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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9.02.05 23:03

2018-2019 사도행전 7강 메시지(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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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 사도행전 7강                                                                                                             김요한

사도행전 9:1-31

 

 

내 이름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사도행전 9:15,16)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의 이름입니다. 그는 예수님 제자들을 핍박하다가 갑자기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잘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가까웠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사람 변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변하되 아주 갑자기 변하였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자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고 당혹스러웠겠습니까.

사울이 어떻게 그렇게 변화되었습니까? 그 계기가 무엇입니까?

 

빛이 그를 둘러비추는지라(1-9)

1절을 봅시다. 사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스데반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였습니다(2).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었습니다(2).

사울은 참 열심이 특심하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했습니다(갈라디아서 1:4). 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따르는 그의 입장에서는 율법에 정해진 안식일도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하고, 할례도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오직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고 하는 그 사람들은 율법에 저주 받은 자로서 죽여 마땅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살기가 등등한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는데, 홀연히 사울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3). 이는 사울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이때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에 그가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방향을 주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하시니(6),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7).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8). 마치 우리가 성경을 읽기는 읽지만 무슨 뜻인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지 않을까요. 율법을 따라서 진실로 제대로 살고 싶은 사울이 살기가 등등하여 주의 제자들을 잡으러 갔을 때 홀연히 그가 박해하던 예수께서 그를 둘러싸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눈은 떴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그는 할 수 없이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8). 사울은 사흘 동안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9).

얼마나 사울이 고민이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던 사람들 중 스데반은 죽었고, 이후에 그 사람들이 다 흩어졌는데, 예수님의 빛이 그를 홀연히 둘러 비추고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하셨으니 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자신의 그동안의 신앙생활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 과연 예수님은 누구신지? 너무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때 아나니아를 통해 그에게 주님의 메시지가 전하여졌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택한 나의 그릇이라(10-)

10절을 봅시다. 그 때에 보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먹지도 아니하는 사울에게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를 보내셨습니다. 주께서 환상 중에 그를 불렀습니다. “아나니아야.”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나니아는 주께서 그를 불렀을 때 바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곧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하셨습니다. 사울이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며 그가 한 일은 기도였습니다. 얼마나 그가 답답했을까요? 왜 예수께서 그렇게 자신을 만나주시는지? 그때 주께서 아나니아를 쓰셨습니다.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하시니(12),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하였습니다(13,14). 아나니아도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고, 그 사울을 만나라 하시니 두려웠습니다.

이때 주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15절을 우리 같이 읽어봅시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주께서 부르셨을 때 언제든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대답하는 아나니아에게, 그러면서도 사울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아나니아에게 주께서 가라하십니다. 왜 가라 하십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이 사람, 주의 제자들에 대해 살기등등했던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예수님의 그릇이라 하셨습니다.

그릇은 뭔가에 쓰임 받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오늘 점심에 김밥을 먹으려 해도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릇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접시, 간장종지, 큰 대야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고자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영생, 곧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함입니다(요한복음 17:3). 이를 위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대해 살기등등한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이방인, 이방이라 하면 다른 나라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족속으로 알았습니다. 그 외의 민족은 다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은 다른 나라였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옳다 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입니다(로마서 1:18-23).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셨습니다(로마서 1:24-32). 유대인들은 이같은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겼습니다(요한복음 15:6). 그 이방인에게 예수께서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바와 같이 천하 만민이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마가복음 16:15, 사도행전 1:8).

또 임금들을 위해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임금. 왕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다못해 학교에서 모듬장을 해도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자들, 왕들은 권력을 가졌으니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뭐라고 하면 감히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왕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아기들도 자신을 왕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임금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예수께서는 임금들, 또 스스로 왕으로 여기는 그 사람들도 구원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이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서, 할례를 행하였고, 안식일을 지키며 율법을 행함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집이 세었겠어요. 얼마나 율법을 지키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힘이 들어갔을까요.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해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 이름을 전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그 살기가 등등한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그릇으로 쓰시고자 하십니다. 이방인, 임금들,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고, 이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이를 위해 부활하셨고,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누가 되었든지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여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이 그릇으로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같이 16절을 읽어봅시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아나니아가 이 말씀을 듣고서 그러면 가야지 했을까요. 16절 말씀을 볼 때 하나님 모르고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이방인, 권력을 가졌으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임금들,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고 생각하는 고집 센 이스라엘 자손들, 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고난입니다.

이로 볼 때 예수께서는 사울이 그만한 그릇이 되어 있음을 이미 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그릇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지극한 열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없애야 한다고 살기등등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딱 맞는 그릇이었을까요. 사울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고난을 능히 감당할 딴딴한 준비된 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니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하였습니다(17), 아나니아는 예수께서 전하라고 하신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18). 그는 예수께서 자신을 왜 택하셨는지, 예수께서 자신을 어떻게 알고 계신지, 자신에게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었습니다(18, 19). 음식을 먹고 강건해진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었습니다(19).

사람이 살아가면서 알고 싶은데, 알기 힘든 것이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으며, 그래서 나는 이 땅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몰라 가지고 하는 일이 게임하고, 술 퍼마시고, 그리고 자고 또 자고, 때로는 자신을 건드리는 사람에게 왜 그래하며 대들고, 그렇게 살다가 인생을 다 보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내 자신이 이 땅에 있게 되었으며, 그래서 무엇을 나는 해야 하는지, 이는 모든 사람들의 궁금증이고, 풀어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사울은 그동안 율법을 잘 지켜 행하면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굳게 믿어 왔습니다(빌립보서 3:15,16). 그러나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스데반은 그렇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얼굴이 평안하게 잠들 듯이 죽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핍박했던 예수님이 그를 둘러싸서 그에게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런 그에게 아나니아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으며, 이 땅에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들려졌습니다. 사울이 사흘 동안 끙끙 앓았던 그 문제가 확 풀렸습니다.

사흘이었습니다. 어떻게 사흘 만에 이렇게 깨닫게 되었을까요? 그야말로 그는 준비된 그릇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바리새 교육을 받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있게 되는지 그대로 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연애할 생각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고린도전서 7:7,8).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거룩한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을 때 그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요? 아침에 일용할 양식하고, 소감 쓰고, 일대일하면 제자양성이 되는구나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정과 욕심에 시달리고, 아무리 율법을 지킨다 한들 내 마음 속에 자유가 없는 것이 발견될 때, 이렇게 신앙생활해서 과연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나의 진짜 인생목표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실제로 이런 문제들로 인해 이세들이 믿음을 버리기도 하고, 이상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야말로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둘러 비추어,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그릇으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이를 들었을 때 그는 힘을 얻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습니다(20,22).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하였습니다(21).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였습니다(22).

그래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다소로 보내니라(23-31)

여러 날이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23,24).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렸습니다(24, 25).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26).

이때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였습니다(27). 주님께서 사울을 둘러싸시고, ‘내가 너를 이렇게 불렀다, 그러니 이렇게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나니아를 쓰셨고, 또 바나바를 쓰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람에게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할 때 증인이 필요합니다. 마리아에게 믿음의 선배 엘리사벳이 있었던 것 같이, 사울에게는 자신에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28),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였습니다(29). 인문학과 철학에 능통한 헬라파 유대인은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가 길어진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헬라파 유대인들의 그 수많은 질문들을 다 감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울은 헬라파 유대인들과 충분히 토론하고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 힘썼습니다(29).

형제들이 알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습니다(30). 다소는 사울의 고향입니다(사도행전 22:3). 거기서 자라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가서 그가 무엇을 하였을까요? 예수께서 그를 만나고 나서 그는 예수께서 주신 말씀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돌아온 것은 자신이 예전에 했던 것처럼 죽임을 당할 위협에 처하였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할까요? 과연 이 길을 가야 하는지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는 말씀에 따라서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율법이 아닌 예수님을 만난 그는 성경을 다시 읽었고, 그는 예수님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행전 후반 부의 바울이 되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31).

예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장 극심하게 핍박하는 사울을 부르셔서 예수님 이름을 전하는 그릇으러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주의 역사에 그를 쓰심으로 온 교회에 평안이 오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볼 때 사울이 어떻게 그렇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열심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나하고 생각이 다르다 해서 그 놈을 죽여 버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안 보면 그만이지 합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율법을 지키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하였고,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에 대해 살기가 등등하였고, 잡아 죽이기도 하고, 결박하여 옥에 넘겼습니다(사도행전 22:4). 이런 사울을 예수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를 둘러쌌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만나시고 부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예수님의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열심이 있는 자를 주께서 쓰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택하시는데 있어 탁월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른 아침에 말씀 들으러 나온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다가 빈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들을 보시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누가복음 5:1-12).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인생에는 돈이다 싶어 사람들로 욕을 먹으면서도 세리가 된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그 특심한 열심을 보셨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열심을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에 열심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는 율법, 하나님께 나아가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예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애를 쓴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께서 그를 만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뭔가 제대로 하려는 사울을 예수께서 아시고 그를 만나셨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데서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고난이 필연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이 고난 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죽음도 불사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는 열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의 방향, 무엇을 위한 열심인지가 바뀌었습니다. 성전과 율법을 지키는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열심입니다. 그의 답답한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죽음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로마서 11절에서 5절은 예수께서 사울을 만나셔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그릇으로 택하셨음을 바울 사도 스스로가 밝힙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입니다(로마서 1:4). 그로 말미증거합니다(로마서 1:5). 이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로마서 1:2). 그가 다소에 내려가서 성경을 읽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위해 내가 있는지 진실로 알고 싶다면 바울 사도와 같이 말씀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열심을 가지고 제대로 행하는 사울을 만나시고 부르셔서 주의 이름을 전하는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사울이었던 바울 사도 같이 무엇을 하든지 제대로 행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여,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주의 그릇으로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사도행전 9:15,16)

 

2018-2019년 사도행전 7강 메시지 0901-0931 김요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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