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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데살로니가전서
2019.11.17 13:03

2019년 추수감사절 메시지(정여호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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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추수감사절 정여호수아

데살로니가전서 5:12-18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로 추수를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마음으로 듣고 받아 주 안에서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예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배웠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사도가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비방과 핍박으로 인해 그는 고린도나 에베소에서처럼 오랜 시간동안 머물지 못하고 다른 개척지로 떠났습니다. 그런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이 아직도 어리고 또 연약한 자가 많았습니다. 또한 리더십도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또 데살로니가는 크고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였기 때문에 성적으로도 문란했고, 종말에 대해서도 과도한 집착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재림에 대비한다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그들의 목자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을 돕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권하였습니까?


권하는 자들을 가장 귀히 여기며(12-13)

다같이 512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다스리는 자가 아직 어리고 연약했던 것 같고 그래서 많은 점에서 실수와 허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를 신뢰하지 못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동역의 그릇을 이루지 못하고 분란과 갈등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하여 바울 사도는 먼저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며 주안에서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라고 합니다. 먼저 그들이 그들 가운데서 수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라고 합니다. 아무리 허물과 약점이 많더라도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세워진 주의 종으로서 수고하고 있음을 알라고 합니다. 또 그들이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고 권하는 것을 알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 뜻이 아니라 주 안에서 그들을 다스리고 권하고자 애씁니다. 또 비난이나 비방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돕기 위해 끊임없이 책망하고 권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 합니다.

그들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한 영혼이라도 주께로 인도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구원 얻기를 어떤 다른 것보다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히브리서 13:17).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서로가 화목하여 주의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는 한 몸을 이룰 것입니다. 서로가 화목할 때 그 사랑의 냄새를 맡고 주의 어린 양들이 들며날며 생명의 꼴을 얻을 것입니다.

저는 이전에 목자님들이 저 한 사람을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고 수고하고 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겪고,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섬긴 것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늘 섬김받던 데서 이제 섬기는 목자가 되고 보니 이제야 목자님들을 마음에서부터 이해하고 또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행하셨는지 알 수 있게 된 것 같고, 무엇보다 이 일이 어떤 일보다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하는 지금 이 권면에 담긴 의미를 조금은 알아듣게 된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감사합니다. 저는 인제복음 역사의 계승자로 세움 받았습니다. 이 자체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역사에 쓰임 받으며 발견하는 것은 여전히 저는 너무나 많이 미숙하고 부족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이는 인제역사에 함께 하는 분들이 저를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귀하게 여기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실제에서 동역하는 것을 생각 할 때 감사합니다. 그래서 힘이 납니다. 그래서 제 부족함을 알게 되지만 또 감사가 됩니다. 제가 주 안에서 계속해서 주의 역사를 위해 힘쓰고, 또 주의 사랑 안에서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일에 힘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 사도는 또 데살로니가 형제들에게 또 무엇을 권면합니까?

권계하고 격려하고 붙들어 주라(14-15)

다같이 14절을 봅시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바울 사도는 그들이 섬겨야 할 자들이 누구며 그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말합니다. 먼저 게으른 자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를 보면 실제로 그들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3:11).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형제들은 권계하라고 합니다. ‘권계라는 말은 요즘 잘 쓰지 않는 말이라 사전을 찾아보니 타일러 훈계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런 자들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말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일관되게 꾸짖고 책망하여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마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용기가 부족하고 겁이 많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시련을 잘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를 잘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책망이 아니라 격려입니다. 믿음의 말로서 위로하고 복음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 힘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성도들 가운데 유대인들의 강한 핍박과 또 환난으로 인해 믿음이 약해진 자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데살로니가 전서 3:3). 이들은 힘이 없기 때문에 조금의 환난이나 시련에도 쉽게 흔들리고 믿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붙잡아 두 팔로 감싸 안고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는 군에서 행군할 때 힘이 없는 사람은 도중에 낙오하기 쉬운데 힘 있는 동료들이 함께 어깨동무를 해서 같이 걷고 또 그 군장을 대신 들어주어서 그 사람이 어떻게든 낙오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한 번 두 번 권계하고 격려하고 붙들어 준다고 해서 금방 변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마다 연약한 부분이 다르고 섬김과 도움이 필요한 부분도 다 다릅니다. 그렇게 때문에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범위 내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래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넘어서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또 그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들 때 판단하지 않고 참고 기다려 주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죽는 것 같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또 그런 가운데서도 그 사람에게서 끝까지 소망을 끊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4).

그런데 그렇게 오래 참음에도 이를 도리어 악으로 갚는 자가 있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5절을 봅시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고 합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동족들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받았고 이로 인해 보복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자 바울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 대해서 항상 선을 따르라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유대인들에게 악으로 갚지 아니하셨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베드로전서 2:23). 뿐만 아니라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용서의 기도를 감당하셨습니다(누가복음 23:34). 예수님은 이같이 악에 대해서 악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거역하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비록 악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은 자로서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오래 참고 항상 선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16-18)

다같이 16-18절을 봅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앞에서도 말했지만 현재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세상에서 많은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환난을 당할 때는 기뻐할래야 기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런 그들에게 먼저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힘들더라도 억지로 웃으며 기뻐하라는 말입니까? 나는 슬픈데 다른 사람도 슬퍼하게 하지 않도록 기쁜척이라도 하라는 말입니까?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 현실은 슬픈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옥중 서신 중 하나인 빌립보서 31절에서 이같이 말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또 빌립보서 44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이로 볼 때 바울 사도가 옥중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모든 일에 주의 뜻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곧 주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실제 삶 속에서 믿는 것입니다(히브리서 11:6). 그래서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여기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과 그 뜻에 담긴 의미를 생각합니다.

일례로 우리가 창세기 요셉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리고 또 보디발 여사로 인해 지저분한 죄목으로 옥에 갇히는 시련을 당했습니다. 이때 만약 그가 주 밖에 있었다면 홧병으로 죽었거나 아니면 운명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주 안에서 주께서 주신 꿈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들이 닥친 모든 환난과 시련에 담긴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자신을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형들의 악을 통해 자신을 애굽에 먼저 보내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주 안에서 있으므로 그는 고난과 환난에 대한 의미가 해석이 되었고 그것이 해석되었을 때 그의 모든 운명과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같이 주 안에 있는 자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장차 우리에게 미칠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 되고 연약한 육신의 장막을 벗고 주의 온전하신 구원, 곧 몸의 속량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도 이같이 증거 하였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이같이 우리는 현재의 고난 중에서도 장차 있을 영광 곧 우리 몸의 속량을 이루실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기뻐할 뿐 아니라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항상 기도하라하지 않고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을까요? 사람이 기도해도 안되는 것은 안된다는 생각이 들면 쉬고 싶습니다. 저도 기도를 하다가 그만두기를 무한 반복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기도하는 자세와 마음의 태도를 계속 견지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기도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하나님께 내 마음을 아뢰는 것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 해달라고 토로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것도 기도입니다. 내 뜻을 주님께 아뢴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처형을 앞두시고 자신의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기를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아버지의 원을 듣고, 이를 받아들이고 순종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고 자연히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성경으로 돌아가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이같이 하나님의 뜻을 듣겠다는 심정으로 말씀을 읽기 때문에 주의 뜻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어둡고 인간적인 마음의 갈등들이 물러가고 평강이 임합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할 뿐 아니라 또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18절을 봅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곧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저는 매년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제목 10개 이상을 찾아내기도 힘들어 합니다. 불평 원망하는 것은 하지 말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감사하는 것은 이같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범사, 곧 모든 일,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도통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면 그 관심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세상의 명예와 재물, 곧 썩어 없어질 돈에 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충족될 때에만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게 친히 알려 주셨습니다. 이를 듣고 믿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이 죽을 몸도 다시 살 산 소망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데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5:17).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로마서 8: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할 뿐 아니라 외로운 가을날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기도대로 응답하심에 감사할 뿐 아니라 거절 하신 것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기쁠 때뿐만 아니라 아프고 슬프고 절망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올 한해를 돌아볼 때 어려움과 고난이 많았습니다. 먼저 제가 격주마다 주일메시지를 전하는 고난으로 인해 힘에 겨웠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통해 오히려 주의 말씀에 더욱 깨어 있을 수 있었고 본문 말씀에 담간 그 뜻을 알기 위해 하지 않던 기도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이 말씀의 힘을 덧입고 붙들 수 있었습니다. 제가 주께 받은 가장 큰 복이며 감사 제목임을 깨닫습니다. 또한 저는 형제자매들을 돕는데 있어 어느 해보다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섬기던 형제자매들이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실족하거나 떠나가는 일을 지켜보면서 힘이 빠지기도 하고 떠난 형제자매들이 마음에서부터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제가 정말 형제자매들에게 실제로 무엇을 심고자 했는지, 무엇을 증거 하고자 했는지 그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제 욕심을 앞세우고 이를 채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형제들을 감당한 점이 없지 않았음이 발견되었고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는 환난가운데서도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019년 한해를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에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매주 신실하게 캠퍼스 모임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 여름 가을수양회에 많은 학생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개금과 양산캠퍼스 개척 역사에 은혜를 부어 주사 꾸준히 학생들을 보내주시고 캠퍼스모임이 이루어 지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김 요한 목자님과 함께 저와 천 모세, 김 아브라함 목자님들을 말씀의 종으로 세워주셔서 매주 풍성한 창세기와 사도행전 말씀이 본문을 따라 증거 되게 하셨습니다. 또 세 가정을 중심으로 믿음의 계승역사를 이룰 수 있는 기도모임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또한 미국 워싱턴에 파송된 모니카 포브스 선교사가 뇌출혈로 쓰러졌지만 신속한 대응으로 위기를 넘기고 빠른 속도로 건강이 회복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 사라 리 선교사 가정이 폴란드에 이어 중동의 쿠웨이트 개척역사에 믿음으로 도전하게 하셨습니다. 또 인제역사가 시작되게 하는데 쓰임 받으신 천사라 사모님이 천안 아산에 파송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을 쓰십니다. 인제와 양산가운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또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를 믿고 확신함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여기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함으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따라 우리 각 사람이 나에게 어떤 감사 제목이 있는지 하나하나 헤아려보면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선하신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함으로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활기 넘치는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

 

2019년 추수감사절 메시지 살전 0512-0518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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