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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20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누가복음 11:37-12:12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누가복음 12:5)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 그리고 장차 지도자가 될 제자들, 곧 목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먼저 겉만 깨끗이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37-41)

37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들어가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아니하심을 보고 그가 이상히 여겼습니다(38). 여기서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위생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인이면 다 지켜오던 장로들의 유전 곧, 손 씻는 결례 의식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아신 주께서 무엇이라 하십니까? 40절을 봅시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바리새인들은 손을 부지런히 씻을 뿐 아니라,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로 깨끗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 그 속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드셨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40). 사람은 작정하고 속이면 속일 수 있습니다. 그 마음 속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수 없습니다. 그가 우리의 겉뿐 아니라 속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겉뿐 아니라 속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속을 깨끗이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십니다(41). 대접 안에는 음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그들이 먹는 음식의 그 메뉴나 종류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깨끗한 대접에 담아 자기들끼리만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음식으로 너희 배만 불리지 말고, 실제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나눠주라 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깨끗하리라고 하십니다(41).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따로 국밥이 아닙니다. 겉모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양인데, 이웃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그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 말과 혀로서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길 기도합니다(요한일서 3:17,18).

겉만 씻고 속을 씻지 않을 때 어떻게 됩니까?

화 있을진저(42-54)

42절을 봅시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모세의 율법에 과일과 농작물은 십일조를 바쳐도 채소나 약용 향료는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말씀을 잘 지킨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것까지 세세하게 다 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렸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고 무정했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서도, 못 본체하고 지나간 제사장, 레위인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누가복음10:30-32).

그들의 실제 관심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43절을 봅시다.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에 있었습니다. 자기가 영광스럽게 되고 자기가 높아지고 자기가 출세하고, 자기 커리어를 쌓는데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예수님은 평토장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평토장한 무덤은 봉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아래에 부정한 시체가 묻혀있는 줄도 모르고 그 위를 그냥 밟고 지나다닙니다(44). 곧 겉만 씻고 속에는 탐심이 가득한, 그 목적이 자기 영광에 있는 그들의 외식하는 신앙은 자신들만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정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시키는 수퍼전파자가 됩니다. 이런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서 자신들까지 바리새인들과 도매금으로 몰고 가시니 화가 났습니다. 45절을 봅시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직격탄을 날리십니다.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고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의 본질과 정신은 버리고 율법에도 없는 613개에 달하는 장로들의 유전을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았습니다. 47절을 봅시다. 또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다시 쌓고 비석을 세워 그들의 신앙과 정신을 계승하는 자들인 것처럼 행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선지자들을 죽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들의 조상입니다. 조상은 죽이고, 후손은 그 무덤을 만듭니다(48). 그리고 이제 그들 자신이 앞장서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죽일 것입니다(49).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창세 이래 모든 선지자가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50-51). 이는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자,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죄 때문입니다. 또한 천국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신을 물론 다른 사람들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그 죄가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52).

예수께서 이같이 강력하게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을 무섭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말 그들에게 화가 임하기를 바래서 일까요? 선한 목자는 양들이 잘못된 길을 가도록, 멸망과 심판의 길을 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비록 힘들어 할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면 미움받을 줄 알면서도 쓴소리 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려야 겠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십니다(히브리서 12:6). 만일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있다면 그는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닙니다(히브리서 12:7,8). 곧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이 같은 무서운 책망은 그들로 진정 화를 면하게 하시려는 주의 크신 사랑의 회초리입니다. 스스로를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고, 그들의 마비된 양심을 깨워주기 위한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위로와 소망의 말씀으로 힘을 얻지만, 때때로는 말씀의 빛이 나의 더러운 죄와 어둠을 계속 드러내니 너무 괴롭기도 합니다. 그 빛을 피해 다시 이전의 어둠속으로 숨고 싶고,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 속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어찌하던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려고 이 일을 하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또는 목자님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책망을 통해, 또는 어떤 사건을 통해 나의 숨은 죄를 드러내십니다. 요즘 저는 어떤 자매목자님이 일대일 할 때마다 우는 모습을 목격하곤 합니다. 물론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입니다. 그러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히브리서 12:11).

우리가 하나님앞에 쓰임받는 길은 우리 자신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을 따라 자신의 어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데 있습니다. 다윗도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호와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함으로 쓰임받았습니다(영왕기상 15:5). 누구든지 자기를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됩니다(디모데후서 2:20).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53,54절을 봅시다.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물었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었습니다. 끝내 그들은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기어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그들에게 반드시 화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느새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말씀을 저 자신에게 적용하고 가르치는 일에 소홀해진 것 같습니다. 교만해지는 것은 정말 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말씀을 따라 제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지 항상 돌아 봐야 겠습니다.  저 자신을 먼저 깨끗하게 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겠습니다. 제가 속이 깨끗하여 주께서 실제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이제 예수님은 장차 지도자들이 될 제자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12:1-5)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에게도 거침없이 책망하시니 백성들은 마치 사이다를 마시는 것 같이 그 속이 시원했던 것 같습니다. 이 일로 예수님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동안에 무리 수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습니다(1).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얼마나 흥분되고 또 들떴을까요? 자기들이 뭐라도 된 것 마냥 우쭐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읽으셨던 것일까요?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예수께서 왜 '바리새인의 외식'을 '누룩'에 비유하셨을까요? '누룩'은 적은 양으로 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는 효소입니다. , 적은 누룩이 그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키고 변질시킵니다. 이제 제자들은 밟힐 정도로 많이 모여드는 무리들을 이끌 지도자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들도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외식은 겉과 속을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연기를 할까요? 사람들이 주목하여 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을 내가 정말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관찰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그런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경건의 능력보다는 경건의 모양을 갖추는데 더 신경쓰기가 쉬워집니다. 평판에 신경을 쓰게 되고, 여론에 마음이 움직이고, 또 욕들어 먹을 것이 두려워서 겉과 속을 다르게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외식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전체를 부패하게 하고 부정하게 합니다. 사람들로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렇게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십니다. 이에 그들로 외식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2절을 봅시다. 사람들이 외식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외식하면 감출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도 광명한 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도 지붕위에서 전파될 것입니다(3). 실제로 요즘은 CCTV나 블랙박스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하루에도 수없이 찍힙니다. 운전중에 교통법규 위반했는지도 모르는데 범칙금 통지서가 날아옵니다. 설령 이런 CCTV 블랙박스에 안찍혀도 천국카메라에 다 찍힙니다. 그러므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4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친구끼리는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친구로서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 들으라 하십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외식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세상권세자가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직장 상사의 말한마디에 내 먹고 사는 문제가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목숨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을 주신 분은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그 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5).

우리에게 죽으면 다 끝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생각이 우리의 모든 인생의 목적을 정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우리 인생의 삶의 방향을 좌지우지합니다. 지금 여기서 인정받고, 지금 여기서 칭찬받고, 지금 여기서 출세하는 것에 목을 매게 합니다. 지금 여기서 죽을 것이 두려워 일생 종 노릇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 둘째 심판이 있습니다. 곧 영생과 영벌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참으로 알아야 할 진리입니다. 친구인 우리에게 예수께서 진정으로 가르쳐 주고자 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할 존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심판 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나 인정에 목을 매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생각하고 그 뜻을 따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머리털까지도 세신바 되었나니(6-12)

6절을 봅시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립니다. 앗사리온은 구리동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하셨습니다(10:29). 참새를 파는 사람이 동전 하나에 두 마리 하다가, 두 동전어치를 사면 한 마리를 덤으로 끼워주는 것입니다. 장사꾼에게 참새 한 마리는 그냥 덤으로 끼워주는 미끼 상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한 마리도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참새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제자들은 어떠할까요? 7절을 봅시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내 머리카락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더구나 머리카락은 감을 때마다 수십 개 씩 빠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까지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내가 나를 가꾸는 것보다 더 섬세하게 나를 살피시며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8,9절을 봅시다. 바리새인들처럼 사람 앞에서 외식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나중에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부인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주 되심을 거역하는 그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로서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10). 그러나 예수님을 시인하면 성령께서 친히 책임져 주신다고 하십니다(11,12).

오늘 말씀을 볼때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크고 두려우신, 나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고, 경외함으로 주의 말씀을 듣고 따라 먼저 자기를 돌아보고, 가르치기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갖추는 진실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주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진실함과 깨끗함으로 언제 어디서든 주께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누가복음 12:5)

 

2022년 누가복음 20강 메시지 1137-1212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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