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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여름수양회 준비 특강 이다니엘(남아공)

마가복음 2:18-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22)

저는 2012년 5월에 남아공 프리토리아로 파송되었고 작년 9월 프리토리아를 떠나서 요한네스버그로 이사하여 제이콥 선교사와 레베카 선교사가 있는 비츠UBF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역사에 동참하면서 마가복음 2장 22절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순종하고자 애쓰면서 깨닫는 바가 많았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그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18,19)

예수께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시자 그 영향은 아주 컸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고 귀신이 나가고 병자가 나음을 받고 죄인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사방에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 대하여 핍박도 시작되었습니다. 2장 14-17절에서는 세리 레위가 구원을 얻은 기쁨에 겨워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이고 동료 세리와 죄인을 초대하였는데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와서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런데 오늘 말씀 18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또 다른 문제로 예수께 와서 따집니다. 18절을 봅시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성경에 의하면 일 년에 한번 7월 10일 속죄일이 되면 금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BC 586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민족적 각성을 위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 또 페르시아의 학살을 면한 날을 기념하는 부림절 등 1년에 4차례씩 금식했습니다.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나라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신앙생활을 좀 한다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금식했습니다. 1년이 52주일이니까 일주일에 두 번이면 100일이 넘도록 그러니까 1년에 거의 1/3에 가깝도록 금식한 셈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도 그랬고 바리새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금식이 신앙생활의 척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일인데도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죄인으로 낙인찍혀 출교당한 자들과 함께 떠들썩한 잔치까지 벌였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유대사회의 율법과 전통, 그리고 신앙을 파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만히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따져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금식하지 않느냐?”

이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십니까? 19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아주 성대했습니다. 보통 일주일씩이나 잔치를 벌였는데 그동안에는 금식 일에도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혼인집에서는 잘 먹고 잘 즐겨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도 혼인잔치에서는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들어 제자들이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에 즉, 혼인잔치 집에 있기 때문에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신랑과 함께 있다는 말씀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신랑에 비유하신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62장 5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날의 기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이 신랑과 함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시오, 그들이 신랑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세리 레위는 신랑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입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은 그의 결혼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금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입니다(20).

그리스도를 만난 이 기쁨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21,22)

예수께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21).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2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새 포도주는 발효가 왕성하고 그 발효하는 힘도 대단합니다. 한참 발효과정에 있는 포도주를 병에 넣고 마개를 단단히 막아두면 병이 깨져버린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병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 대신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가죽부대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새 포도주를 오래된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래된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가 발효할 때의 힘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결국 가죽부대는 터져버리고 그 안에 있는 포도주는 쏟아져 버립니다.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쏟아진 포도주 또한 그러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죽부대도 버리고 포도주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넣습니다. 이것은 당시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 포도주”는 ‘예수님’ 또는 ‘그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복음에는 새 포도주와 같은 발효력, 즉 생명력이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켜 새 사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중풍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세리 레위를 성 마태로 변화시키는 감화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그 힘이 사람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복음이 마음에 들어오면 양심이 살아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참 마음이 아프고 괴롭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비천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하고 부르짖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임하십니다. 회개가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 사함의 은혜를 깨달으며, 감격과 기쁨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밝아지고, 눈이 환해집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용기와 의욕이 솟고, 사랑으로 충만해 집니다.

동양 의학에는 ‘명현현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Healing Crisis’라고 번역합니다. 침을 맞거나 한약을 먹을 때 가슴 속이 뜨거워지거나 등에 뾰루지가 나는 등의 고통스런 현상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현현상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여 치료를 포기하면 병이 나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복음이 들어와서 죄의 병이 치료될 때도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의 위기를 겪습니다. 이것을 종교심리학에서는 ‘Spiritual Crisis’라고 말합니다.

제가 대학 2학년 초 수양회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이 말씀에서 특히 ‘멸망’이라는 말에 절망했습니다. ‘아 나는 나쁜 놈 정도가 아니라 멸망할 놈이구나!’ 멸망이라는 말과 함께 수많은 죄악들이 뇌리를 스쳐갔고, 눈앞에서는 지옥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습니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심장은 멎어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또 다른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때 수양관 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스런 모습을 새겨놓은 십자가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 이제 나는 믿기만 하면 되는 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그 안도감 때문에 저는 그날 새벽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옆에서 우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는데 같이 울었습니다. 그날 아침 햇볕은 유난히 깨끗했고, 사람들이 모두 사랑스러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는 말씀이 ‘아 진짜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조금씩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죄 짓는 기쁨보다 거룩한 삶을 사는데서 오는 기쁨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안일한 소시민의 삶보다도 사명인의 삶이 더 좋았습니다. 어려움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법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고, 그때마다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하는 힘, 즉 발효력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모양이 다르고 정도는 다르지만 복음이 역사하면 누구나 이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낡은 가죽부대이면 복음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Healing Crisis도 없고 Healing Power도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그러했습니다.

금식을 비롯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악하고 또 약한가 하는 것을 깨우쳐 주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힘을 다해 율법을 지키고 마음을 다해 금식한 사람은 ‘아 구원이 인간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지 않는구나!’, 구원은 스스로 얻을 수 없으며 반드시 나 아닌 다른 존재, 즉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진정으로 율법을 지키려 했다면 큰 기쁨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외면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목적이 참된 신앙과 구원을 추구하기보다도 자기를 자랑하고 또 거기에 따르는 권세와 영광을 얻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성경에는 일 년에 한번 있는 금식 일을 100번 이상으로 늘린 것도 자기들이 그 정도로 영력이 있다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고 거기에 따르는 정치적 종교적 영향력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구원을 발견하거나 신앙을 자라게 하기 보다도 그들을 오히려 죄악 되게 만들었고 구원을 가리웠습니다. 율법 이외에 그들의 마음에는 교만과 고집, 그리고 정죄와 미움이 가득했습니다. 금식 많이 한다고 거만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다녔지만 마음에는 빛이 없었고, 얼굴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하고 기쁨에 겨웠던 반면에 그들은 뻣뻣하고 딱딱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권세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은 욕심 때문에 그리스도를 죽이는 멸망의 자식들이 되었습니다. 새 가죽부대인 세리와 창녀들은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해서 새 사람이 되었지만, 욕심 때문에 낡은 가죽부대가 된 바리새인들은 도리어 복음 때문에 멸망의 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린 셈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우리를 낡은 가죽부대로 만드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교만이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것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이들은 성경을 공부할 때 일어나는 영적인 위기, 영적인 명현현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성경공부 하니까 갈등만 생긴다며 도망가 버립니다. 자신들의 죄와 욕심을 버리는 대신에 성경이 틀렸고, 목자님이 잘못됐고, 교회가 문제라며 왜곡하고 비난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안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기 율법들이 있습니다. 하루에 8시간이상 자지 않으면 피곤해 죽는다. 남들은 다 boy friend, girl friend가 있는데 나만 연애하지 않으면 쪽팔려 죽는다.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으면 심심해서 죽는다, 등등 자기 율법들이 있어서 게임 시간에 방해가 되면 일대일도 다 버립니다. 휴가철에는 반드시 여행을 가야된다. 자동차는 반드시 벤츠여야 한다. 내 아내와 남편은 반드시 키 크고 잘 생겨야 된다는 등등의 율법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율법들이 우리 마음에 복음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조금도 변화하거나 성장하지 못하는 딱딱하게 굳은 낡은 가죽부대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립니다.

 

저는 프리토리아를 떠나 요한네스버그로 이사하면서 이제는 양을 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부터 따지면 50년 이상을 양 쳤으니까 이제는 그만해도 된다고 또 실제로 뭐라고 할 사람도 없습니다. 더 이상 양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속상해하고 절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사람 사귀기가 아주 어려운데 양을 얻으려면 매번 이런 성격하고 싸워야 하는데 지겨웠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나이를 생각하니 이제 양을 치기 시작한들 열매가 맺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보다도 저에게는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은퇴했지만 할 일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성경공부 한 것을 잘 정리해서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이것저것 써야 할 일들도 많았습니다. 또 이제는 은퇴생활을 즐기면서 이국 땅 남아브리카를 실컷 여행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집 근처에는 조그만 호수가 있습니다. 제가 피싱을 한다면 캠퍼스에 나가서 학생들 피싱하기 보다는 낚싯대 하나를 사서 그 호수에 가서 물고기를 피싱하고 싶었습니다. 아직 한 번도 못 갔습니다. 그런데 제 동역자는 비츠로 오면서 새 마음을 갖고 양을 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캠퍼스로 올라가서 양을 만났습니다. 저는 제 동역자를 위해서 운전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캠퍼스에 갔지만 양치는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서 저는 차 안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를 않았습니다. 제 동역자와 경성에서 온 최한나 선교사는 열심히 학생들을 만나는데 저는 차 안에 멍청하게 앉아있거나, 스마트 폰으로 한국 신문이나 보고 있었습니다. 참 한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개척기 때 하도 양들이 오지 않아서 ‘하나님 아버지 30명만 보내주시면 제가 죽을 때까지 캠퍼스에서 양을 치겠습니다’ 하고 서원했던 일이 생각나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또 남산에서는 양을 친다고 저렇게 애를 쓰는데 혼자 앉아 있기가 힘들었습니다. 또 시니어 사모님들이 연세가 많아지니까 아픈 사람들도 많아지고, 우리 학사들도 직장에서 걱정들도 많은데 내가 양을 쳐야 하나님이 불쌍하게 여겨 주실 것이 아닌가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츠역사를 와서 보니까 그동안 리더들을 감당하느라고 새 양들 감당하는 것이 좀 부족한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자신의 삶과 영성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지 않고 말씀만 공부하려니까 말씀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습니다. 또 양들 없이 성경공부 한다는 것, 또 대상 없이 성경을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피하고 싶은 말씀이 많아졌습니다. “네 양을 먹이라”든가 “끝까지 충성하라”는 말씀을 보기가 싫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생활과 생각에 한계를 두고 성경을 공부하니까 말씀을 해석하는데도 한계가 생기고, 거짓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번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지를 전할 때 제 마음에는 저는 그동안 복의 근원 많이 했으니까 이제는 여러분들이나 많이 하세요! 하는 심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남 말하듯이 메시지를 전해야 했고, 전하고 나서도 기쁨이 별로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 그만치고 성경공부에 전념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잠만 많이 늘고, 성경공부에 들어가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자세뿐 아니라 일상생활 할 때도 점점 하기 싫은 일이 많아지고, 게을러졌습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머리도 굳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내 나이가 몇인데 굳어가는 것이 당연하지 하면서 투쟁하기도 싫어졌습니다. 저는 나이 때문에 또 나이로 인한 여러 가지 율법 때문에 뻣뻣하고 늙은 가죽부대가 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점차 이러다가는 큰 일 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또 이대로 굳어져 버려서 늙은이가 되고 말기에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1월쯤 되니까 제이콥 선교사님이 제게 성탄절과 새해 말씀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새해에는 어떤 말씀을 전해야 되나 합당한 말씀을 찾다가 ‘새’ 자가 많이 들어가는 마가복음 2장 22절을 무조건 붙들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이 말씀이 마음에 쏙 들어왔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뒤늦게 제 동역자와 함께 캠퍼스에 올라가서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그것도 하니까 점점 재미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피싱하기가 좀 괜찮습니다. 제가 젊어지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자유스러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만나 성경공부하자 권했고 벤치든, 계단 모퉁이든, 나무 아래서든, 자동차 안에서든, 빈 강당이든 어느 곳에서나 학생들을 붙들고 공부했습니다. 제 속에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용기와 자유를 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어가 다른 때보다 좀 수월해 지는 데서도 예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번은 학생들 몇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데 성경공부 원하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으려고 한국에서처럼 카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한 형제가 왜 자기에게는 물어보지 않느냐며 손을 들었습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한 번은 공부하기로 온 학생이 오지 않았는데, 저는 마음이 좋지 않아서 그 벤치에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한 자매님이 제 벤치에 와서 제 곁에 딱 앉았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에게 성경공부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그 형제와 하려던 공부를 그 자매와 하고 아주 위로를 많이 얻었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이 여러 개의 벤치 중에서 제가 앉은 벤치에 온 것을 생각하며, 거기서도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츠UBF는 비츠 대학이 있어서 비츠UBF라고 합니다. 만델라대통령이 공부한 대학입니다. 올해 와서 모두 학생 양들을 얻고자 하는 의욕들이 일어났습니다. 또 지난 몇 년 동안 학교에 단체등록을 하고자 기도해 왔는데 올해 드디어 허가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캠퍼스에서 주일예배를 갖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캠퍼스에 우리 전형의 바이블 룸을 허락받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일 모임 수도 늘어났습니다. 많을 때는 40명도 넘게 옵니다. 또 그동안 렙세디와 데스몬드가 조상목자들인데, 나이가 30이 넘어도 자매님이 없어 장가를 가지 못했는데 제 짝이 생겼습니다. 올해 내로 가정교회를 세우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렙세디목자는 박사가 되어서 비츠대학의 전임강사가 되었고, 김레베카 선교사는 요한네스버그의 박사가 되었습니다. 또 형제자매님들 가운데 여러 가지 이런 저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낡은 가죽부대가 되지 않고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유연성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그렇게 학생들 쫓아다녀서 얻은 열매가 과연 뭡니까? 하고 묻는다면 이제까지 말한 것이 좀 민망해집니다. 많은 학생들을 만나고 공부했지만 결국 4명의 형제가 정기적으로 공부하고 있고, 그 중 두 형제가 주일모임에 나오는데 빠지는 때가 많습니다. 제 아내는 정기적으로 공부하는 자매가 7명이고, 아직 한 자매 또는 두자매가 주일모임에 나오는데 이 자매들이 믿음의 어미가 될 싹수가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낡고 딱딱한 가죽부대로 늙어버리지 않고 조금 유연하고 자유스러워진 것이 무엇보다도 감사합니다. 양을 치자니 아쉬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기도도 더 간절해지고, 양 잘 치는 사람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이 생기고, 배우는 마음이 다시 일어납니다. 저의 개인적인 성경공부에나 선교사들과의 공부에도 은혜를 더하는 것을 느낍니다.

전도는 사람을 감당해야 되고 더구나 영혼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아주 힘이 듭니다. 그래서 말씀공부나 구제사업 같은 것은 하고 싶지만 전도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과 우리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영혼을 깨어있게 하고 무엇보다도 낡은 가죽부대가 되는 것을 방지해 준다고 믿습니다.

남아공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처럼 목자들에게 상처를 주기위해 인상을 쓰거나 험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선교사나 목사라고 하면 학생들이 굉장히 존중해주고 수위들이나 경비원들도 여러모로 협조해 줍니다. 학생들은 성경공부하자면 절반정도는 시간과 날짜까지 잡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10%도 안됩니다. 그 약속을 믿고 학교에 뻔질나게 올라가고 또 바람도 많이 맞습니다. 시간 개념이나 약속을 꼭 지켜야 된다는 의식도 철저하지 못해서 한번 공부하려고 하면 여러 번 문자를 주고받아서 시간을 새로 또 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약속을 정하고 나가서 또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학생들은 대부분 가난해서 점심 재대로 먹고 다니는 사람은 한 절반도 못되는 것 같습니다. 또 모두들 여러 회사에서 주는 장학금이 아니면 학교를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성적 떨어지는 것을 아주 두려워합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말씀은 어렵지만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노래는 열심히 부르기 때문에 우리 예배에 나오기가 어렵고 훈련시키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피싱하기는 한국보다 쉽지만 열매 맺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적어도 낡은 가죽부대는 되지 않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는 이 진리는 전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젊어도 새로워지고자 하는 소원이 없으면 낡은 가죽부대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낡은 가죽부대가 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리고 맙니다. 사람이 좀 잘났다고 해서 성장하지 않고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버리면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같은 내용의 말씀이 누가복음 5장에도 있는데 거기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첨가하셨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포도주는 묵은 것일수록 맛이 좋다지요.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 묵은 포도주입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영광을 가져다주고 권세를 지켜 주었으니 얼마나 그 맛이 좋겠습니까? 그래서 율법만 원했지 새 것,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했습니다. 묵은 것이 좋다 주장하고 묵은 것을 고집하고 묵은 것에 안주하려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 것들은 싸가지가 없다고 인상 쓰는 사람들, 옛날 성경해석만이 정통이고 옛날 방법만이 복음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낡은 가죽부대가 됩니다. 일제 시대 때가 좋았다, 박정희 때가 좋았다, 그리고 노무현 때만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새 시대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어느 쪽이든 진영논리로 굳어져서 낡은 가죽부대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요즘 세계 어디를 봐도 젊은이들의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우리나라는 특히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이럴 때 젊은이들이 흙수저는 어쩔 수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마음까지 굳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마음을 펴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힘차고 큰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김요한 목자님으로부터 근래에 인제센터에 학생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제 소감모임에 참석했는데 요한목자님이 한마디 하라고 해서 나와서 몇 마디 했습니다. 그때 제가 내일 메시지 전해야 하니까 이 말은 안해야 되겠다 하고 아껴두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의 소감이 거짓 없이 순수하고 모두들 으레껏 하는 말보다도 마음에 있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낡은 가죽부대들의 말이 아니라 새 가죽부대들의 고백이요 기도요청이었습니다. 저는 인제UBF가 새 가죽부대의 모임이요 그래서 인제UBF에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이 역사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우리 교회가 늘 새 가죽부대가 되고 우리 마음이 늘 신선하고 우리의 삶이 늘 복음의 생명력으로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예수님은 늘 새 가죽부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황태자시지만 구유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신데도 온갖 죄인을 다 영접할 만큼 늘 새 가죽부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새 가죽부대이신 예수님을 쓰셔서 인류의 구원역사를 이루실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늘 새 가죽부대이신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곧 여름수양회를 갖습니다. 우리가 여름수양회를 위해서 지금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새 가죽부대로 연단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마음을 낡고 굳어지게 하는 욕심, 고정되어버린 자기 생각, 그 많은 걱정과 근심들을 적어도 수양회를 준비하고 수양회를 하는 기간만큼은 일단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하고 겸손한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번 수양회를 통해 우리 마음에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의 복음이 힘차게 역사하고 우리의 삶이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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