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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19.05.07 07:46

2019년 창세기 8강 메시지(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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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8 강                                                                                                                        김요한

창세기 9:18-11:26

 

 

바벨탑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세기 11:9)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받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계시긴 계신가?’ ‘계시다면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세상이 점점 악해져가고 자신이 믿음으로 하는 일은 별로 힘이 없다고 여겨질 때 더욱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에 의해 망해가던 시절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하박국 1:13) 이는 하박국 선지자뿐만 아니라, 지금 창세기를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드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박국이 가진 질문에 답을 했을까요, 하지 않았을까요? 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창세기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오늘 본문은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언약을 받은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9:18-29)

18절부터 봅시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였습니다.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19).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있었습니다(20,21).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일백이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방주를 지어 그와 그의 온 가족, 그리고 방주에 들인 모든 숨 쉬시는 동물들을 구해낸 당대에 완전한 자, 노아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였을까요? 우리가 보기에 실망스러운 모습입니다. 긴장이 풀어졌을까요? 방주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모든 숨 쉬는 것들이 다 홍수에 쓸려간 현실을 보고 그만 허무에 빠졌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한 가지 확실히 읽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대에 믿음이 완전하여 방주를 짓고 구원을 얻은 노아라 할지라도 그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악할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어려서부터 악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실제 삶이 어떠한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어떠했습니까? 22절부터 봅시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이를 알게 된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습니다(23).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았습니다(24). 사람이 술이 취했다 하더라도 다 압니다. 다 알게 됩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알게 된 노아가 어떻게 했습니까? 25절에서 27절을 봅시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였습니다.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악한 노아라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준행한 의인이었습니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잠언 15:29).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습니다(28,29). 그 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바벨(10:1-11:9)

101절부터 봅시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입니다. 곧 홍수 후에 사람들이 살아간 모습입니다.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야벳의 아들들은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습니다(2-5).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인데, 그 중에 용감한 사냥꾼 니므롯도 있었습니다(6-9). 그의 나라는 시날 땅 바벨로부터 시작되어 앗수르, 니느웨 같은 큰 성읍이었습니다(10-12). 함에게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도 나오고(13,14), 가나안 땅 족속인 시돈, , 여부스, 아모리, 기르가스, 히위, 알가, , 아르왓, 스말, 하맛 족속이 나왔습니다(13-18). 그들의 땅에 유황불 심판을 받는 소돔과 고모라도 있었습니다(19-20). 그리고 셈은 야벳의 형인데 그들의 자녀들이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에서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 살았습니다(21-31). 32절을 봅시다.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습니다.

111절에서 9절까지는 이들이 어떻게 나뉘어졌는지를 전합니다. 111절을 봅시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습니다. 한국 사람이 영어, 중국어 같은 외국어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온 땅의 어떤 사람과도 말이 다 잘 통하였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살기가 편했을까요?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사람들의 말이 나라마다 다 달라졌을까요?

2절부터 봅시다. 말이 하나인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 넓은 평지를 만나니 아 여기가 살기가 좋다하고는 더 이상 가는 것을 멈추고 거기서 눌러 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말했습니다. “,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을 찍어내어 돌을 대신하여 물들어가는 틈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벽돌 사이로 물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완전한 방수를 하였습니다(3). 그들의 선조 때에 홍수 심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홍수에 잘 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무지개를 보이시며 언약을 하셨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역사의 교훈에 따라 홍수에 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되, “,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하였습니다(4). 이들이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이유는 홍수에 대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목적도 있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세계에서 다섯 번 째로 높은 빌딩이 있습니다. 지상 123, 높이 555m에 이르는 타워입니다. 아흔이 넘어 이 타워를 지은 사람이 꼭대기 층에 휠체어를 타고 올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평생의 숙원사업을 이루었다고. 그래서 이름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지금 열심히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높은 탑을 쌓아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가득하여 번성하라 하셨습니다(9:7). 그런데 사람들은 서로 뭉쳐서 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습니다(5). 하나님께서는 저 하늘에서 이렇게 그냥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지 않으십니다. 현장에 와서 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6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하셨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고 정보가 통하면 하지 못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구글에서 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슈퍼컴퓨터 몇 대를 동원하여 바둑게임에서 뛰어난 직관을 가진 프로 바둑선수를 이겼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하셨습니다(7). 하나님은 언뜻 보기에 심술쟁이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사람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습니다(8).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같이 9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하심으로써. 흩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도록 복을 주셨습니다(창세기 1:28).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탐탐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자기들이 뭔가 힘을 발휘하여, 슈퍼컴퓨터 몇 대를 동원하는 그런 집단 지성의 힘을 빌려 모든 하나님의 심판에 대응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이로써 사람이 하는 일은 헛되고 헛되니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됨을 실감하도록 하셨습니다(전도서 1:2).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원하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셈의 족보(11:10-26)

1110절부터 봅시다. 창세기는 셈의 족보를 따로 기록합니다. 셈의 족보는 이러합니다.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습니다. 노아의 아들 셋 중에서 셈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낳고, 그 아들들이 또 아들들을 낳았습니다(11-26).

그래서 누구를 낳게 되었습니까? 24절을 봅시다. 나홀이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습니다. 그가 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면 자녀를 낳았습니다(25). 그리고 같이 26절을 읽어봅시다.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여기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나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가 데라입니다. 데라는 셈의 후손입니다. 셈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님을 경외하여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던 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 후에 새롭게 말씀역사를 시작하시면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을 계속 지키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을 쌓고 있는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셈의 자손들을 통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적으로 일하십니다(에베소서 1:11).

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믿음을 가지고 지키는 일입니다. 노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어려서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악한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대로 말씀대로 준행한 것처럼. 셈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처럼. 말씀을 들었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사람이 할 일입니다.

믿음을 지키면 반드시 열매, 믿음의 열매가 맺힙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고 자기 이름을 내어도 하나님께서 이를 다 보시고 흩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구원의 방주를 짓도록 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후에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을 볼 때, 여기에는 어떤 약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심을 창세기 11장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15절의 그 말씀이 자취를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아들 셋 중에 셈을 통해 이를 이어가고 계셨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1장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하면서.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가 성경 말씀입니다(히브리서 11:6).

어떻게 우리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냥 보이는 바벨탑을 쌓는 것이 공든 탑을 쌓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형제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들로부터 삼강오륜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는 그동안 파출소에 한번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성경 말씀을 읽고 받아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미국 자매를 결혼상대로 소개 받고, 한영사전을 들고 가서 ‘One sinner, one sinner meet together, love is endurance’ 하였습니다. 번역하면, ‘죄인 한 사람, 죄인 한 사람이 만나,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하였습니다. 이를 그 자매가 알아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여러 준수한 형제들을 소개 받았으나 거절했던 그 자매가 이 형제의 순전하고 성실한 마음을 보고 결혼상대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은 아이 셋을 낳고 미국 워싱턴에서 선교사로 잘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분들을 소개한 선교사에게 어떻게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을 결혼상대자로 소개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 보입니다.

보이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여 하나님께 호소하는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사도 바울은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하였습니다(로마서 8:24).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진실로 믿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6,17) 그래서 보이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았던 바울 사도는 어떤 보이는 것도 다 배설물로 여기고 개의지 않았습니다(빌립보서 3:8). 사람들의 인정,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공들여 쌓는 바벨탑, 전혀 개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0:22)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이때 견딘다는 것은 믿음을 계속하여 가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들 조상들이 본 홍수를 막기 위해 높이 탑을 쌓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주심을 믿음으로 어떤 별별 일들이 내 곁에 일어난다 할지라도 끝까지 견디는 것이 믿음임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고 자기 이름을 내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 싶은 때가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맨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만 지다가 내 존재는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1:40). 마르다에게 믿음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십니다. 지금도 일하십니다.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자기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고자 바벨탑을 쌓지만, 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셔서 사람을 처음 복 주신 그대로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이를 위해 지금도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지키는 사람을 하나님의 역사에 쓰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아간다 하더라도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 계심을 믿는 믿음을 지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세기 11:9)

 

2019 창세기 08강 메시지 0918-1126 김요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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