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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018.02.08 18:58

2018년 갈라디아서 5강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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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갈라디아서 5강                                                                                                  김요한

갈라디아서 5:1-26

 

 

성령을 따라 행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성령을 따라 행하라” 무슨 말씀일까요? 우리 속에는 육체의 욕심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 일용할 양식 모임에 가야 하는데, 추운 날씨에 꼭 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또 가지 않으면 목자님이 또 뭐라 하지 않을까 싶어 양식 모임에 갑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율법에 따른 믿음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심과 어떻게 싸워 나가야 할지 오늘 말씀이 전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하시는데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1-12)

1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삭과 같이 자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십니다. 이 때 종의 멍에는 율법의 멍에를 메는 것을 말합니다. 양식을 써야 하는데, 소감을 써야 하는데, 주일을 지켜야 하는데.. 하면서 멍에를 메게 됩니다. 이같이 율법에 메이게 되면 자유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괴롭게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성도들 가운데 믿음 생활 하는데 있어 무엇인가 확실한 표징을 가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할례를 받았고, 또 어떤 사람을 할례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가 말합니다. 2절을 봅시다.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여기서 “유익”은 무엇일까요? 3절을 봅시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그런데 율법을 행하는 것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함일 텐데, 이렇게 하는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 죄를 완전히 없이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은혜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곧 의롭게 됩니다. 그런데 율법을 행하고자 하면 은혜로부터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소망이 무엇입니까? 5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의의 소망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다 없이 하셨으니, 주님 다시 오실 그날, 곧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있게 될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죄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은혜로, 자신이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있을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믿음을 따라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성령으로”라 되어 있습니다. 왜 “성령으로” 일까요? 여기에는 사람의 의지로는 되지 않는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율법을 따르는 것은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지만,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알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알았습니까? 우리가 이를 알게 된 것은 성령의 은혜를 따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6절을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데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할례할거나 말거냐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드러나게 됩니다. 사랑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께서 나의 죄 값을 대신 치르셨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발견하였을 그 때 사랑이 드러납니다. 죄가 드러났을 그 때, ‘나가’ 라고 하는 것이 의를 세우는 사랑일까요? 허물과 죄가 드러났을 그 때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우리가 언제 아빠, 엄마가 원수같이 여겨집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부모님이 끈질기게 하지 못하게 할 때 엄마, 아빠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제 어떤 자매가 자신을 사랑해준 아빠 엄마가 감사하다고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듣는 우리가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아빠, 엄마가 이해가 안돼요’라 했습니다. ‘말이 안 통해요’라 했습니다. 무슨 말이 안 통하냐고 물었더니 당시 유행하는 아이돌 가수들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듣지도 못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빠, 엄마로부터 멀어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만 집 문을 쾅하고 닫고 나와보면 요즈음 같이 추운 날 다시 집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시 들어가기가 참 그렇습니다. 그럴 때 엄마가 폰으로 ‘들어와’ 하면 쓱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들어가면 또 아빠가 모른척 하고 ‘밥 먹었나’ 합니다. 그럴 때 사랑을 느낍니다. 아이들은 부모에 대해 별 말을 다 합니다. 그래도 부모들은 아이들을 한 결 같이 사랑합니다.

우리가 언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마음에 항상 담고 싶은가요? 무덤에까지 가져가고 싶은 죄를 예수께서 십자가 피로 다 없이 하셨다는 복음을 들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처럼 우리를 살려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누가 막아서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였습니까(7)? 할례 받아야 한다고 말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은혜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받아야 하는 고난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고난이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에게 할례 받고 그런 고난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권면은 그들을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8).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멸망에서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할례 그거 뭐 받으면 되지, 하나 하지 않으나 별 문제 없다면 받으면 안 되나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에 대해 갈라디아서는 분명히 증거합니다. 9절을 봅시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누룩은 작아서 사람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누룩은 그런데 밀가루 반죽이 들어가 크게 부풀게 합니다. 할례 받는 것아 적은 문제라 하여 받으면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10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그 복음 외에 우리를 살리는 복음 천하 인간에 없습니다(사도행전 4:12). 그런데 할례 받아야 한다, 다른 데서는 이렇게 한다, 유대교의 오래된 전통이다라고 하여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다른 마음을 품게 하고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의 겉과 속이 다른 간교한 뱀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형제들에게 증거 합니다. 11절을 봅시다. 자신이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박해를 받는가 합니다. 그가 할례를 전하였다면 그가 받는 고난의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극단적으로 말합니다. 그처럼 포피를 잘라야 한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음의 사람들을 어지럽게 하는 자들을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거세하기를 원한다 하였습니다(12). 할례 받는 것은 우리 믿음을 흐트러뜨리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은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라(13-26)

13절을 봅시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며 율법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할례로 뭐고 관계없이 자유다 하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유를 얻었는데, 이 자유를 함부로 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바 자유로 무엇을 하라 하십니까?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하십니다. 율법의 종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데 종 노릇하라 하십니다. 온 율법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습니다(14).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할례를 하고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 진짜로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이웃 사랑하기를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창세기부터 이웃과의 관계를 항상 말씀하라 하십니다. 사람이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혼자 하면 잘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외로워서 못 삽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혼자 살 수 없어서 친구도 사귀고, 장막 공동생활도 하고, 결혼도 하는데, 그 친구가, 장막 생활하는 그 사람이, 세상에 가장 골치 아픈 존재가 같이 사는 아내나 남편이기도 합니다. 아침부터 대판 싸우기도 합니다. 사랑하면서 왜 이러는가 싶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율법을 받은 모세가 그렇게 했습니다. 모세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오 나는 이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만났다’ 하고는 혼자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노예 백성 된 자기 백성에게 보내어 그들을 자유케 하는데 그를 쓰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함은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에 다 녹여져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은 사랑함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느냐 하면 대변을 누고는 항상 자기 것을 봅니다. 자기가 건강한지 않는지 확인합니다. 그런데 등산하다가 남이 눈 그것을 보면 ‘에이 더럽다.’ 합니다. 나의 것을 사랑하듯이 남의 것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친구의 그 허물이 사랑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베드로전서 4:8).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라한 열매를 먹은 사람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해주셨습니다(창세기 3:15).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 같이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기 하나 낳지 못하는 아내요 동역자인 사라를 그렇게 사랑해서 사라로부터 이삭을 낳았습니다.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제자들을 보고 저것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것이라 여기고 그들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은 지키지 않고 세상을 혼란시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잠자듯이 평안하게 죽는 것을 보고 큰 쇼크를 받았습니다(사도행전 7:60). 사람이 어떻게.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을 새로 다시 다 읽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어떤 형제는 예쁜 누나들을 따라왔고, 하늘같은 선배의 초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어떻든지 간에 와서 목자님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듣고 보면서 ‘여기가 사람 살만한 곳이다’ 싶어 계속 말씀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합니다. 그처럼 사랑하는 믿음의 가정들을 보면서 후배들도 믿음으로 결혼하고 행복을 누립니다. 모든 율법, 성경 말씀은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이 말씀에 다 요약하여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끼리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것입니다(15).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같이 16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볼 때, 우리 속에는 성령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 이 두 가지가 같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먹든지 말든지 사람이 판단하도록 하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신지요.

마찬가지로 내 마음 속에 성령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이 서로 다툽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17). 우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18).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선택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육체의 일은 얼마나 분명한지 보입니다. 19절, 20절, 21절을 봅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누가 이런 것들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들에 시달립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멀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 사도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계합니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다만 죄악 된 본성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행할 때 그 사람에게 열매가 맺혀집니다. 같이 22절과 23절을 읽어봅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서 눈 여겨 귀 담아 들어야 할 말씀은 “육체의 일”, “성령의 열매”라 표현 된 것입니다. 육체의 일은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성령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열매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단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할지 성령을 따라 행할지 결정을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있어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그 죄악 된 본성에 따라 육체의 욕심을 이루려 한다면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육체의 욕심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를 금지할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금지할 법은 없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처럼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증거 합니다. 같이 24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증거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함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비록 육체의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내 자신을 욕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확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데서 멀어지고 성령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25).

그렇지 않고, 26절을 봅시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영광이라고 찾았는데 실제로는 그 영광이 영광이 아니면 헛된 영광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헛된 영광을 구하면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볼 때, 성령을 따라 행할지,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할지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결단해야 합니다. 괜히 할례 받았다 하면서 율법 지킨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유업을 얻는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셨습니다(마태복음 7:22,23).

바울 사도는 율법을 따르면서 이를 알았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사랑의 사람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 15:10).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임 당하고 다시 살아나야 하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항변하였습니다. 자기도 그런 삶 살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의 길을 좇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아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못 박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령을 따라 행할 길을 전하였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하였습니다(사도행전 2:38).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성령의 선물을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까요? 회개하여, 내 마음의 실제 소망을 하나님 나라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헷갈릴 때마다 이 말씀에 따라 기도하면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확정하고, 성령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6)

 

2018 갈라디아서 5강 메시지 0501-0526 김요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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