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INJE UBF

메시지

갈라디아서
2018.01.28 19:01

2018년 갈라디아서 4강 메시지

조회 수 20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2018년 갈라디아서 4강                                                                                                   김요한

갈라디이서 4:1-31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라디아서 4:28)

나를 누구로 아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약혼자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이 잠도 제대로 못자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하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하고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그의 아내로 데려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마태복음 1:18-25). 우리 중에는 학사 목자 한 분이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유일한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여 듣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감동은 후배 형제 목자들이 결혼을 믿음으로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 대구에 있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다니는 또 다른 학사목자는 매주 금요일 저녁에 김해에 와서 주일 저녁 또는 월요일 아침에 대구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그의 고향집에 매주말 무슨 일이 있는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할까요?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확실히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1-7)

1절을 봅시다. “내가 또 말하노니” 바울 사도는 하였던 말씀을 또 전하고 또 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고 또 읽습니다.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유업을 이을 자는 비록 어릴지라도 그 사람이 상속자요 주인입니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항상 다루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속자요 주인이라 하더라도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라 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2절을 봅시다.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습니다. 어리기 때문에 후견인이 필요하고 청지기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습니다(3).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전에는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초등학문”은 NIV에 ‘basic principle of the world’라 번역되었습니다. 세상의 기본적인 원리, 원칙이란 뜻에서 초등학문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아주 원시적 믿음의 대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연숭배를 뜻합니다. 큰 돌에다 빌기도 하고, 보름달이 뜨면 빌기도 합니다. 초등학문입니다.

어렸을 때는 크게 보이고 뭔가 있는 것 같은 것에 종노릇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같이 어렸을 때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율법은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말라 합니다. 아주 명백하고 따르기 쉽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팀 프로젝트 과제가 주어지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뭔가를 결정하는 역할보다는 쉽게 시키는 일만 하려 합니다. 사람에게는 그런 종된 본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것이 편합니다.

어린 갈렙을 보게 되면 ‘안돼’ 하게 됩니다. 차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갈렙이 막 가기 때문입니다. 미리 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율법은 해야 될 일, 하지 말아야 될 일이 정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우리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4절을 봅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율법 아래 있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보통 예수님 하면, 예수님과 율법은 완전히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할례 할 팔일이 되었을 때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행하였습니다(누가복음 2:21,22).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5절을 봅시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속량이란 종된 자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 값을 치르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율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율법 아래 있으셨습니다. 곧 율법대로 하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그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리시는 그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로마서 13:10).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요한복음 3:16). 예수께서 우리 모든 죄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속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습니다. 6절을 봅시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율법 아래 모든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빠” 저의 막내는 무엇이든 필요하면 제게 언제든 ‘아빠’하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복입니다.

어떤 점에서 복입니까? 7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종과 아들은 확실히 다른 존재입니다. 종은 새가 빠지게 일을 해도 그 기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아들은 그가 어떠하든지 기업을 유업으로 받습니다. 종과 아들은 그처럼 확실히 다릅니다. 성경 말씀은 율법의 종된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이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렇게 은혜를 받고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웠습니다.

 

수고한 것이 헛될까(8-11)

8절을 봅시다. 그러나 그들이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9) 바울 사도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이었습니다(10). 다시 원시 종교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생명을 얻었는데도 이같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려 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는 마치 우리가 주일예배에 오면서 날을 지키듯이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삼가 주일을 지키고자 나올 수 있습니다. 삼가 아침 기도모임을 지킬 수 있습니다. 종 된 마음으로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일예배와 양식모임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습니다. 주일예배에 나오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러 오는지, 아니면 율법적으로 단지 날을 지키기 위해서 오는 지가 문제입니다. 율법적으로 오게 되면 헛되고 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헛될 뿐입니다(11).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헛수고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바울 사도는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려 합니까?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12-20)

12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 사도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인 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바울과 같이 되기를 구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처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바울의 욕체의 약함으로 말밈암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13). 아마도 바울의 눈이 약하였던 것 같습니다(15하). 그러나 그들은 바울에게 그들을 시험할만한 연약함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바울을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습니다(14).

그토록 훌륭했던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 율법의 종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봅시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안타까운 토로입니다.

16절을 봅시다.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질책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으니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 한다고 그들이 바울 사도를 원수 같이 여겼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바울과 원수가 되게 한 그들이 있었습니다. 17절을 봅시다. 그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그들과 바울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열심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할례 받아야 하나님 나라 유업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하였습니다(18).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들을 위하여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고자 합니다. 19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바울 사도의 목적은 그 갈라디아 성도들의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어떤 형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고통 하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때 사람들이 내려오라, 네 자신을 구원하라 하는데도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형상을 이루기까지 바울 사도가 그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고자 합니다.

이로 볼 때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을 버리고 율법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무엇일까요? 자신이 감당하여야 할 고난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감당하기 보다는 차라리 율법대로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를 같이 할 때 내가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이 왜 그렇게 피하고 싶습니다. 결정하면 그 즉시로 다른 팀원들로부터 욕을 먹기 쉽기 때문입니다. 욕을 먹기 보다는 욕을 하는 입장에 서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욕받이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되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성도들이 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해산하는 수고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으로 인해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까지 이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라도 그들과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한다고 하였습니다(20상). ‘그래 가지고 되겠느냐!’ 큰 소리로 야단치고 싶었습니다. 이는 그들에 대하여 의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20하). 그런데 문제는 언성을 높인다고 되지 않습니다. 목소리 높인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씀에 따라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21-31)

21절을 봅시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율법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습니다(22).

23절을 읽어봅시다.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종은 하갈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른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래가 불임이라 칠십오 세가 되기까지 아들도 딸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었을까요! 그런데 말씀을 따른 지 십년이 지나도 별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기르는 종 중에서 상속자를 삼겠다고 하나님께 일종의 데모를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뭇별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이를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창세기 15:2-6). 이를 믿은 아브라함이 한 일은 그의 아내 사래는 여전히 불임이니 아브라함과 사라 열심히 논의한 결과 사래의 종인 하갈과 관계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육체를 따라 이스마엘이 났습니다. 육체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삭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하셨을 때 도저히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와 약속은 확연히 다릅니다. 육체는 내가 생각할 때 가능한 것이고, 약속은 내가 생각할 때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서 육체를 따라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믿음이 생겼을 때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왜 율법으로 돌아가고자 했을까요? 약속은 잘 보이지 않고, 불가능하게 보이는데 육체를 따라 되는 율법은 눈에 잘 보이고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를 풀어주셨습니다. 24절을 봅시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이 여자들은 두 언약입니다.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입니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입니다(25상).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율법에 종노릇 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25하).

26절을 봅시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사라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27절을 봅시다.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습니다. 자유한 여자 사라로부터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바울 사도의 결론입니다. 28절을 읽어봅시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이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마엘이 아닙니다. 29절을 봅시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하였습니다. 이삭의 돌잔치 때 열세살이 넘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혔습니다(창세기 21:9). 그처럼 당시에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율법을 따르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쫓아내라 하셨습니다.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합니다(30).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31)

이로 볼 때 우리가 내쫓김 받을 이스마엘로 자신을 알 것인지, 약속의 자녀 이삭인지 확실히 해야 합니다. 당장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육체를 따라 산다면 내쫓김 받을 이스마엘이 될 뿐입니다. 이런 헛된 일을 우리가 해서야 되겠습니까? 당장이 아니라 멀리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디까지 멀리 보아야 합니까? 끝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 끝 날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썩어질 몸으로 영원한 형벌이 처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같이 약속의 자녀로 우리 자신을 분명히 한다면 하나님 나라 상속자입니다.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입니다(로마서 8:17). 이는 자녀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사도행전 14:22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는 세상에 사는 것이 고난이요 환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그 죄악 된 본성대로 이스마엘과 같이 이삭처럼 약속을 따라 사는 사람을 괴롭힙니다.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눈에 보이는 데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약속을 붙드는데서 오는 고난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로마서 8:24)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복음이 우리로 하나님 나라 유업을 잇게 하십니다. 이 약속을 어느 때에라도 붙들고 믿음으로 살면 그 사람은 주님 다시 오실 그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약속의 자녀임을 때마다 확정하고, 율법에 매여 전전긍긍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들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빛과 사랑을 누리고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라디아서 4:28)

 

2018 갈라디아서 4강 메시지 0401-0431 김요한.hwp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