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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15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누가복음 9:37-62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9:62)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그리스도로서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임당하고, 살아나시게 위해 올라 가십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과 같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고난을 피하고, 인정과 높임을 받기 위해 오르고 있었습니다. 자기 욕심과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예수께서 어떻게 도우십니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37-45)

37절을 봅시다. 이튿날 예수께서 세 제자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그들을 맞았습니다. 그때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귀신 들려 크게 고통당하는 내 외아들을 돌보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38,39). 그러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미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40). 이를 들으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예수께서 제자들을 이렇게 꾸짖을 만도 했습니다. 그 전에 전도 여행에서 그들이 능히 했었던 일인데 이번에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못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없고 패역하기 때문입니다. 패역은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스른다는 말입니다. 그 전에 있었던 그 믿음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그들이 왜 이같이 패역한 자들이 되어버렸을까요?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길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부담이 되어 마음에 걸림이 되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변화산에 자기들은 놔두고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신 일로 삐뚤어진 것일까요? 어찌 되었든 그 순간 만큼은 제자들도 믿음이 없고 패역한 그 시대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시대 사람들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 만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거는 기대와 소망이 큽니다. 제자들조차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패역한 이 시대에 어떠한 소망도, 희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점에서 지금 나 한 사람이 믿음을 지키고 간직하는 것은 매우 크고 중요한 일입니다. 나 한 사람이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늘 깨어 있어 이 시대를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키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4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으로 어둡고 둔해진 제자들의 마음을 깨우시고, 아이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42). 이에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셨습니다(42). 이를 보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습니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니라”(44) 그리스도로서 자신이 가실 길은 사람들에게 높임받고 추앙받는 길이 아니요, 버림받는 길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귀에 담아두어야 할 말씀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으며,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45).

이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또 무엇이라 하십니까?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46-56)

46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듣고 난 후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왜 이 같은 변론을 했을까요? 제자들은 예수께서 곧 있으면 그리스도로서 영광과 위엄으로 왕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지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날에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지가 그들의 초미의 관심사였고, 그래서 그전에 서열 정리를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제자들의 속내를 다 아셨습니다. 이에 어떻게 하십니까? 47절 하반절을 봅시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셨습니다. 앞에 세우지 않고 옆에 세웠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생각하는 큰 자는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좌우편에 산에 함께 오른 세 제자도 아니요, 산 아래에 남아있던 아홉 제자도 아니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하십니다(48).

어린아이는 말 그대로 어리고 미숙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다 챙겨줘야 할 만큼 손이 많이 가는 존재입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 끊임없이 자기를 섬겨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영접하기보다는 무시하고 멸시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영접하는 것은 그 사람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수준에 맞게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진정 큰 자라고 하십니다.

누가 이같이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죄인들을 섬기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구유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세상에서 멸시 받던 세리와 창기와 각종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가장 높은 분이시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보잘 것 없고, 병들고, 버림받은 자들을 소중한 자들로 여기시고 보듬어주고 높여주셨습니다. 지금도 누가 크냐?”며 다투고 있는 제자들을 낮아져서 섬기고 계십니다. 정말 누가 큰 자입니까? 예수님이 큰 자 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요 가장 큰 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씀을 받아 들였을까요?

49절을 봅시다. 사도요한이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그가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않으므로 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이 내어 쫓기는 역사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요한은 이를 보고 누구보다 기뻐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사람에게 이 일을 하지 말라고 금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했습니다. 함께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그런 특권을 누리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 위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하십니다(50).

5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이에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고, 또 멸시받는 사마리아 땅에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53). 이를 보고 성질 급한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 다른 사람이면 그래도 참겠는데, 사마리아인들에게 멸시를 당하니 너무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 오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55).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예루살렘에 고난받고 죽임당하러 올라가십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자기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가십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인생들을 섬기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며 서로 다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다른 사람들도 용납하지 아니합니다. 용납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자기를 영접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하려고까지 합니다. 이로 볼 때 정말 누가 어린아이인가 싶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이런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어린 아이와 같은 그들을 내치십니까? 함께 가는 것이 부끄럽다며 멀리 하십니까?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그들을 계속 영접하십니다. 지금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는 그런 어린 아이와 같은 그들이지만 언젠가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꾼으로 변화될 것을 소망하시면서 그들을 계속 섬겨주십니다. 굳게 결심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의 지고 묵묵히 예루살렘으로 오르십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이 예수님으로 인해 어린아이 같은 제자들도 거듭나고 변화되어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주의 길을 따르는 주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제자들과 별로 다를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계속 믿고 따라가면 주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누구라도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어떤 어린 아이와 같은 이들도 낮아져 섬기고 포용할수 있는 그런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들로 빚어 주실 것입니다.

최근에 한 형제를 돕다가 제가 여러번 그를 실족시킬뻔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 형제가 어린아이가 아니라 바로 제가 어린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형제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가 저를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어린아이 같은 저를 예수께서 그동안 어떻게 감당해주시고 섬겨주셨는가 생각하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주께서 왜 이런 저에게 양들을 맡겨주시는가 생각하니 놀라웠습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조금을 알게 된 것 같았습니다. 어린 아이를 섬김을 통해 예수님은 제가 누군지를 알게 하시고 바로 보게 하십니다. 제 속에 참된 사랑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또 어린 아이 같은 저를 영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할 힘을 덧입혀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예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과 소망을 따라 계속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려는 자에게 무엇이라 하십니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57-62)

57절을 봅시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부르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더구나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이 사람이 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할까요? 제자들의 전도여행 이후,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후 예수님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대단한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대선주자가 급부상하고 당선가능성이 높게 되면 줄을 대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같이 이 사람도 예수님을 이 사람도 떠오르는 예수님께 줄을 대고자 했던 거 같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58). 여우는 떠돌이 여우라는 이미지가 있을 정도로 정처가 없어 보입니다. 이런 여우도 굴이 있습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도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머리 둘 곳은 안정된 터전을 말합니다. 돌아가서 쉴 수 있는 곳, 더 나아가 세력을 결집 할 수 있는 그런 본거지를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곳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큰 뜻을 품었다면 더더구나 이런 곳이 있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 곳에서 사람을 모으고 세력을 키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집을 짓고 터전을 만들어서 사람을 모으고 세력을 키우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 것을 기대하고 나를 따르는 것이라면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59절을 봅시다. 이번에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합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이런 그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이 부모의 장례를 치루는 것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를 장사하는 일은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뒤의 죽은 자는 이해가 되는데 앞의 죽은 자는 누구입니까? 육신은 살아있으나 근본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영접하고 생명을 얻지 못하면 누구나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이 중요하고 그 일을 우선해서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아닌 산자인 제자들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살리는 일입니다. 죽음이 가득한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는 일입니다. 제자는 바로 이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그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일을 우선해서 감당해야 합니다.

61절을 봅시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옵소서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62). 소에다 쟁기 메어 사람이 쟁기를 잡고 밭을 갑니다. 그런데 쟁기를 잡은 그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어떻게 됩니까? 밭고랑이 똑바로 갈리지 않습니다. 삐뚤삐뚤해집니다. 그래서 쟁기를 잡았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앞을 보고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쟁기를 잡고 앞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왜 쟁기를 잡았음에도 뒤를 돌아보게 될까요? 아직도 남은 세상 미련과 욕심 때문일 것입니다. 또 과거에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후회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매여 버리면 목적지를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됩니다. 곧 구원과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작정함을 가져야 합니다. 뒤의 것을 잃어버리고 앞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마음에 굳게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십니다.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때때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와 다르지 않아 괴롭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더라도 이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믿고 계속 따를 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감당해 주신 것처럼 감당해 주십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기까지 빚어 주십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 믿음과 소망을 따라 어떤 때에라도 뒤를 돌아보기보다, 앞을 보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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