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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인제·양산 여름수양회 4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23:34상)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성경이 답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 구원자, 왕이십니다.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기에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고 따랐습니다.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일으키시고, 세리를 부르시며,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정죄하는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시고,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은 진짜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들의 왕으로 따르기에 그야말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그들도 그런 의미 있는 생명 빛 사랑의 사람이 될 것을 소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괴롭히는 말씀을 늘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6:21, 17:12, 마가복음 8:31, 9:12, 누가복음 9:22, 17:25). 이 말씀은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 주요 왕으로 따르는 제자들도 그렇게 고난 받게 됨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마다 제자들은 딴 생각을 하고, 딴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3).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서에 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기록하고 증거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반대하고 자신들을 괴롭혔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렇게 기록하고 증거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심이 진실로 예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히 밝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 번 십자가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메시지를 전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냥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 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모를 때는 아는 말, 모르는 말 하게 되기 때문에 말이 길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말을 짧아도 그 뜻이 확실합니다. 제가 받은 바 은혜를 그대로 전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1-33)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한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 유대를 식민통치하던 로마 총독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 형에 처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체포당하자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마태복음 26:56, 마가복음 14:50). 우리가 십자가 말씀이 어렵다 여겨지는 것은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린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고난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싶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하신 대로 기도하고 성령을 받고 정신이 들었습니다. 스피릿이 제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정신이 든 이들은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미루어 살피고 예수께서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는지를 밝혀내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어떻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다고 증거합니까? 1절을 봅시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여기서의 무리는 유대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곧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식민지라 자기들 마음대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사형 집행권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오기 전에 유대 최고 의결기관인 공회에서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다며 신성모독 죄로 나무에 달려 죽어야 한다고 의결하였습니다(누가복음 22:70,71, 요한복음 7:49, 신명기 21:23).

빌라도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으로서 이미 이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백성을 미혹하고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로 한다며 예수님을 로마에 반역한 대역죄인으로 고발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도 재판관으로서 심문을 했습니다. 3절을 봅시다.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아셨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로 마음에 결정이 있었습니다. 이를 여러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때가 되자 두렵고 슬프고 고민되는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마음에 작정을 확실히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39, 마가복음 14:36, 누가복음 22:42). 어느날 갑자기 결정하신 일이 아닙니다.

빌라도는 예수께 죄 없다는 것을 알았고, 또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줄을 알았습니다(마태복음 27:18). 그러나 몇 번이나 죄 없다고 예수님을 놓고자 했고(4,5), 헤롯에게도 보내기도 하였고(5-12), 때려서 놓겠다고도 하고(13-16), 예수님을 유대인 명절 관례에 따라 풀어주고자 했지만 유대인 무리들은 엉뚱하게도 행악자 바라바를 원하였습니다(18,19). 빌라도의 기대와는 달리 무리들은 오히려 더 크게 소리 지르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였습니다(20,21). 며칠 전만 해도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열렬하게 환호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마태복음 21:9,15).

그런 무리들이 왜 이렇게 변하였을까요? 이들이 예수님과 무슨 원수가 졌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와 헤롯왕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다윗 왕국에 버금가는 영광스런 나라로 재현해 낼 것을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체포당하시고, 바리새인들이나 헤롯왕이나 로마 앞에 무력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의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큽니다. 이들은 성이 났습니다. 분노했습니다. 무리들, 진리가 없는 그들은 현실의 유익을 따라 바람 부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무리들의 요구에 졌습니다. 23절에서 25절을 봅시다.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겼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으로 지금으로 치면 아주 고위 관료입니다. 거기까지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자기부인과 희생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자신의 유익, 실리를 좇았습니다. 진리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를 그대로 행하면 이스라엘 땅이 시끄러워지고 자기 자기가 위태해질 것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 목수의 아들 유대인 한 사람의 목숨이 그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실리를 따라 진리를 버렸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적어도 빌라도 같은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착각일 뿐이었습니다. 한번은 주차를 하다가 다른 차를 살짝 긁었는데, 티도 안 나고, 연락처가 없고, 또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그냥 와버렸습니다. 다음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제가 뺑소니범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차주가 합의를 해주어서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제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오면 같은 선택을 하고 있을 제 모습이 너무나 눈에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저란 사람은 진리를 알더라도 결코 행할 수 없고 결국은 그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절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을 수밖에 없는 저의 실존을 제대로 인식했습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의 빛은 우리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우리의 어두운 속을 비춥니다. 드러냅니다. 대제사장들은 시기로, 빌라도는 실리를 따라, 헤롯 왕은 그저 즐기느라, 무리들은 자기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진리 앞에서 나는 어떻게 행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비추어진 주의 말씀의 빛을 받아 우리의 실제 모습이 어떠한지 돌아보고 자기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때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시고 예수님은 사형 집행을 당할 장소까지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가셔야만 했습니다. 26절을 봅시다. 그들이 예수님을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육신의 상태가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면서 나는 왜 십자가를 지는지, 내가 지는 이 십자가를 원래 져야 하는 예수님은 누구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하는 중에 그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사도행전 13:1).

27절을 봅시다. 예수님과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려 가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자신들이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저 슬피 울 일 밖에 없었습니다. 28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십니다. 장차 환난의 날, 심판의 날이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는 것은 복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환난의 날이 이르게 되면 어린 아이로 인해 더 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므로 오히려 아이 없는 자들이 더 복되다고 합니다(29). 또 그 날에는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사람들이 차라리 산 밑에 깔려서 빨리 죽기를 원하게 된다고 하십니다(30). 푸른 나무 곧 죄 없으신 예수님도 이 같은 고통을 당하시는데, 하물며 마른 나무인 죄인들이 당하게 될 고통은 얼마나 크겠느냐고 하십니다(31). 예수님은 자기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상태이시면서도 장차 그들이 당할 심판을 먼저 생각하셨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다같이 32,33절을 봅시다.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예수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갔습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 힐 해골이라는 곳이 이르렀고 거기서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행악자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달리심으로 죄인 중에서도 괴수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형은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을까 하여 고안해낸 극심한 고통의 형입니다. 벌거벗겨 십자가에 못 박아 나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낮에는 땡볕에, 밤에는 추위에 떨며 극심한 고통에서 죽어갔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편22:14,15)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어떻게 하셨습니까(34-46)

다같이 34절을 봅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예수께서 하신 첫 마디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너무 고통스러우면, 그 고통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가장 고통스러운 그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들이 누구입니까? 예수께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은 모든 자들입니다. 시기로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제사장, 실리를 위해 진리를 버린 빌라도, 자기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소리 소리 지르는 무리들, 그리고 도망간 제자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고 옷을 제비뽑고 나누는 군인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께, ‘너 자신을 구원하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놀라운 능력을 행하신 예수께서 큰 권능으로 이들을 다 벌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죄를 사하여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4-6). 그렇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시기 위해,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그 몸으로 친히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자기 정과 욕심을 따라 그릇 행하여 제 갈 길로 달려가던 우리 죄인들에게 평화와 나음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용서의 기도를 하고 있을 그 때에도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다같이 34하-37절을 봅시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차지하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은 서로 비웃으며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군병들은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38).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도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하였습니다(39). 저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는 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시는 용서의 기도를 듣고, 자기가 한 것을 알게 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다른 행악자였습니다. 다같이 40,41절을 봅니다. 그는 반대편에서 예수님을 비방하는 그 행악자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는 자신이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정죄를 받고 있는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보응임을 알았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행하신 일 중에는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을 위한 용서하기 위함임을 알았습니다. 이에 그는 염치없는 줄 알면서도 예수께 조용히 부탁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 그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4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죄의 첫 열매는 다름 아닌 십자가에 같이 달린 강도였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나는 너무 죄가 크고 또 많아서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불신합니다. 또 어떤 분은 반복해서 죄를 짓고는 절망하여 주님께 나아갈 용기를 잃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를 볼 때 어떤 죄악 된 사람도 구원 얻을 힘과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면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죄 가운데 있더라도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오늘 낙원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때가 제 육시 곧 정오 쯤 되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45).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커튼입니다.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의 육체를 찢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살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46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기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47-56)

47절을 봅시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십자가 사형 집행자로서 그동안 무수한 죄수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들의 입에서는 하나 같이 거친 욕설과 원망과 저주의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잠잠하였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 같은 저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용서의 기도를 하실 뿐이었습니다.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아버지께 내어 맡기셨습니다. 정녕 의인이셨습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양심이 깨어나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48).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고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49). 50,51절을 봅시다. 공회의원으로 조용히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힘과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두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은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54-56).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의 사랑을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이처럼 동일한 변화의 역사, 능력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의 사랑은 제게도 임하였습니다. 저는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싸우시는 부모님과 할머니로 인해 불우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나는 왜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 왜 매일 이런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가? 하며 한없이 부모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에 어머니께서는 결국 마음의 병을 얻어 정신까지 이상해지게 되셔서 더 이상 집에 계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부모님, 특히 아버지에 대한 저의 미움과 원망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로 인해 저 영혼은 늘 우울하고 슬픔과 고통가운데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의 영혼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같은 학과 친구를 통해 저를 UBF 모임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처음 참석한 봄 수양회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을 듣고 죄로 깊이 병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이 문제에서 놓임 받고자 하는 소망이 생겨 예수님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가을학기 창세기 성경학교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한일서 4:10)는 말씀을 듣고, 저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접하였습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저 같은 자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에게서 참된 사랑을 느꼈습니다. 이 사랑을 깨닫고 나니 불현듯 저는 저희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저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시기 위해 자신의 잘린 손가락 봉합수술을 포기하셨던 그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더니 눈물이 제 볼을 타고 흘려 내렸습니다. 제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들이 눈물과 함께 다 씻겨 내려가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후 저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캠퍼스 영혼들에게 전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풀타임 스탭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탭이 되었다고 해서 저란 사람이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예전의 습관을 따라 은밀하게 정욕을 즐길 때가 많았습니다. 거룩하게 자신을 지키는 일에서 번번히 실패하고 절망하였습니다. 매번 똑같은 문제로 넘어지고, 실제로 저 한 사람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 주의 역사에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힘이 빠져 드러누워 버릴 때도 많았습니다.

특히나 올해 초 일대일로 섬기는 목자와 언쟁을 벌이며 다투고, 또 목자님에 대한 반발심으로 주일 예배메시지가 끝난 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다 자기 몸을 자해하는 짓을 하였습니다. 센터를 나오며 저는 제 입으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목자님께 차마 입으로 주워 담을 수 없는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았습니다. 제 부러진 손목의 뼈처럼 제 모든 신앙생활도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날 저녁 목자님이 저의 집으로 찾아와주셨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고, 손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용서를 빌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돌아와 주의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저 자신에 대해 계속 정죄하고 자책하는 마음,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십자가 메시지를 섬기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린 용서의 기도를 계속 묵상하면서 제 마음속에 남아있던 모든 죄의식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새롭게 경험했습니다. 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고통 할 수밖에 없는 저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용서의 기도를 끝까지 감당하시고, 완전히 죽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십자가에서 이미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모든 죄의식과 두려움, 정죄감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언제나 주와 함께 낙원에 있길 기도합니다. 이 시간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십자가 용서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주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극심한 고통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다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용서의 기도를 실제로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라도 그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아 심판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 주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죄 가운데 있더라도 이 예수께 믿음으로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주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 빛, 사랑을 충만히 받아 죄를 이기고 능히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누가복음 23:34상)

 

4강 2017 0715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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