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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2.04.03 12:31

2022년 봄수양회 메시지(이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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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봄수양회 메시지 이다윗

누가복음 5:17-32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32)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한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또 세리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시고 아십니다. 이 예수님이 보시고 아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17-26)

 

17절을 봅시다.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습니다(17). 바리새인은 분리된 자, 거룩한 자를 뜻하며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생겨난 무리를 가리키는데 이들 중에 말씀을 가르치는 율법 교사가 많았습니다. 성경 중심의 유대 사회에서 이들은 사회 지도층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지방의 촌 동네 갈릴리,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주변 갈릴리 각 마을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중심지 유대 지역과 그 수도 예루살렘으로부터 모여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17).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18절을 봅시다.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습니다. 아마도 나병환자를 고치셨다는 소문을 그들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 때문에 그를 예수께로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하였습니다(19). 예수께 나아 가고자 할 때 사람들이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저도 대학교 들어와서 예수님 믿고 좀 제대로 살아보려는데 사람 때문에 방해를 받아 분노하고 힘들어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중풍병자를 침상 째로 메고 온 친구들은 사람들을 탓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째로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19). 지금처럼 예배 중에 천장의 타일이 벗겨지고 침상이 이 가운데로 내려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행동은 엄청난 민폐입니다.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든 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살길부터 찾는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그들의 이기적인 것 같은 행동에도 예수님이그들의 무엇을 보셨냐는 것입니다.

다 같이 20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20)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보신 그들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뭘 못한다 라는 생각이 들 때 포기하지 않고 길을 계속해서 찾은 것입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14:6).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지배당하지 않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어떻게 축복해 주셨습니까? 20절을 다시 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이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온 것은 중풍병을 치료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도 나병환자에게 먼저 손을 대심으로 먼저 그의 마음의 병부터 치료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중풍병을 치료하기에 앞서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의 병의 근본 원인이 에 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가 뭘까요? 죄란 국어사전에서는 양심을 벗어난 행위, 벌 받을 만한 일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요한복음 16:9),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레위기 26:15)을 말합니다. 이 죄에 대한 대가, 벌이 반드시 있는데, 그 중 보여지는 하나가 병인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로마서 6:23)이라고도 하며,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라”(히브리서 12:4)고 할 정도로 죄에 대하여 엄중합니다. 이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만이 진정으로 병이 나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병에 걸렸다고 해서 다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뜻이 있습니다(요한복음 9:3).

그러면 어떤 사람이 죄사함을 받습니까? 사실 믿음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가만히 누워 있는 한 중풍병자가 받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이라 하셨으므로 중풍병자에게도 믿음이 있었을 것으로 봐야겠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라 예수께로 데려다 주는 걸 도와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 곧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동역자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과 도움을 받을 줄 아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몇 사람일지도 모르는 그들, 동역자들의 작은 믿음을 믿음으로 봐주시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도해야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아직 중풍병자였을 때에 여러 믿음의 친구들에 의해 통째로 들려서 예수님께 나아와 죄 사함을 맛 본 자입니다. 저 자신은 대학교 4학년 내내 다른 사람 탓하고 믿음으로 뭘 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제 주변에 어찌하든 말씀 따라 살아 보려고 하는 작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고, 저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 갈수 있었습니다. 도움을 받아서 나오든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께로 나아오는 자를 예수님은 알아봐 주십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죄사함을 주십니다. 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21절을 봅시다.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22,2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의 속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십니다.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어느 것이 쉽습니까? 둘 다 어렵습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왜 물으실까요? 다 같이 24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예수님은 속으로 불편해하는 바리새인들을 위해 친히 자신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자, 곧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를 어떻게 드러내셨습니까? 중풍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심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중풍은 불치병입니다. 이 중풍병자를 양쪽 뇌의 뇌졸중에 의한 사지마비로 봤을 때, 이 사람이 일어나 온전히 걸을 확률은 0%에 가깝습니다. 제가 박사과정을 하면서 제가 만든 재활로봇을 적용해본다고 뇌졸중 환자 분들을 많이 만나봤는데 편측마비에 한해서 잘해야 절뚝거리며 걷는 것 정도까지 재활이 되지, 온전히 일어나 걷는 사람은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이미 죽은 뇌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시자,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25).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였습니다(26). 지금의 의학 수준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 자신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중풍병자와 같았던 제 인생에도 찾아와 일하셨습니다. 저는 남 탓을 잘 합니다. 지금도 다른 사람의 허물이 너무 잘 보여, 탓하고 싶은 마음이 잘 차오릅니다. 그러면서 정작 몸도 움직이지 않는, 게임 중독에 빠져 사는 중풍병자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로 몰려든 그냥 무리 중 한 명보다도 못한 자였습니다. 처음엔 이쁜 누나들 따라서 이 곳에 왔고, 그 다음엔 맛있는 거 사주고 잘해주니까 왔습니다. 좋은 말 많이 해주시니까 배울 건 배워야지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을수록 저 자신이 많이 온전해져 갔습니다. 대학교에 들어와 뒤 늦게나마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는 로봇공학자의 꿈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서워 말도 못하고 피하는 제가 이제는 대화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5:8)는 말씀과 같이, 내 죄를 사하신 그 예수님의 사랑을 맛보았습니다(23:34). 이 죄사함의 은혜는 제가 예상하지 못한 뜻 밖의 선물이었지만 제게 있어 이제 이 세상의 어떤 가치 있는 것 중에도 가장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한번 맛보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고 끝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합니다(벧전2:2).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의 기록은 지금까지 중풍병자는 아니었으나, ‘방향이 없었던 세리 레위의 이야기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27-32)

27절을 봅시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예수께서 무엇을 보셨길래, 그를 보시고 바로 나를 따르라하셨을까요?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레위의 그 속을 보셨습니다. 따를 준비가 된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한테나 나를 따르라하지 않습니다. 준비된 사람을 부르십니다.

세리는 세금을 거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특히 당시 세리들은 정해진 세금에다가 좀 더 거두어 자기 몫으로 챙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식민지 상황에서 이러니 동족들에게는 미움을 받았습니다. 공식적인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세리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돈에 환장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내면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뜻합니다. 돈이 최고였던 그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돈을 따르는 삶이 진정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레위의 마음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하시며 따를 바가 되어 주십니다. 이에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습니다(28). 그 많은 성경의 글들 중 단 한 줄, 그 중에 나를 따르라하시는 예수님의 한마디로 레위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가 곧 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를 따를 정도로 그의 마음에 기쁨과 확신이 넘쳐났습니다. 나중에 레위는 마태가 되었고, 마태복음을 쓸 때 이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태복음 13:44) 레위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돈에서 천국으로, 예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또 그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29절을 보겠습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먼저 레위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예수를 위하여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동료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도 초청하여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돈이 많고, 시간이나 건강이 있어도,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예수를 따를 때’, ‘예수를 위할 때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본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30절을 봅시다.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하였습니다. 그들은 죄인과 밥먹으면 자신들이 똑같은 죄인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마치 부정한 나병환자와 접촉하여 자신들도 같이 부정해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다 같이 31,32절을 한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2) 예수님은 죄인을 병든 자로 보십니다. 치료하면 얼마든지 건강하게 할 수 있는 자들로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는 길을 그들을 회개 시키는 것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2) ‘회개란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세리 레위가 이것을 했습니다. 회개의 열매로 다른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병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신을 건강한 자로 여겼습니다.

저는 현재 백수로 수입이 없습니다. 퇴직금으로 받은 돈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받는 대학원생 월급으로 어떻게 먹고 살기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한 만큼 딱 채워주심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외부적으로 드러날 때는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좋진 않습니다. 그래서 힘을 다해 말씀 읽고, 운동 하고, 다시 공부를 하며, 의료로봇을 개발하는 기업가가 되고자 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호수아 목자님은 내가 시간이 많은 줄 알고 자꾸 뭘 시키는 것 같아 힘이 들었습니다. 저는 규칙적으로 뭔가를 하기를 좋아하고 또 그렇게 했을 때 만족하는 성향입니다. 한 형제님과 일대일 말씀공부를 수년 째 매 주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이 약대 시험공부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집중한다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이때 스스로 , 곧 오겠지, 와야 다시 내 시간을 좀 내주지.’ 생각했습니다. 코로나로 대면을 철저히 금지했을 때나, 어쩔 수 없이 사용하던 Zoom을 이용한 온라인 말씀공부는 애초에 제 방식(Style)에는 없었습니다. Style에 안 맞으면 끝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지 않는 그 형제님이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은 오히려 부자유해져 갔습니다. ‘난 잘못한게 없는데 왜 이러지?’

말씀을 봤을 때 저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스스로를 건강한 자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과 반대되어,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멀리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찌 이런 일을 하냐고 했던 제가 어찌 이렇게 된 걸 까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2)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저 같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고 스스로 건강한 자라 자부하는데 원인이 있었습니다.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큰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럽더라도 스스로의 병든 모습을 인정하면, 병든 자, 죄인 한 사람의 그 마음을 정확히 보시는 의사, 예수님이 먼저찾아와주십니다. 나중에 마태를 포함한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사도행전 3:19)

새롭게 되는 날을 바랍니다. 저의 죄된 모습을 똑바로 보기가 언제나 힘듭니다. 그렇지만 낫고 싶습니다. 제가 저의 병듦을 깊이 깨닫고, 예수께서 부르러 오실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라 새롭고 온전한 삶, 기쁨으로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저 자신이,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감사합니다. 만약 의인을 부르러 오셨다면 아무도 나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갈 때 능히 일어서게 하시고 죄 사함의 권세가 있으신 예수께서 죄 사함을, 구원을 맛보게 하십니다. 병들고 길 잃은 자 한 사람을 불러 산 소망이 있게 하십니다. 우리 각 사람이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으며, 또 따름으로, 나음을 받아 일어나 걸으며, 나와 같은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누가복음 5:32)

 

 

2022 누가복음 5강 메시지 0517-0532 이다윗.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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