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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을수양회 주제 2강 이다윗

열왕기상 19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열왕기상 19:12)

 

축구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버리는 것을 봅니다. 어떤 선수는 아예 드러눕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다 태워 버린 것입니다. 일명 Burn out입니다. 그런데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고, 전반전밖에 안뛰었는데 burn out이 되면 곤란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burn out은 누구에게나 어느 때라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엘리야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엘리야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런 엘리야를 하나님이 어떻게 도와주실까요?


로뎀나무 아래에서(1-8)

1절을 봅시다. 아합 왕은 이후 어떻게 합니까? 그는 여호와께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내 이세벨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달려가서는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미주알 고주알 보고하였습니다(1). 마치 큰 형들에게 연신 두드려 맞고,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는 아이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이를 보면 아합은 한 나라를 책임져야하는 왕이지만 실제로 왕이 아니라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실세는 따로 있었습니다. 이세벨입니다.

그러면 아합의 보고를 듣고 이세벨은 어떻게 합니까? 2절을 봅시다. 그는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며 이같이 이릅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정신을 차릴 만도 한데 그녀는 더욱 악해졌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그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했습니다(3). 어디까지 도망했습니까? 북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남유다의 남쪽 국경지역인 브엘세바까지 갔습니다(3). 거리로는 160km입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거기에 자기 사환을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남쪽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더 갔습니다(4). 더 달아나고 싶어도 달아날 힘도 없고, 달아날 곳도 없었습니다. 그때 한 로뎀나무를 발견하고 그 아래에 가서 주저앉았습니다. 보통 로뎀나무하면 우리는 큰 나무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뎀나무는 그 가지나 잎이 빗자루(Broom)같이 가늘게 뻗어 햇빛을 잘 막아주지 못하는 키 작은 떨기나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로뎀은 최악의 고통, 시궁창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갈멜산의 영웅이 광야의 작은 나무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서 겨우 햇볕에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런 엘리야의 모습은 정말 궁색하고 처량합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한심했던지 그는 하나님께 구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4) 그러고는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잠듭니다(5).

이처럼 무기력해진 엘리야를 보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죽음도 보지 않고 불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라고 해서 대단한 줄 알았는데, 그냥 우리랑 비슷한 평범한 사람같아 보입니다. 현실의 벽 앞에 힘을 잃어버리곤 하는 우리 같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힘을 잃어버립니까? 언제 도망치고 싶습니까?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내 자신이나 상황이 바뀌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그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바알에게 도전하여 싸웠고, 이제 북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종교는 끝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목숨만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여 넉넉하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이쯤했으면 되었으니 차라리 자기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자신이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조상 누구와 비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엘리야의 마음가운데 절망과 자학이 가득합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탈진해 버린 것입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은 어떻게 도와십니까? 5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리고는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준비하여 일어나서 먹으라하셨습니다(6). 이에 엘리야는 그 떡과 물을 먹고는 다시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6).

저는 엘리야를 이번에 새롭게 읽으면서 참 재밌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청 훌륭한 선지자라서 안 이럴 줄 알았는데, 제가 떼쓸 때의 모습 너무도 흡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천사를 또 보내어 그를 어루만져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7) 이에 엘리야가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릅니다(8).

여기까지 보았을 때 엘리야는 그냥 아무데나 도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와 하나님 사이에 문제가 생겼고, 엘리야는 그 문제를 들고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광야로 나가 하나님과 씨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에서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지친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다독여 주셨습니다. 계속 씨름할 힘을 얻었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힘을 내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남쪽으로 350km40일 밤낮을 걸었습니다. 이 호렙 산은 모세가 떨기나무(3:4) 가운데서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바로 그 산입니다. 곧 현재 그가 하나님 만나는 것을 가장 기대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만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뭐라도 따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은 어떻게 만나주셨습니까?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9-21)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한 엘리야는 한 굴에 들어가 그곳에서 머물렀습니다(9). 이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십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9)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지금 엘리야 너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0) 눈물이 날 만한 엘리야의 보고입니다. 그러나 이 보고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갈멜산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또 엘리야는 오바댜를 통해서 선지자가 상당수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엘리야의 마음에는 죽도록 고생하면서 주를 위해 충성을 다했지만 남은 것은 도망자가 된 것뿐이라는 손해심정이 가득합니다. 나는 지금 이렇게 개고생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아무일도 안하신다는 쏘리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도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만 남았다는 생각, ‘가 그렇게 열심이 유별하였는데 남은 현실은 목숨이 위태위태한 이 상황은 뭔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이런 생각에 자주 시달립니다. 저도 열심이 유별하여 사회에서의 해야할 일보다 교회 일을 더 중시하였습니다. 그 어떤 모임보다도 우선시하여 해외학회 중에도 혼자라도 토요일과 주일에는 돌아왔습니다. 요회와 양들을 위하여 많은 시간과 돈을 남김없이 썼습니다. 꾸준하게 맡은 청소를 하였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맡은 부서에서 해야할 일을 찾아서 하고, 악기연주도 하고 찬양도 하였습니다. 주업이 목자인 것이 저의 영광이요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이 유별하였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별로 열심인 것 같지도 않고, 자기 살길 찾아가는 사람들이 성공하고 더 잘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허무해지고, 시기하게 되고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까먹으셔서? 하나님은 불의하셔서 일까요? 자기 의로움, 곧 교만에 있습니다. 여러 가지 죄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류의 죄는 잘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스스로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어느 순간 가 한 것, ‘의 열심이 앞서 있습니다. 이럴 때에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연민과 자기 의에 눈이 가려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산에 가서도 끊임없이 자기 굴을 파고 들어가, 거기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다같이 11,12절을 한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엘리야는 하나님이 폭풍과 지진과 불 속에서 나타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폭풍이 불어 우상의 졸개들을 날려버리고, 지진이 일어나서 천지를 뒤집어놓고, 불이 붙어서 거짓되고 음란한 것들을 다 태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일대 개혁의 바람이 불고 혁명의 불이 붙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목숨을 내놓고 유별나게 일했습니다. 이일에 자신을 불태웠습니다.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는 당장 사회변혁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힘이 솟구쳤고 그는 아합의 마차 보다 빨리 달렸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자기 목숨만 위험에 빠졌습니다. 그는 그런 현실이 두려웠고 영적인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 따지기 위해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가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폭풍과 지진과 불 속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세미한 소리, 속삭이듯 조용한 음성으로 계셨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듣고 그제서야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섰습니다(13).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먹이셔도 다시 드러눕고, 나가서 서라 했을 때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 가운데에서도 굴 속에 계속 있었는데,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듣고 그제서야 그가 나가 섰습니다. ‘세미하다매우 가늘고 작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산과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가운데에도 계시지 않고, ‘지진가운데에도 계시지 않고, 매우 가늘고 작은 세미한 소리로 엘리야에게 임하셨습니다. 그 세미한 소리로 하나님은 똑같이 물으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13) 이에 엘리야는 다시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4) 앞의 10절 말씀과 정확하게 똑같습니다. 엘리야도 한 고집하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주저리 주저리 신세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직도 그의 마음에 문제가 해결이 다 안 되었습니다. 어째 실망되십니까? 그런데 이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면, 말씀을 통해서 뭔가 하나님을 인식하면 단번에 문제가 싹 해결된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전히 불평이 남아있고, 우리의 절망의 뿌리가 쉽게 뽑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뭐가 달라질까요? 그것이 작은 전환점이 됩니다.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그 작은 경험이 씨가 되어서 조금씩 마음의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고 조금씩 에너지가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엘리야도 그러했습니다. 그가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주의 일을 섬기다가 burn out 된다는 것은 무조건 힘들어만 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만큼 열정적으로 살았고, 다 불태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힘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우십니다.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조금씩 일어나게 도우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봅시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15-17)

이것이 엘리야가 듣기 원했던 대답일까요? 모르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기대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바알교와 이세벨을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로 멸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를 통해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제자 삼는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물론 예후가 이스라엘 왕이 된다는 말은 곧 아합과 이세벨 정권이 교체된다는 것을 말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사이다처럼 시원하진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큰 소리치는 사람이 이기는 것 같고, 큰 기적이 있어야 교회 역사가 부흥하고 믿음도 생기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기에 우리 귀가 듣기에 그럴 뿐입니다. 내 눈에 보기에 바뀌지 않고 답답하게 상황이 돌아가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선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이를 믿음으로 그 다음을 준비하도록 하십니다. 악을 심판하는 일을 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왕들을 세미한 음성 따라 준비하게 하시고, 그 다음 선지자가 될 제자를 양성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오직 나만 남았다는 엘리야의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비로소 해주십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우상으로 가득찬 북 이스라엘에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외롭고 힘든데....이대로 혼자서 더 이상은 못하겠는데...아직도 남은 자가 있다고 하십니다. 자기만 유독 열심히 일하고 있는줄 알았는데 사실 하나님은 더 열심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엘리야가 그동안 해온 모든 수고, 특히 갈멜산에서 했던 그 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어쩌면 이 말씀이 엘리야가 하나님께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위로와 소망의 말로 들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는 요즘 혼자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사업을 하면서 제품이나 서비스를 팔아 수익을 내기위해 많은 사람들을 웃는 얼굴로 만나지만 모든 책임을 최종적으로 홀로 짊어져야한다는 부담감이 구석에 있습니다. 이건 그래도 할 말이 없는데, 더 마음 아픈 것은 교회에서 교회에서의 일을 주업으로 생각하고 열심을 내보지만 아무도 함께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질 때 허무하고 힘이 빠졌습니다. 늘 나 혼자인 것만 같았습니다. 힘을 내볼려고 했지만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메시지를 엉겁결에 맡아 억지로라도 말씀을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쁜 가운데서도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제가 받은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를 잔잔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 들려주셔서 제가 인생요절로 잡은, 그렇지만 저는 까먹고 살고 있는 세미한 음성이 제게 이미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18, 9,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동안 제 나름대로 주를 증언함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바울 선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고난 받는 것이 너무도 행복할 것만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에 따라 그렇게 했는데, 결국 나만 손해보고 끝나는 것 같은 마음이, 이렇게 계속살면 안되지 안을까? 하는 마음이 제 속에서 피어 났습니다.

고난을 받는 것을 인생요절로 잡아놓고, 조그마한 고난에도 잘 참지 못하고 포기하려는 것은 뭘까요? 그런데 사실 그 고난 조차도 하나님의 복음과 함께하는 고난이 아니었고 내 잘못된 열심으로 인한 고난이었습니다. 헛된 의로 교회 일만 중시하고 대학원 일은 소홀히 하여 박사과정을 4년이나 했는데, 졸업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의 교만으로 다른 동역자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겼고, 여호수아목자님과 싸워서 주일 메시지를 듣기가 싫었습니다. 학사목자모임에 가는 것조차 두려워졌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큰 좌절 가운데서도 제가 그래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버틸 수 있었고, 씨름할 수 있었고 조금씩이나마 다시 일어 설 수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볼 때 다른 것이 아니라 그래도 제게 심겨진 말씀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지금도 자기를 부인하고 어찌어찌 받아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냥 내 열심으로 고난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해야 함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점점 나의 행위대로 되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임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세미한 소리로 임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볼 수 없는 시야와 넓이로 변화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 가운데 일을 하고 계셔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이 일은 언제 봐도 작게,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고전1:18).

다같이 9절을 봅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엘리야는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신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 일을 하러 가기보다 자신의 후계자 엘리사를 만나러 가는 일부터 하러 갑니다. 너무 외로워서 하나님이 남겨두신 동역자를 만나고 싶었던 걸까요? 그런데 가서 보니 엘리사도 보통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열두 겨릿소를 가지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24마리의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신은 열두째 겨릿소, 23,24번째 소와 함께 있었습니다(19). 열두지파를 능히 감당할 인물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습니다(19). 이 행위는 자신의 직위를 다른 사람에게 승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엘리사는 이를 바로 알아들었는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합니다(20). 이에 엘리야가 허락하자,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들었습니다(20,21).

 

엘리야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폭풍과 지진과 불과 같은 역사를 꿈꾸다가 현실의 벽에 막혀 좌절하고 불신에 빠졌습니다. 이런 때에 그는 다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그리할 때 그는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다시 힘과 소망을 얻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안에서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때 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 어떤 절망의 때에라도 다시 말씀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매순간 주께서 들려주시는 세미한 음성을 따라 힘을 얻고, 믿음을 새롭게 하며, 사람 살리는 하나님의 일에 계속 도전하고 쓰임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안에서 우리의 수고를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시는 산 소망의 하나님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시작.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열왕기상 19:12)

 

 

2023년 가을수양회 주제2강 메시지 열왕기상 1901-1921 이다윗.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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