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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26강 정여호수아

누가복음 15:1-32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24)

 

요즘 누가복음 말씀이 점점 우리를 좁은 문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망하리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한마디로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회개하기가 참 쉽지가 않습니다. 회개할 마음과 소원은 있더라도 실제로 할 수 있는 힘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께서 잘 아십니다. 그래서 정말 회개란 무엇인지? 또 회개할 수 있는 힘과 믿음은 어디서 오는지, 실제로 회개할 때 어떻게 되는지 이를 비유를 통해 상세히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각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믿음과 소망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회개한 한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여기십니까?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10)

1절을 봅시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께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당시 이들은 유대사회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암적인 존재요, 괄호 밖으로 취급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지난날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롭게 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죄로 인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뜨겁게 영접해 주셨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기쁨의 잔치를 열어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도 같이 먹는다며 수군거립니다. 어쩜 이렇게도 한결 같은지요! 죄인에 대한 그들의 꼬부라져 있는 그 생각과 마음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저 같으면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손절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 영접해 주시고 감당해 주십니다.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시지 않을까?,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시지 않을까? 하는 소망으로 말씀 들려주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디모데후서 2:25,26). 죄인을 향한 사랑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려주는데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십니다(3).

4절을 봅시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100마리 중에서 한 마리, 곧 계산상으로는 1%의 손실입니다. 양을 많이 치다 보면 이 정도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조금 있으면 몇 마리 새끼 양들도 태어나게 되면 이 정도의 손실은 금방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99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섰습니다(4). 산을 넘고 골짜기를 뒤졌습니다. 혹시라도 웅덩이에 빠졌나 해서 정신없이 웅덩이로 달려가 보기하고,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양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아냈습니다. 양을 찾은 기쁨에 그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5) 집으로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베풀며 이같이 말합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6)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 같이 7절을 한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그런데 이 세상에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 과연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를 볼 때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은 자신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자신을 의인으로 아는, 곧 모든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는 예수님을 보고 수군거리는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볼 때 이들은 누구보다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랑하는 의인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보다도, 회개하는 한 사람을 더 기뻐하십니다. 회개하는 그 한 사람을,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듯이 간절히 찾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회개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의인은 아흔아홉이나 되는데, 회개한 죄인은 한 사람뿐입니다. 그 만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돌이키는 사람이 적습니다. 세상에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하는 사람은 많지만, 내가 문제가 있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도 내가 부족하다 하는 사람보다, 나는 문제가 없는데, 저 사람 때문에 힘들고, 누구 때문에 어렵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회개한 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이런 사람을 간절히 찾고 또 찾으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래도 나는 아흔 아홉 마리가 더 중요한데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8절을 봅시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를 그만 잃어버렸습니다. 드라크마는 노동자 하루 품삯인 로마의 한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헬라의 은전입니다. 이 정도의 가치라면 어차피 집안에 있으니 언젠가는 나오겠지 하며 찾다가 못 찾으면 포기할만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졌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당시 드라크마는 아주 예뻐서, 남자가 자신과 결혼할 신부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이것을 마치 지금의 결혼반지같이 소중히 여겼습니다. 실제로 줄에 매서 자기 목에 걸기도 하고, 머리 장식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여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을 것입니다. 마침내 찾으면 그가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며 이같이 말합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9)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 이처럼 회개하는 그 한 사람이 너무나도 귀합니다. 그는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꼭 있어야만 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같이 찾으십니다. 여인이 등불을 켜서 집을 쓸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것처럼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으십니다.

저도 예전에 제 아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때 그 감정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너무 두려웠습니다. 땀을 뻘뻘흘리며 목이 터져라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갈렙아! 갈렙아 하고 외치고 외쳤습니다. 감사하게도 가까운 곳에서 아들을 찾았습니다. 찾았을 때의 그 기쁨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정말 어떠할까요? 찾은 그 기쁨이 너무 커서 잔치를 베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했던 것 같습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께서 또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11-32)

11절을 봅시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어느 날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 어차피 무덤에 못 가지고 가실 재산인데, 기왕에 주실 거면 미리 당겨서 유산 상속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편에서 보면, 그래도 자립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한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아직 버젓이 살아 있는 아버지를 두고 아들이 할 말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저라면 괘씸해서라도 주기가 싫을 것 같습니다. 또 뻔한 결과를 알기 때문에 안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 살림을 두 아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습니다(12).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고, 자신이 선택한 것을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인격적인 아버지였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을 봅시다. 며칠이 안되어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재산을 재빨리 처분했습니다. 그리고 다 모아가지고 아버지 없는 먼 나라에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허랑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다 낭비하였습니다. 꽤 많은 재산을 챙겨왔지만 얼마가지 못해 금방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때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습니다(14) 이에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을 찾아가서 그 몸을 의탁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15). 그런데 둘째가 일을 잘 못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악덕 업주를 잘못 만난 것일까요? 그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16).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난 둘째가 스스로 돌이켜 이같이 말합니다. 17절을 봅시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배가 고파 죽을지경이 되고 보니, 그가 비로소 자신의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돼지먹는 쥐엄 열매 조차도 주지 않는 이곳 주인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품꾼들에게도 양식을 풍족히 주시는 인자와 사랑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알게 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18). 이처럼 아버지를 알 때, 자신을 바로 알게 됩니다. 자신이 아버지께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19). 자신을 종으로 삼아 달라 할 정도로 그의 마음은 낮아졌습니다(19). 자신을 죄인으로 아는 자는 자신이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내세우던 마음보다도, 자기는 정말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겸손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의 회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가 발견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20). 사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너무나 망가지고 부끄러운 모습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 집이 풍성하다고 할지라도 이런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생각하면서 그냥 주저앉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참된 회개는 무엇입니까? 나의 죄, 나의 잘못을 깨닫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체면과 자존심, 부끄러움, 두려움, 사람들의 수군거림, 아버지나 형에게 받을지도 모를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가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둘째를 아버지는 어떻게 맞이하였습니까? 다같이 20절 하반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봅니다. “아직도 먼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이를 볼 때 아버지는 늘 집에서 멀리 나와 날이면 날마다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멀리 고개를 푹 숙이고 오는 한 거지를 봤을 때 그가 둘째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 봤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앉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뜻밖의 모습에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 그의 말대로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내쫓고 받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기쁨으로 맞아주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2,23) 다시 아들의 자격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 하더라”(24) 아버지의 기쁨은 아들이 단지 돌아왔다는 기쁨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회개한 기쁨입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내세우며 자기 의가 빳빳하던 그 아들이 죽고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정말 이제 아버지의 사랑도 알고, 은혜도 아는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잃어버렸던 그 아들을 되찾았습니다. 이 기쁨에 겨워 아버지는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기쁨은 곧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기뻐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한때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재능과 젊음을 내 몫으로 여기고, 마음껏 살다가 많은 소중한 것들을 허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전혀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모습으로 추락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우리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돌이킬 때 하나님은 둘째아들을 뜨겁게 맞아주신 아버지처럼 우리를 기쁨으로 영접해 주십니다. 천국잔치를 하시며 기뻐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음으로 우리가 어떤 죄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25절을 봅시다. 밭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맏아들은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종을 통해 무슨 일인가 그 자초지종을 듣게 된 그는(26), 너무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28). 이를 알고 아버지가 나와서 권했습니다(28). 그러자 그가 대답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 이에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 사실 큰 아들도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풍성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감사도 없고, 또 풍성함을 누릴줄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동생에 대한 기쁨이 없습니다. 이런 맏아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그 한 사람을 찾을 때까지 찾으십니다. 그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이전 것은 묻지 않으시고 주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기쁨의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 마음을 알아, 어떤 죄 가운데 있든지 지금 여기서 있는 모습 그대로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회개하고 돌아오는 동생을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영접하고 기뻐하는 첫째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잔치가 우리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 끊어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누가복음 15:24)

 

2022년 누가복음 26강 메시지 1501-1532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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