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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24강 정여호수아

누가복음 13:22-35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4)

세상에서 좀 쓸만한 문들은 다 좁은 문입니다. 대학도 좀 쓸만하다 싶으면 좁은 문입니다. 취업도 좁은 문입니다. 요즘은 결혼하는 것도 굉장히 좁은 문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정말 들어가야 할 좁은 문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구원,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런데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십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다고 하십니까?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22-30)

2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여쭙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23)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이 같은 질문을 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을 외식하는 자라 책망하시며 장차 그들에게 무서운 화가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만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다 찍어버림을 당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할 때 그는 과연 누가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싶었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우리도 그와 동일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 정말 믿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고자 애를 쓰지만, 복음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주께서 지금 당장 오신다면, 나 자신부터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싶은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무엇입니까? 다같이 24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예수님은 구원받는 자가 많은지 적은지 그것 자체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구원받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힘쓰라는 영어로는 “make every effort”입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 힘과 노력을 다 쏟아 부으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힘을 써야 합니까? 구원의 문은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학생들은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입니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어야만 좋은 기업에 입사할 수 있고 이를 위해 몇 년을 준비하고 또 준비합니다. 요즘 한 형제는 얼마전 피트시험이 끝났는데도 모자란 토익공부를 올리기 위해 영어공부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취업하는 것도, 약대도 이렇게 들어가는 것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이같이 힘을 다합니다. 애를 씁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 나라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들어갈수 있는 넓은 문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곧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도 들어갈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 없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아주 좁은 문이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문이 이같이 좁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하셨습니다(요한복음 10:7).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셨습니다. 이로 볼 때 그 문이 좁은 문인 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전통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지키는데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문자적으로만 지키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내용은 부인하고 그 모양을 갖추는 데만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고 여기며 부자처럼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고자 했습니다. 그 속에 탐심은 그대로 둔 체 열심히 겉만 씻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도 구원도 기쁨도 없었습니다. 알고보니 사실은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그들의 전통과 관습을 깨뜨리고 안식일에도 일을 하셨습니다. 사탄에게 매여 18년 동안이나 그 인생이 꼬부라진 여인을 고쳐주사 참된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안식일에 매여 있는 모든 자들을 그 매임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안식을 주시는 구원의 문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실제로 만만치가 않습니다. 문화와 전통과 관습이 주는 혜택과 특혜를 버려야만 합니다. 기존의 내가 옳다고 여기고 추구해왔던 그 모든 생각과 가치관을 꺾어야 하고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번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일같이 생각의 싸움, 마음의 싸움, 영혼의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하기 싫어하고, 고난 받기 싫어하는 우리의 본성을 끊임없이 부인하는 씨름을 해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했고(디모데전서 6:12),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싸움을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히브리서 12:4). 그야말로 좁은 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에 들어가려고 해도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았더라도 다시 넓은 문으로 가는 자가 많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가 또 무엇입니까? 그 문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문이 아니라 닫혀질 문이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봅시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구원의 문은 항상 열려 있는 게 아닙니다. 집주인이 와서 문을 한번 닫은 후에는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영부영 늦장을 부리다가 힘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도 문이 열려 있을 때는 힘써 들어가지 않다가 닫힌 후에 주여 열어주소서하며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이에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주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26) 그러나 주인의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니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27)

사실 그들은 주인을 전혀 모르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고백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백에는 는 없고 우리만 있습니다. 곧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을 저절로 얻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헛된 자부심과 교만이 그들을 더욱 완고하게 했습니다. 끝내는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그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행악은 어떤 엄청난 죄를 범한 것이 있어서라기 보다, 그들 자신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데 힘쓰지 않은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믿고 아는데 힘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자기를 내려놓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한때 같이 주의 일에 동참했을지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메시지를 들었다고, 소감을 썼다고, 여름수양회 단체 사진에 찍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적으로 예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매일 힘을 써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도 내 기쁨을 위해서나, 지식이나 상식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깊이 알기 위해서 힘써야 됩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닮고, 따르기 위해서, 치열하게 자기와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28-30절을 봅시다. 그날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지만, 오직 그들은 밖에 쫓겨난 것을 보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습니다. 이방인임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쓴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나라, 곧 구원을 얻지만,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니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자랑만 하면서 적당히 넓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다 바깥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에서는 당연히 들어갈 것 같았던 첫째는 꼴찌가 되고, 도저히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았던 꼴찌가 첫째가 되는 역전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믿었을지라도 믿음을 저버린다면 얼마든지 나중 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9:27).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된 자 되게 하셨다고 넋을 놓고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오직 겸손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빌립보서 2:12).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 자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31-35)

31절을 봅시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말합니다.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눈에 가시와 같아서 쫒아내기 위해 헤롯을 이용한 것일까요? 어찌되었든 사람이 위협을 당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위축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32,33절을 봅시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제 삼일에는 살아나 완전하여 질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이런 믿음과 확신가운데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겠다고 하십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생명이 헤롯에게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아셨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위협 앞에 위축되거나 뒤로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쉬운 길을 택하여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일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 좁은 문으로 가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은 그 좁은 문으로 가셔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온 인류를 구원하는 문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길을 먼저 가셨고 그 길로 가심으로 완전하여 지셨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을 뿐 아니라 우리로 구원 받는 구원의 길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생명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예수님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예루살렘은 장차 어떻게 됩니까? 34,35절을 봅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쳤습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하나님께서 몇 번이나 그들을 품으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끝내 그들이 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그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고, 예배하는 그 거룩한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다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다시 오셔서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모로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그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입니다. 넓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이 넓다는 말이 실은 구원은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그래서 들어가기 위해서는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힘써야 하기 때문에 들어가기가 싫고,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외롭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위해 뒤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좁은 문으로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작정하시고 그 길을 가셨고, 제 삼일에 완전하여 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친히 여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좀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 앞에 주어진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여 믿음의 경주를 계속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우리로 이 길을 끝까지 완주하기까지 우리 각 사람을 주의 날개 아래로 모아주시고 품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24)


2022년 누가복음 24강 메시지 1322-1335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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