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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 사도행전 9강 정여호수아

사도행전 11:19-11:30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6)

이방인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는 일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안디옥에서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세워지고 이곳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안디옥에서 어떻게 이 같은 역사가 있었습니까?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19-24)

19절을 봅시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고넬료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깨끗하게 하셨음을 확실히 드려내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흩어져 두루 다니면서도 유대인들만 찾아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한국 사람이 해외에 선교사로 나가서 그곳에서 한국 사람들만 찾아서 전도하고 한국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언어의 장벽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동족이라서 복음을 전하기 훨씬 수월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만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이 선민의식으로 인해 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로 보았고 말씀을 전해도 전혀 듣지 않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로 인해 흩어져 이방 지역을 두루다니면서도 이방인들은 전도의 대상에서 처음부터 제외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계속해서 복음이 이방으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0절을 봅시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였습니다. 구브로는 지중해에서 유대와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큰 섬입니다. 구레네는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에 북동부에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이 헬라지역 출신의 유대인 몇 사람이 두루 다니다가 안디옥에 이르러서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헬라인이 누구입니까? 헬라인들은 논리적이고 지식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에 대한 자신들의 편견을 깨뜨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까이 지내는 몇몇의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를 전파하기를 시도했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미미하고 작은 시도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21절을 봅시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헬라인들에게 주 예수를 전할 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함으로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이로 볼 때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며,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갇혀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좀 부족하고 서툴더라도 자기 한계의 껍질을 깨고 나와서 믿음으로 나아가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크게 기뻐하십니다. 올해 봄 학기 역사 가운데도 우리가 우리의 실제 한계를 이기고 캠퍼스에 나아가 주 예수를 전파하는 일에 도전할 때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22절을 봅시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 곧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온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냈습니다. 왜 바나바를 보냈을까요?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으로서 선민의식을 넘어서서 이미 이방인에 대해 많이 열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과 같이 복음의 대적자 노릇을 했던 사람도 감당할 수 있는 넓은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착하고 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24). 곧 주께 돌아온 이방인들을 돕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출신인 사도들 보다 바나바를 파송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디옥에 이른 바나바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23절을 봅시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바나바는 먼저 안디옥교회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율법도 제대로 안 지키고, 질서가 아직 제대로 잡혀있는 않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런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동일하게 그들도 예수님을 주로 믿고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죄 사함의 은혜와 부활의 복음이 살아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보는 그의 마음이 크게 기뻤습니다. 이에 그는 모든 사람들이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였습니다. 믿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뿌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조그만 유혹의 바람이 불어와도 쉽게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 은혜를 따라 주와 함께 계속 머물러 있으려면 굳건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바나바는 이를 잘 알았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에있게 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힘 권면했습니다. 이 일을 행하되 착한 마음 곧 순전한 마음으로, 또 믿음과 성령 충만함으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큰 무리가 주께로 더해졌습니다(24).

그런데 큰 무리가 주께 더해졌을 그때 바나바는 이들을 돕는데 많은 한계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때 바나바는 어떻게 했습니까?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습니다(25-26)

25,26절 상반 절을 봅시다.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많고 동역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동역자를 찾지 않고 다소로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왔습니다.

왜 사울을 데리고 왔을까요? 바나바는 이방인 고넬료가 복음을 듣는 일에 예루살렘 교회가 냉담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신 것을 그들이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아직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동역자로 오게 될 때 이방인 양들에게 율법과 할례를 강요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율법적이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은혜 위에 굳게 세울 수 있는 말씀의 종을 찾았습니다. 이방인들의 여러 다른 사상과 생각과 많은 질문들을 말씀으로 확실히 풀어줄 수 있는 탁월한 성경 선생을 찾았습니다. 그는 주께서 사울을 부르실 때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하셨던 그 말씀이 기억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안디옥 교회 동역자로 사울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사울의 지난날의 이력을 보면 함께 일하기가 결코 편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울은 자신보다 배운 것이 많고 또 기질도 너무나 강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함께 하기가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이런 사울을 다소까지 가서 직접 데리고 옵니다. 바나바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 걸까요? 바나바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안디옥에서 뭔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다. 안디옥 양들 편에 서서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 이를 통해 주께서 정말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그에게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에 사울이 자신보다 더 뛰어나고 강한 사람이라 해도 그가 안디옥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주의 역사에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이 바나바 자신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바나바를 통해서 사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이런 바나바가 있었기에 사울이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런 바나바를 통해서 주님의 일은 더욱 힘차게 이루어져 갔습니다.

그러면 바나바가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한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26절 상반 절을 봅시다.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이번 겨울방학 몇주 동안 학생들이 매일 모여 고린도전서를 읽고 질문하고 생각을 나누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중심으로 이 일을 일 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했습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집중하여 말씀을 가르쳤을 때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26절 하반 절을 봅시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이전까지 초대교회에서는 세상의 모든 민족은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딱 두 가지의 구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 제자들을 일 년간 집중하여 가르쳤을 때 유대인도 아니요 이방인도 아닌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혹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이 스스로 나는 그리스도인이야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같이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였기에 이같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을까요? 제자들의 입에서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말하였습니다.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할 때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하고 행하였습니다. 그들의 모든 일상속의 대화는 모두 그리스도로 통하고 그리스도로 결론이 났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그리스도께 미친 자들이었습니다.

이로볼 때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 제자들에게 실제로 무엇을 가르쳤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일 년 동안 집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삶, 겸손과 낮아짐, 사랑과 희생, 섬김과 헌신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제 삶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길을 좇아가도록,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집중적으로 가르쳤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나바와 사울이 복음적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제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은 보고 배우지 않습니까.

일 년 동안 이같이 그리스도를 집중하여 가르쳤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주가 되셨을 때 그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졌습니다. 헬라철학과 정신과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그곳에서도 그리스도가 그들을 지배하고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믿는 않는 불신자들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습니까?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27-30)

27,28절을 봅시다.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그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흉년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도들은 큰 어려움에 처하였습니다.

이때 안디옥 제자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다같이 29,30절을 한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제자들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이 당한 실제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흉년으로 인해 그들 자신들도 많이 힘들었을 테지만 유대에 사는 형제들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고 각각 그 힘대로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작정한 것으로 끝내지 아니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실제 도움이 필요했을 때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 목자를 보내 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 크게 감사했던 것 같습니다. 고통당하는 형제들의 실제 문제를 돌아보고 그들과 마음을 같이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요한일서 3:18).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실제문제에서 이웃을 생각하고 이웃의 어려움을 돌아보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주고 희생할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얼마 전 저는 주차문제로 인해 식당에서 식사하시던 어떤 분과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교회주차장 입구를 막아놓았으니 차를 빼달라고 했더니 그분이 계속 시간을 끌고 비협조적으로 나왔습니다. 그 순간을 참았어야 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벌컥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그 차주가 앙심을 품고 지난 주 주일에 대놓고 교회앞 주차장 입구를 막고는 차를 빼주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제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 어떻게 자신같이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그 같은 막 되먹은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저는 제가 정말 누구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자꾸 짜증내고 화를 내는 것은 제 본성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실제 삶 속에서 저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는 불신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수님 밖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계속 저의 정과 욕심을 따라 살 때 주께서 저로 인해 욕을 먹고 주의 이름이 땅에 떨어짐을 보았습니다. 제가 이제 예수님 안에 거하는 투쟁을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주의 말씀으로 돌아가 그리스도께서 저를 어떻게 사랑 하셨는지를 붙들어야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저는 어떤 사람이 될까요? ---화가 아니라 기---그리스도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제게 이 소망이 생겨서 감사합니다.

안디옥 제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의 섬김과 헌신의 삶을 계속해서 배워나가는데 있었습니다. 곧 우리의 삶의 변화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데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듣고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어 실제 우리의 속이 변화됩니다. 고린도후서 215절은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 하였습니다. 우리 실제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사도행전 11:26)

 

2018-2019년 사도행전 9강 메시지 1119-1130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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