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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10강 정여호수아

누가복음 7:18-50

 

 

많은 죄 사함, 많은 사랑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누가복음 7:47)

 

 

예수께서 죽어가던 백부장의 종을 살리시고, 죽어버린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것 같은 세례 요한이 도리어 불신에 빠졌습니다. 이런 그를 예수께서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8-30)

18절을 봅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 곧 예수께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고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을 요한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자기 제자 둘을 예수께 보내어 무엇이라 물었습니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9,20) 세례 요한이 누구입니까?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준비한 자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알린 자입니다. 그런 그가 놀랍게도 예수님이 진정 그리스도가 맞는지를 묻습니다.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할까요? 제자들을 통해 소문으로 들려오는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오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 증거했습니다(누가복음3:17). 무너진 정의와 공의를 세우고 불의한 세력을 멸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자신이 지금 헤롯에 의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으니 예수께서 더욱 그렇게 해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21절을 봅시다. 마침 그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악귀 들린 사람을 많이 고치시고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엇이라 대답하십니까? 22절을 봅시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음 메시아 사역을 출발하시면서 하셨던 바로 그 내용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실 일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실 그이가 맞는지 아닌지 요한이 스스로 판단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십니다(23).

그러나 그렇다고 요한이 실족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고 하십니다(24). 또 왕궁에 있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도 아니라고 하십니다(25).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라고 하십니다(26). 기록된 말씀을 따라 내 앞에서 내 길을 준비한 자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27).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십니다(28).

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진짜 그리스도가 맞는지 물었다는 데서 도리어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믿음의 종들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미끄러질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인간적인 약점이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때에 어떻게 하느냐일 것입니다.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께 나아가 물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그때 예수께 나아가 자기 속을 있는 대로 드러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함은 정말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요한은 하나님앞에서 진실로 큰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일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모범답안을 제시해 주는 선구자입니다. 우리가 요한과 같이 내가 생각했던 예수님과 다르게 일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으로 인해 믿음이 흔들릴 그때, 예수께 나아가 자기 속에 있는 대로 물어야 겠습니다. 그리할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따라 우리로 실족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 각 사람이 어떤 불신의 때에라도 이 믿음으로 주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9,30절을 봅시다. 요한의 세례를 받은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하나님을 의롭다 하였으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리하였습니다. 이처럼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 곧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또 무엇이라 하십니까?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31-35)

예수님은 먼저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그 세대를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31). 32절을 봅시다. 그들은 장터에 앉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아니하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입니다. 33,34절을 봅시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안마시자 이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하더니, 예수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자 이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도 비난하고, 저렇게 해도 비난합니다. 무엇을 해도 반응이 없고, 또 반응을 했다고 하면 딴지만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기 때문입니다(35). 지혜는 그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에 의해서 그것이 옳다는 것이 드러나고, 입증됩니다. 받아들인 그 사람의 삶의 변화로 반드시 나타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함을 받을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36-50)
36절을 봅시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하고 비난했는데, 이 바리새인은 함께 식사하자고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37절을 봅시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여자는 무슨 죄를 지었을까요? 무슨죄인지는 언급되지 않아 알수 없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이 보고 단번에 알아볼 정도면 그 동네에서 공식적인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향유 옥합을 가지고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눈물로 적셔진 예수님의 발을 자기 머리털로 닦았습니다(38). 여인에게 있어 머리카락은 영광의 상징입니다. 함부로 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또한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손을 대는 것도 꺼려하는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온 그 향유를 그 발에 다 부었습니다(38). 향유는 향기 나는 기름으로 당시에 매우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종종 여인들이 가지고 있다가 팔아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하는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이로 인해 온 집안 구석구석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39절을 봅시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영문법 시간에 가정법 과거는 현재 사실의 반대라고 배웠습니다. 곧 시몬의 말은 예수님이 선지자 일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합니까? 예수님은 여자의 과거를 잘 아실 뿐 아니라, 시몬의 마음까지도 아셨습니다. 이에 그가 묻지도 않으셨는데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면서 한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40).

41,42절을 봅시다. 빚 주는 사람에게 두 사람이 빚을 졌습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그런데 둘 다 갚을 것이 없어서 둘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곧 이는 대략 2년 동안 일한 연봉과 2달 간 일한 월급의 차이입니다. 결코 적지 않은 차이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시몬에게 물으셨습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을 받은 자입니다예수님은 시몬의 판단이 옳다 하십니다(43). 그리고 시몬과 여인의 행동을 대조해서 말씀하십니다.

44-46절을 봅시다.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해놓고 발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환영하는 입맞춤도 하지 않았고 머리에 감람유도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보통 손님에게 하는 그 의례적인 대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몬과 달리 여인은 발씻을 물이 아니라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 머리털로 닦았고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머리에 감람유를 떨어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이 둘은 얼마나 큰 대조가 됩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까?

47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이 말씀은 여자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많은 죄가 사함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여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용서의 조건이나 원인이 아닙니다. 용서의 결과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많이 사랑합니까?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는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가 예수께 받은 죄사함을 받은 양에 비례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죄를 많이 사함 받으려면 이 여자처럼 죄를 많이 지어야 하나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확실히 따르기 위해서는 세상에 나가서 화끈하게 죄를 짓다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주님을 섬기면 좋겠다고도 합니다. 정말 죄를 많이 지어야만 예수님을 많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누구보다 성실한 어부로 살았습니다. 특별히 큰 죄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한번 순종해 보고는 놀라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백하였습니다(누가복음 5:8). 시몬과 같은 바리새인 출신이었던 사도 바울은 어떠합니까?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디모데전서 1:15). 물론 그가 이렇게 고백한 것은 주님과 교회를 대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떠했습니까? 자신을 전혀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로 볼 때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 적은 죄를 지었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죄가 많고 적다기보다는, 죄에 대한 그 사람 자신의 인식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죄는, 물론 그 정도가  차이가 조금은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목숨 아니고서는 그 무엇으로도 대속함을 받을 수 없이 하나님앞에서 큽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는 결코 갚을수 없이 큽니다

사실 저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 자신이 그렇게까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름 착하고 성실하고, 또 사랑도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자로 살고자 할때 계속 한계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서 제 모든 밑바닥이 다 드러났습니다. 저는 양들뿐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조차도 실제로 사랑하지 못하고, 말로서 사람을 죽이는 자였습니다. 정욕과 혈기가 가득한 그야말로 괴수와 같은 자였습니다. 이는 의례적인 말이 아닙니다. 정말 저란 사람은  뼛속까지 죄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자신을 발견하면서 깜짝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감사하면서도 늘 죄송합니다. 받은 죄사함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괴로워서 눈물이 납니다. 너무 죄악되고, 연약하고 변화되는 것이 더뎌서 주께서 저를 쓰고 싶어도 쓰실 수 없다는 그 사실이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저를 예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48절을 봅시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미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왜 또 죄사함을 선포하시는 것일까요? 바리새인들 앞에서 그가 죄사함받았음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로써 그녀가 세상에서 정죄받고, 또 여전히 스스로 죄의식으로 고통하는 삶에서 벗어나 구원받은 자녀로 평안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분명 예수님 안에서 죄사함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죄로 아파하고 고통하고 두려워합니다. 그 받은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자신으로 괴로워합니다. 이런 우리의 속을 예수께서 아십니다. 그래서 다시금 죄사함을 선언해 주십니다. 이를 들려주시되 계속 들려주십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사함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도, 죄 때문에 다시 울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아시고, 이런 우리가 드리는 미약하고 부족한 사랑과 믿음까지도 다 받아주시는 예수님, 다시금 죄사함을 선언해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로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는 예수님이 계심에 감사합니다. 아멘! 

49절을 봅시다. 함께 앉아있던 자들은 속으로 말했습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로 사하는가하지만 예수님은 개의치 아니하시고 여인에게 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이같이 예수님께 받은 죄사함의 은혜가 커서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더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누립니다.

예수께 나아가는 자는 결코 실족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 예수께 믿음으로 나아가 많은 죄사함을 받고, 주님을 더욱 많이 사랑하는 주의 자녀로 생명과 복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예수님과 예수님이 주시는 죄사함의 복음이 증거되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아멘!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누가복음 7:47)

 

 

2022년 누가복음 9강 메시지 0718-0750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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