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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9 17:03

2017년 누가복음 12강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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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12강 김요한

누가복음 6:1-19

 

 

열둘을 사도라 칭하셨으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누가복음 6:13)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살면서 늘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결혼을 앞두고,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졌는데 인간성이 좀 그렇고, 인간성을 좋은 데 직장이 시원찮고, 두 사람 중에 어떤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옳은가? 이는 한국 드라마의 변하지 않는 주제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새 부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질문이 늘 생깁니다. 어떤 목자님은 말씀에 따라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람 살리는 일에 쓰임 받고 싶은데, 거기 더하여 말씀역사에도 힘을 다하여야 하겠다는 압박도 받아서, 그래서 과로사 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하였습니다. 과연 과로사 하더라도 둘 다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인지, 적당한 선에서 둘 중에 하나를 끊어버려야 할지, 어느 것이 옳은지 이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두고 캠퍼스에 올라가 처음 보는 형제자매를 만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서 답을 찾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묻습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1-11)

1절부터 봅시다. “안식일에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일곱 째 쉬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창세기 2:2,3). 그래서 안식일에 쉬어야 합니다(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일라 하셨습니다(출애굽기 31:13, 35:2).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든 안식일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구수한 밀이삭냄새를 맡고는 참을 수 없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습니다.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떤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고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2) 제자들은 하고 밀 이삭을 씹던 입을 갑자기 멈추고 얼어붙은 채, 예수님을 쳐다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3절을 봅시다.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예수님은 제자들이 시장해서 한 일이라고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밥도 제때 챙겨 먹지 못하고 배가 고픈지를 아셨습니다.

실제로 신명기 말씀에는 지나다가 밀 이삭을 손으로 잘라 먹는 것은 해도 되는 일이지만, 곡식밭에 낫을 대고 마구 베지는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신명기 23:25). 배고파서 남의 밭에 이삭은 좀 잘라 먹어도 된다고 하는 이 말씀에 제게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제가 초등학교 3학년 가을 어느 날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목도 마르고 배가 고파서 눈에 띄는 무 하나를 빼서 껍질을 이로 벗겨 먹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의 밭 무에 손을 대었다는 것 때문에 양심에 가책이 있었는데, 신명기 이 말씀을 읽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4절을 봅시다. 다윗이 시장한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끄떡없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하는 통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것은 추수, 손으로 비빈 것은 탈곡, 비비어 먹은 것은 음식을 준비하는 일, 곧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출애굽기 34:21). 이 어떤 바리새인들의 눈은 날카로왔고, 말은 매서웠습니다. 제자들의 온 몸을 굳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장할 때 한 일로 제자들을 말씀에 따라 변호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5절을 봅시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인자,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안식일이 진실로 어떤 날인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6절을 봅시다. “또 다른 안식일에안식일은 일주일마다 돌아옵니다.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셨습니다.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 사람의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았습니다(7). 요즈음 같으면 스마트 폰으로 찍으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8). 예수님의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아십니다.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하셨습니다(8). 어디 구석에 가서 살짝 고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다 보이는 한 가운데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께서 그들, 안식일에 예수님이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가 엿보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9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하셨습니다. 당연히 안식일이든 아니든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고 율법 조문을 만들었습니다. 이 조문에 따르면 안식일에도 고칠 수 있는 병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산모가 출산 중이라면 안식일이라도 출산을 도와야 했습니다. 또 전염성이 강한 눈병이라면 고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손 마른 이 사람은 굳이 안식일에 고치지 않아도 될 병자로 분류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이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고치시면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긴다고 율법을 어긴다고 할 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무리를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하셨습니다. 손이 말라도 손을 내밀 수는 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어떤 교수님은 그 오른 손을 거의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악수를 하려고 사람들이 손을 내밀면 왼손을 내었습니다. 어색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분은 거의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이나 아니든 이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마른 손이 움직여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께서 네 손을 내밀라하시자, 그가 그 손을 내밀었습니다. 평생 손이 말라 어둔하여 사회생활하기가 어려운 그에게 예수께서 손을 내밀라 하시니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앞에서 중풍병자를 예수께 달아 내리기 위해 기와를 벗긴 그 사람들의 믿음을 예수께서 보셨습니다(누가복음 5:19,20). 그리고는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고 그를 말씀으로 일으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손 마른 자를 보시고 그냥 바로 가셔서 그에게 손을 대시고 낫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앙에 서게 하시고, “네 손을 내밀라하시고, 그가 내밀자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의 역사에 믿음의 사람을 쓰십니다.

우리가 무엇이 옳은가 생각할 때 그 옳은 것을 찾아 행하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볼 때 무엇이 지혜입니까? 누가는 무엇이 과연 지혜인지에 대하여 예수님을 증거 한 많은 사람들의 증거를 읽고 진실로 지혜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미루어 살피는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공개적으로 그렇게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시자 노기가 가득하였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어찌하여를 넘어서서 이제는 노를 발하였습니다. 분노한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안식일이든 어떤 날이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 일일 것입니다. 중풍병자, 세리, 손 마른 자. 더러운 귀신들린 자들이 그 시대에 그렇게 많았던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법을 지켜야 된다.’ ‘안식일에는 법대로 해야 한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하니 이 사람들이 눌렸겠습니까? 한 손 마른 자는 계속 한 손 마른 채로 있어야 했습니다. 기회가 왔어도, 그 사람이 낫는 것 보다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마비 된 사람,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헷갈려가지고 더러운 귀신이 들리는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어느 것이 옳으냐 물으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노기가 가득했습니다. 그 시대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나 답답해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12-19)

12절을 봅시다.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앞이 꽉 막힌 것 같고, 너무나 답답하고 고쳐도 고쳐도 끊임없이 예수께 몰려오고, 안식일 시간도 아까운 이때에 지도자들이란 사람들이 안식일에 사람 고친다고 노기가 가득하니. 진실로 무엇이 옳은지 예수께서는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낙심되고 절망되는 그 때에 예수께서는 낙심하지 아니하시고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누가복음 18:1).

밤이 새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날이 밝아왔습니다. 13절을 봅시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두울 때 기도하시고, 밝아지자 일하십니다. 밝을 때에 끙끙거리고 어두운 때에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두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방이 막힌 것 같고, 이러다 과로사 할 것 같고,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 우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할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옳은지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어두운 세상이 빛으로 밝아오는 것처럼 우리에게 밝은 빛이 임합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무엇이 옳은지를 확신하셨고,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먼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셨습니다. 열둘을 택하신 주권은 예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제자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고,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율법 조문에 매여 어찌하여하는 그들로 인해 너무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이들을 대하여 진실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을 양성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아직은 이들을 사도라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사도,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후 그들이 기도하고 성령을 받고나서입니다.

예수님은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예수께서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역사가 과연 어떠한지를 보이시고, 그들을 보고 따르게 하셨습니다. 율법에 담긴 뜻을 알고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열둘을 택하셨습니다.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한 지파에서 100명씩 한 1,200명 부르시면 좋았을 텐데 예수께서는 열둘을 택하셨습니다. 적은 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함께 하고 섬기고 성장시킨다는 것은 엄청 힘든 일입니다. 아기 한 명을 기르느라 우리나라 부모들이 온갖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세 명의 남자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착하고 아름다운 엄마도 아이들에게 뭐야하고 고함을 지르게 됩니다. 남편에게 전화하여 빨리 내려와 내 혼자 어떻게 하라고하게 됩니다.

자기 아이 몇 명 키우는데도 이리 힘드는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손가락 넣어봐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한 줄 알겠다 하고, 사람들 먹이라 하면 열심히 계산하고는 돈이 모자라 안 되겠다고 하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엉뚱한 소리하는 사람들. 서로 누가 크냐 다투고, 급기야는 스승인 예수님을 돈 몇 푼에 팔아넘기는 이 사람들을 일일이 함께 하고 섬기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열둘은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열둘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섬기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보내시고자 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14절에서 16절을 읽어봅시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이들은 대부분 갈릴리 시골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와 세계 유수한 기관들은 대부분 이름 있는 대학졸업생들을 선호합니다. 안타깝게도 지방대 학생은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로사할 정도로 열심히 해도 별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보았을 때 갈릴리 시골 사람들을 예수께서 부르시고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이들의 직업은 어부가 대부분입니다. 그럴 듯한 직업은 사람들이 매국노라 부른다 할지라도 돈은 괜찮게 버는 세리였습니다. 이 중 한 사람은 로마에 열심히 저항했던 열심당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신자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 사람들 보기에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본성대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예수님의 주권으로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새 부대들입니다. 묶은 부대에 머물러 있는 바리새인들과 전혀 다른 새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해 예수님으로 인해 분명한 답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열두 사도에 포함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로마서 1:1).

그래서 예수께서 이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가 되는 사람들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같이 평범한 열둘을 택하시고 사도라 칭하시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17절을 봅시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내려오셨습니다. 평지에 서셨습니다. 평지에는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있어 고침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해결할 것이 많은 곳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이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9절을 봅시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었습니다. 예수께로부터 능력이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열둘을 택하셔서 그들을 사도라 칭하여 그들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쓰시고자 하십니다. 이들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고 실제로 사람 살리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들로 인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능력은 예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물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대로 살고자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자칫 조문에 매여 안식일에 일하지 않아야 한다면서 실제로 사람 살리는 일에는 손놓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귀찮아서 일까요?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이에 집중하여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일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을 쓰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임을 통해 선교사님들이 미국, 독일, 영국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미국, 독일, 영국의 유수한 대학을 졸업한 지성인들이 한국 선교사들에게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들 현지 목자들이 말하기를 한국 선교사들은 말씀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엉뚱한 일 하지 않고, 가정을 지키며, 복음역사를 위해 실제로 섬기는 삶을 사는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분들은 예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구나 하며 따릅니다. 아프리카 우간다 대학졸업생들은 우수한 학생들입니다. 이들도 선교사님들이 사는 것을 보고, 이제는 자신들이 헌신하는 목자들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게 하는 것은 외식하는 신앙입니다. 그 사람이 능력이 있든 없든 지혜롭든 어리석드 능력은 예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믿고 때마다 말씀으로 돌아가 기도하고 주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 주의 역사에 쓰임 받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말씀을 듣고 받아 부르심에 응하고 예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는 사람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 살리는 일에 쓰임 받습니다. 아멘. 우리 각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이 생길 때마다 주의 말씀을 듣고 받아 부르심에 응하고 예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사람 살리는 일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누가복음 6:13)

2017 누가복음 12강 메시지 0601-0619 김요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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