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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마태복음
2019.12.15 12:44

2019년 성탄 1강 메시지(정여호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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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호수아

마태복음 1:1-25

 

 

임마누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

오늘 본문은 제가 처음 읽었던 성경말씀입니다. 군대에서 전도를 받고 큰마음 먹고 성경을 펼쳤는데 족보였습니다. 저는 제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족보에 흥미를 잃었고, 그대로 책을 덮었습니다. 그런데 전역 후 복학하여 친구의 초청으로 여기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본문을 읽고 그 뜻을 생각하면서 제 마음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임마누엘무슨 말인지 싶었는데, 마태는 친절하게도 번역하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이 말씀이 제게 성탄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공부는 계속 이어졌고, 매년 성탄을 맞이하면서 마태복음 1장 말씀은 제게 성탄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제가 받은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기쁨으로 성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이십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1-17)

1절을 봅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에게 약속하셨습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신만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창세기 12:3).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은 하나님께 택한 받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하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22:18). 다윗에게는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사무엘하 7:12,13).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고, 다윗의 씨를 세워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계보,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계보가 이어져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께서 나셨습니다(17).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15절에서 첫 사람 아담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곧 사람으로 죄를 범하게 하는 원수를 이길 그리스도를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족보를 정리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마리아에게서 나신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이 족보를 살펴보면 일반적인 족보와는 많이 다릅니다. 보통 족보는 장자 중심으로 기록됩니다. 그런데 이 족보는 장자 중심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이요 야곱도 이삭의 둘째아들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 이뿐 아니라 족보는 보통 남자 중심으로 기록하는데 이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여럿 등장합니다. 그런데 등장하는 여인들이 이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3절 상반절을 봅시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다말이 누구입니까? 유다의 첫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며느리와 관계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5절을 봅시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으로 부도덕한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룻 또한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모압 족속의 여인이었습니다.

마태가 그리스도의 계보에 굳이 이 여인들, 그것도 이방 여인들의 이름을 넣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혈통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인간 조건을 자랑하며 내세웠습니다. 율법에 따라 흠이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보에 이런 흠이 많은 이방 여인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를 통해 마태는 하나님은 혈통이나 인간 조건을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확실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면 왜 이 분들이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 있습니까? 이 분들은 믿음의 여인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출신이나 배경이 어떠하든, 그 과거가 어떠하든 그 사람이 가진 믿음을 보십니다. 다말은 자신의 슬픈 운명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죽음을 무릎 쓰고서라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집안의 대를 잇는 책임을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소식을 전해 듣고 크고 높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 주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고자 결단하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하는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그리스도의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이로 볼 때 우리 중에 어떤 사람도 믿음이 있으면 그 출신이나 인간조건, 과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제가 인제대 출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운명적인 생각에서 좀처럼 잘 벗어나지 못했었습니다. 뭐 딱히 인제대 출신이라서 보다는 저 자신을 볼 때 너무나 책을 읽지 않아서 그런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었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 할 얘기가 많은 목자님들을 보면 비교의식이 들고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계속 읽는 가운데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말과 지혜로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책을 읽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비교의식과 열등감에 시달리며 책도 읽지 않고 있던 데서, 이제는 믿음으로 책을 읽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생각의 폭이 점점 넓어지고 깊이가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생각하는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저를 열등감에 시달리는 운명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인제대 캠퍼스 개척역사에 쓰실 소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족보에 또 한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다같이 6절을 봅시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그 여인의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야의 아내라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야가 누구입니까? 다윗의 충신 중 한 명입니다. 다윗은 늦잠을 자다 일어나 옥상을 거닐다가 우리야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는 그만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여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한 다윗을 쓰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은 그가 흠이 없어서가 아님을 드러냅니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함 받는 사람이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다윗 같은 사람을 쓰십니다.

제가 믿음으로 살고 또 그동안 하나님의 역사에 헌신해왔다 하더라도 주 앞에서 또 죄를 짓고 반복해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생각해볼 때 제가 죄를 안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가 죄에 넘어졌을 그때에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어느덧 오늘 같이 단상에 올라 메시지를 전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이전처럼 정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면 언제라도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저의 하나님이 되어 주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 하나님을 제가 믿음으로, 제가 어떤 죄에 빠진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저를 붙드실 것입니다.

7절에서 10절을 봅시다. 다윗의 왕위는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요람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은 누구보다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우상숭배의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을 이어 세워진 왕들도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고 특히 므낫세에 이르러서는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여고냐 때에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의 후손은 끊어지지 않고 여고냐 스알디엘 스룹바벨 아비훗 엘리아김 아소르 사독 아킴 엘리웃 엘르아살 맛단 야곱 마리아의 남편 요셉까지 그 대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습니다(12-16).

17절을 봅시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다윗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로 갔나 싶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죄와 허물로 가득한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함께하셨음을 증거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음을 증거합니다. 사람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습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십니다. 사람은 믿을 만하지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믿을 만한 분이심을 우리로 알게 하시는 미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아멘!

16절을 봅시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8-25)

다같이 18절을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를 믿고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혼 하고 동거하지 않고 1년 후에 결혼을 올렸습니다. 약혼은 동거만 하지 않을 뿐이지 결혼과 동일한 효력을 가졌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의로운 사람이라 순결을 지키며 동거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약혼녀 마리아의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된 일인지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대로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설령 말해 주었다고 해도 요셉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은 어떻게 하고자 하였습니까? 19절을 봅시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요셉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앞에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자신과 관계 하지 않고 임신을 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이 일을 다 드러내면 마리아는 율법을 따라 정죄를 받아 죽게 됩니다. 요셉은 정절을 지키지 못한 마리아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으로 괴로웠지만 마리아가 해를 당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마리아도 살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20절을 봅시다. 요셉이 이 일을 생각할 때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리아의 일로 고민하는 요셉을 주께서 친히 찾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의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주의 사자가 그에게 전해준 소식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21절을 봅시다.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입니다(22). 어떤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까? 다같이 23절을 봅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유다가 아람과 북이스라엘 동맹군의 침략으로 큰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두려워 떨고 있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아람과 북이스라엘로부터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자신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며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강대국 앗수르를 더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친히 징조를 주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기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이 징조를 통해 계속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고 마침내 처녀 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으로 이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아하스처럼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포로로 사로잡혀간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이민족의 압제를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삶을 힘들고 고달팠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연약한 한 아기가 되어서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마태는 자신 같은 이기적인 죄인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생각할 때 마음에서 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동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일부를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를 모든 사람이 다 싫어했습니다. 누구도 그와 함께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를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나를 따르라하시며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마가복음 2:14).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 이후 성령으로 또한 함께 하셨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그를 무한히 품어 주셨습니다. 마태는 이런 예수님을 생각하며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마태복음12:20). 죄로 인해 병들고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자신을 끝까지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함께 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랑에 감동하였습니다. 그 사랑과 긍휼로 인해 돈독이 올라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신약의 첫 번째 책을 기록하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임마누엘로 시작해서 임마누엘로 끝납니다.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시작과 끝 사이에는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과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해 주시고 그녀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마비된 중풍병자의 손을 잡고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군대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과도 함께 해 주심으로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기적이고 허물 많은 열 두 제자들과 3년 동안 동거동락 하시며 그들의 친구요, 스승이요, 목자요,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세상의 어떤 사람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 임마누엘의 사랑이 죄와 운명가운데서 시름하던 제게도 임하였습니다. 저는 군에 있을 때 정신병으로 집을 나가버리신 어머니 소식을 듣고 크게 절망하고 근심하였습니다. 누구하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를 학과동기가 챙겨주었습니다. 전역 후 고마운 마음에 그 동기가 초청하는 교회에 좋은 마음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 이곳 인제UBF입니다. 이곳에서 만난 목자님들이 참 좋고 편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저를 도와주고 챙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시시 때때로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맛있는 음식으로 섬겨주었습니다.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 따뜻함이 어디서 오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성경을 통해 저도 그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 1:4).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가복음 2:17). 이 말씀으로 죄인과 함께하시는 사랑의 예수님을 저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도 예수님처럼, 그리고 목자님들처럼 누군가와 함께 해주는 값지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갈수록 학생들과 함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 자신을 볼 때 예전보다 자기를 부인해야 할 것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몸과 체력이 이제 받쳐주지 못해 축구도 같이 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20학번이 학생들이 캠퍼스에 들어옵니다. 저는 01학번입니다. 이들은 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과 함께하려면 제가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어떤 모양의 죄인들과도 함께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 예수께서 저와 함께 계십니다. 제가 이를 보면 제게도 길이 보일 것입니다. 제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예수께서 각각의 사람과 실제로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사랑과 긍휼을 따라 누구와도 함께 하는 사랑의 목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24,25절을 봅시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가득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허물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함께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이십니다.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넘치게 하시니 감사 찬양합니다. 이 기쁨을 이웃, 외로움을 타는 이웃과 함께 나누는 성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태복음 1:23)

 

 

2019 성탄 1강 메시지 마태복음 0101-0125 정여호수아 인쇄용.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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