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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6강                                                                                                                                       정여호수아

마가복음 3:20-35

 

 

예수님의 가족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35)

 

제가 학생시절 처음 우리 모임에 와서 놀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저의 학과 대선배이신 지금은 워싱턴 선교사로 가신 피터 리 선교사님이 저를 아주 다정 다감한 목소리로 현태형제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 목자님이 저를 가정에 식사초청해 주셨는데 드보라 목자님과 아브라함 목자님이 서로 대화를 하실때, 서로 존칭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해 주는 이 느낌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좋았습니다. 목자님들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나중에서야 말씀공부를 통해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본문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갈수록 사랑의 관계성이 무너지고 가족 공동체성이 약화되어 가는 이 시대입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분명한 방향과 비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운 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의 친족들이 그를 붙들러 나오니(20-21)

2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시고 다시 가버나움에 있는 제자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모여드는 그 무리로 인해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예수의 친족들이 이를 듣고 그를 붙들러 나왔습니다(21). 마치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랑과 쇠사슬에 매어서 통제하고자 했던 거라사 사람들처럼, 그들도 예수님을 결박해서 데려가고자 했습니다(5:3,4).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편에 서서 예수님을 지원해 주어야 할 것 같은 그들이 왜 이렇게 하였을까요? 이는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21).

생각해보면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만도 합니다. 예수님은 남동생이 넷이고 여동생들도 있었습니다. 장남으로서 돌봐야 할 가족들이 많았습니다. 목수 일을 더욱 열심히 해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런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갑자기 집 밖으로 나가더니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느날 귀신들린 자와 온갖 병자들을 다 고치기 시작하더니, 자신에게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고, 또 금식일에는 죄인들과 어울려 떠들썩한 잔치를 벌이고, 안식일에는 굳이 손마른 자를 고침으로 율법을 폐하고 거스르는 것 같은 일을 합니다. 이제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고치고 돕느라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이런 예수님은 이해 불가입니다. 미친 게 분명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면, 주변에서 특히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예배를 섬긴다고 하면서 주말에 있는 가족모임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명절에 갑자기 절을 하지 않겠다고도 합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풀타임으로 역사를 섬긴다거나, 선교사로 가겠다고도 합니다. 어떻게 이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가족들이 별의 별소리를 다 하면서 계속 뜯어 말립니다. 헌금을 한다고 하면 그 피같은 돈을 왜 엉뚱한데 갖다 바치냐며 미친 짓 좀 그만하라고 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에 인생과 시간 낭비하지 말고, 헌신을 하더라도 좀 적당히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무엇을 하게 될까요? 가족들의 바람대로 더 열심히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될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의 정과 욕심을 채우는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진짜 미친 짓을 합니다. 돈과 권력, 성공을 위해 달려가거나 아니면 이성 친구에게 빠지거나 도박이나 주식, 비트코인에 빠지기도 하고, 게임이나 유투브, 음란물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볼때 갈수록 육신적이고 물질적이고 인본적이 되어갑니다. 이를 추구하는 사람이 정상처럼 보이고, 반대로 영적이고 복음적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좇아 사는 사람은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정상적인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 사람도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요즘 한국이 지금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누구도 아닌 하나님 모르는 불신자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요즘 모든 질서와 가치체계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물질과 쾌락에 미쳐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가치관이 전도된 이 시대 분위기에 같이 흘려 떠내려 가지 말아야 겠습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본받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믿음의 삶, 바른 길 생명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에 대해 이제는 미친 것을 넘어, 귀신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무엇이라 하십니까?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22-30)

22절을 봅시다. 예루살렘에서 서기관들이 갈릴리까지 내려왔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공회에서 예수님을 감시하고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친족들보다 한술 더 떠서 예수님이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비방하였습니다(22).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을 사탄의 역사로 몰아갔습니다. 예수님을 없애야 할 악의 세력으로 규정했습니다. 보통 이같이 악의적인 비방을 하는 경우에는 상대하지 않거나, 똑같이 비방하는 방법으로 대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조용히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23).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말인지를 정확한 논리를 따라 조곤조곤 설명해 주십니다.

24,25절을 봅시다.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집도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습니다. 이는 어느 조직이나 모임이나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사탄의 나라와 그 집은 설 수 없고, 망하고야 맙니다(26). 사탄이 스스로 자멸하는 이런 미련한 일을 과연 하겠습니까? 사탄은 머리가 나쁘지 않습니다. 머리가 7개나 되어서 얼마나 비상한지 모릅니다(17:7). 그렇다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까?

27절을 봅시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한마디로 예수님이 강한 사탄을 결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집의 세간을 강탈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약합니다. 사탄은 강합니다. 실제로 사탄은 인간을 자신의 소유로 삼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군림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고, 진리를 거스르며, 육신의 본능을 쫓아 살도록 유혹하고 부추깁니다. 우리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아무리 발버둥처도 강한 사탄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보다 더 강하십니다. 그래서 강한 사탄을 결박하시고, 그의 속박 아래에 놓여있는 우리 불쌍한 인생들을 능히 구원해 주십니다. 그 사람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와 다스림을 받도록 역사하십니다. 속박에서 풀려나 진리안에서 자유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이 지극히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의 일을 더러운 마귀의 행위로 몰아 갔습니다. 성령을 모독하였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28).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됩니다(29). 왜 그렇습니까? 이는 너무도 고의적이고 악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악한 것을 선한 것이라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 하는 것이야 말로 성령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 자신이 마귀 사탄의 편에 서서 마귀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결국은 애굽의 바로 왕처럼, 또 가룟 유다처럼 되고 맙니다. 아무리 해도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무섭게 꾸짖고 책망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반응할 수 없는 무감각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16:8). 히브리서 37,8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할때 거역하던 것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우리가 다만 그의 음성을 지금 여기서 들음으로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더 강한 예수님의 편에 적극적으로 서야 겠습니다. 그리하면 어떤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 사람은 죄사함을 받습니다. 적어도 성령을 모독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후 예수님의 가족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내 가족이라 하십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31-35)

31절을 봅시다. 그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불렀습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의 친족들이 나오더니 이번에는 예수님의 가족들이 등장합니다. 친척들을 보내도 집에 오지 않으니 이제 어머니와 동생들이 직접 예수님을 데리러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무리들로 인해 들어갈 수 없자,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나오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며 여러 종류의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지연 학연을 따라 동문회가 있고, 취미 활동에 따라 동호회나 동아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가깝고 친밀한 관계는 역시 가족일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혈육으로 맺어져 있기에 더욱 끈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마 무리들은 만사를 제쳐 놓고 가족들을 맞이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33)며 밖에 있던 가족들이 들으면 상당히 섭섭할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다면, 가족들의 방문을 반가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마치 가족들을 아웃싸이드 취급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둘러 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34) 놀랍게도 예수님은 지금 멀리서 자신을 찾아온 그들이 아니라, 지금 자기를 둘러앉은 자들이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족이라는 인륜을 끊어버리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아마도 이를 듣고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이 진짜 미쳤다면서 웅성웅성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나, 형제간의 우애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할 정도로 어머니를 끔찍이 위하셨습니다(19:27). 이는 육신의 가족관계를 넘어서는 그 이상의 가족공동체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핏줄에 의해 연결된 육의 가족을 넘어서서 이제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영적 가족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나누었기에 그 어떤 관계보다도 가장 깊고 끈끈한 관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이 세우시는 새로운 가족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다같이 35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같은 피를 나눈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그것도 지금 자기와 피를 나눈 가족을 바깥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이로볼 때 예수님의 가족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매일 발버둥 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의 신분이 어떠하든, 직업이 어떠하든, 혈통이 어떠하든, 민족이 어떠하든, 나라가 어떠하든, 성별이 어떠하든 다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자기 육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앞세우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의 가족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예수님이 본을 보이셨습니다. 자기 가족보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037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하다 하셨습니다. 또 마가복음 1029,30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서 버려야 할 것은 가족이고, 그러한 삶을 살 때 예수님 안에서 다시 얻게 되는 것도 가족입니다. 예수님 사역 당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예수님의 동생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초대교회 지도자가 되어 하나님을 섬겼고, 야고보서를 저술하여 핍박으로 흩어져 있던 성도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또 다른 형제인 유다는 유다서를 저술하여 배교의 위협 앞에 있던 성도들에게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도록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삼촌이요 이모요 형이요 동생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문은 누구에게라도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듣는 자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누구나 그 신분, 혈통에 관계 없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천국의 가족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이 가족관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할 때 반드시 많은 문제와 시련과 핍박이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족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때로는 친구와 선배, 직장동료, 심지어 알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무시와 멸시와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길을 함께 걷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힘들 때 기도해주고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해주며, 예수님이 가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함께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가족은 아픔도 함께 나누고, 기쁨도 함께 합니다. 약점도 감당해주고 어렵고 힘들 때 의지가 되어 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 서로 힘을 합하여 함께 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제자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우리 신앙공동체가 이런 제자공동체,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가 되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부족하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섬기고 사랑하며 함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가는 귀한 모임이 되길 기도합니다. 가족공동체로서 하나될 때 주께서 우리로 더욱 생육 번성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하여 캠퍼스 형제 자매들과 우리의 형제들과 가족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35)

 

2024년 마가복음 6강 메시지 0320-0335 정여호수아.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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