요한 병든 자입니다. 병든 우리를 치료하는 의사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치료할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께로 나아가 아픈 데를 아프다고 말하면 됩니다. 우리 자신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내 속의 죄를 정면으로 마주 본다는 것이 고통입니다. 또 거기다가 내 자신이 보기에 죄인인 사람들과 함께 밥 먹는 것조차 힘들어 합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인데도. 병든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병든 죄인인 우리를 부르러 오셨습니다. 낫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예수께서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면 제대로 된 목적지를 향하여 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할 때 죄인이고 의인임을 주장할 수 없는 나이지만, 하나님께서 죄 사함을 선포하여주시고, 의롭다 칭해주십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으로 제 삶에 있어 앞으로의 방향을 잡게 됩니다. 저는 말씀 공부를 6년 째 하고 나서 대학 4학년 때 제 자신이 죄인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6년 동안 다른 모든 사람을 정죄하고 나서야 내 자신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죄 사함을 이야기 하고, 이러겠다, 저러겠다며 소감발표를 하지만 계속 죄에 넘어지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말씀 따라 살면 행복이 올 줄 알고 세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였는데, 내가 지금까지 뭘한 거지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말씀의 빛은 제 속에 살아 있고,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때까지 별로 찾지도 않았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데, 난 하나도 안 기쁩니다.’ 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붙잡을 것이 성경 말씀밖에 없어서 말씀 붙들고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빛으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게 “동진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시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무엇보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십니다. 기뻤습니다.

기쁨 가운데 내 죄를 사하시고, 나를 따르게 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제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가 보였습니다. 저는 디모데후서 1장 8,9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게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말씀에 따라, 저의 앞으로의 삶이 ‘주를 증언하는 삶’, 하나님의 어린 양들을 먹이고 살리는 ‘거룩한 소명의 삶’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 가치관과는 반대로 가는 길이지만, 고난 받는 길이지만, 이것이 제대로 된 방향이란 것은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비되어 누워 지내는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고, 이기적인 세리에게 “나를 따르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음을 입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복을 누리고 나눕니다. 아멘!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가복음 2:17)

 

2강 이동진 2017 071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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