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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빌립보서 1강 정여호수아

빌립보서 1:1-30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립보서 1:20)

빌립보서는 AD 62년경, 바울 사도가 로마의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 보통 그 마음과 생각이 어둡고, 비장해 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전체가 4장밖에 없지만 기쁨이란 단어가 16번이나 들어 있을 만큼 기쁨이 넘칩니다. 바울 사도는 어떻게 감옥에서까지도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이번 빌립보서 말씀을 통해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주 안에서 기뻐하는 바울 사도의 성숙한 믿음을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1-8)

바울 사도는 먼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인사합니다. 1,2절을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다른 서신 서들과는 달리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 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를 보면 빌립보교회는 그의 사도됨을 인정하지 않은 다른 교회와는 그 관계성이 달랐습니다. 특별했습니다. 우리가 떠올릴 때마다 속상하고, 그래서 힘든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성도들은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4). 이는 그들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5). 그들이 첫날부터 이제까지 어떻게 복음 역사에 참여했습니까?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가 개척했습니다. 그가 빌립보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루디아였습니다. 그녀는 강가에서 만난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영접하자 곧 그를 강권하여 자기 집으로 초청했고, 자기 집을 교회로 제공했습니다(사도행전 16:15). 뿐만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헌금하여 선교 역사를 섬기고자 하는 바울을 도왔습니다(4:15,16, 고린도후서 11:9). 물론 이 일에 다른 교회도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고, 특히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히게 되자 많은 사람들, 아시아에 있는 많은 자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디모데후서 1:15). 그러나 빌립보 성도들은 그가 옥에 있는 지금까지도 그를 여전히 동역하며, 또 그를 위해 에바브로디도 편에 필요한 것들을 싸서 보냈습니다(2:25). 그들은 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다 그와 함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었습니다(7). 이러한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바울이 어찌 감사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일어난 그런 아름다운 일들이 끝날까지 갈 것을 확신했습니다. 다같이 6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사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빌립보의 성도들의 마음은 여러모로 어두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가 하는 회의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공동체의 앞날에 대한 염려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들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일깨워 줍니다. 돌이켜보면 빌립보 역사는 처음부터 바울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은 본래 빌립보를 비롯해서 유럽 땅에 복음을 전파할 의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여주심으로써 바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돌리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6:9). 그 첫 도시가 바로 빌립보였습니다(사도행전 16:12). 그리고 그곳에 복음을 영접할 루디아를 예비해 두시고, 또 그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 옥문이 열리게 하사 간수장과 그의 가족들이 영접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사도행전 16:26-32).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7). 또한 너희가 내 마음에 있으며(7),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고 합니다(8).

새해가 밝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간다지만, 여전히 연약하고 변화되지 않는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볼 때, 또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절망하고 낙심하기 쉬운 때인 것 같습니다. 과연 내가 믿음의 길을 계속 갈수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시름을 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겠습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따라 포기치 말고, 계속 전진하여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이제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을 위한 그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9-11)

9절을 봅시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립보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을 할려면 지식과 총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됩니다. 자신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서야 다른 사람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고, 건강하고 진실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들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도록 기도합니다(10).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선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선한 것, better가 아니라 best를 추구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쁘지만 않으면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그 정도 수준을 넘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좇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두신 뜻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처음부터 주신 뜻도 그러했습니다. 무자한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을 후계자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하셨습니다(창세기 15:4). 이에 그가 best를 주실 하나님을 믿었고, 이런 그를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사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일에 귀히 쓰셨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바울 사도는 어떠합니까? 그는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3:7,8). 그는 고상한 지식이 아니라 가장고상한 지식을 추구했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께서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 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논문을 꼭 써야 하는가? 굳이 자격증을 따야만 하는가? 적당히 신자로 살면 되지 꼭 제자로 살아야만 하는가?’ 이런 생각이 늘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볼 때 적당히 해서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양들을 도울 때도 좋은 마음으로 적당히 도와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음을 봅니다. 메시지도 적당히 투쟁 할 때, 말씀공부도 적당히 준비할 때 실제로는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남에게 지탄 받지 않을 정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해서는 안 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가장 최상의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진실과 깨끗함을 지켜야 합니다(10). 그렇게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히 맺힙니다(11).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됩니다(11). 우리가 적당히 좋은 것을 구하는 수준을 넘어, 지극히 선한 것을 구하는 믿음으로 계속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의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염려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는 또 무엇이라 증거합니까?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12-18)

바울은 형제들에게 자신이 옥에 갇힘으로써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12). 자신이 옥에 갇혔는데 어떻게 복음 전파에 도리어 진전이 있었습니까? 13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그는 쇠사슬에 매여 있었기에 전도하러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 맞춰 로마 시위대가 돌아가면서 자기를 감시하기 위해 감옥으로 찾아왔습니다. 찾아오는 그들을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양으로 영접하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온 시위대안 뿐만아니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4절을 봅시다. 형제 중 다수가 그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는 귀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이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에 대한 투기와 분쟁으로(15), 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려는 순수하지 못한 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17). 이런 상황이면 아마 저 같으면 이런 자들에게 대한 환멸로 괴로워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 사도는 도리어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18). 그의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그리스도가 존귀하게(19-26)

19절을 봅시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고, 또 감옥에서도 그를 통해 복음 전파에 진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더 쓰려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를 쓰시기 위해서라도 감옥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감옥에서 구원 얻는 것이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아니었습니다.

20절을 봅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그는 감옥에 있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전처럼 온전히 담대하게 살리라 다짐했습니다. 그에게는 감옥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가 그것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감옥 안에서도 그를 통해 복음전파에 진전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는 가, 죽는 가도 그에게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죽는 것을 더 원했습니다(23). 죽으면 옥살이를 비롯한 고생도 그칠 수 있고,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자들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고,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23). 그러나 24,25절을 보면 그는 양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유익하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살아도 좋았고 죽어도 좋았습니다. 죽으면 자신을 위해서 좋고, 살아 있으면 양들과 복음 역사를 위해서 유익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같이 삶과 죽음까지도 초월할 수 있었습니까? 20절을 다시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수 있다면 그는 감옥에 가도 좋았고, 죽어도 좋았고, 또 살아도 좋았습니다. 양들을 위해 희생해도 좋았고, 대적자들이 괴롭게 해도 좋았습니다.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될 수 있다면 다 좋았고, 다 극복할 수 있었고, 다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장 존귀하게 여깁니까? 이 질문에 과연 누가 떳떳하게 바울 사도와 같이 주저함 없이 말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저는 이번에 빌립보서 말씀을 통해 저와 우리 공동체의 신앙이 한층 더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볼수록 바울 사도의 신앙과, 지금의 저의 신앙에서 너무 거리감이 느껴져서 한편으로는 좌절이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 정도 되니깐 그렇게 살 수 있는 거고, 나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목자로서 생존하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 왔고, 지금도 그와 다르지 않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볼 때, 사실 좀 많이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제가 그동안 제 마음의 중심에서 정말 무엇을 앞세우려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도 저 자신보다 주와 주의 역사를 더 앞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봅니다. 지금도 제 뜻이 아닌 주의 뜻과 주의 말씀이 증거되기를 원하는 소원이 제 안에 있음을 봅니다. 저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없었다면, 제가 밤을 새워 메시지를 쓰기도 하고, 진이 빠지도록 양들과 씨름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제 모습이 어떠할지라도 저를 통해서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될 소망을 붙들고 모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저를 책임져 주시리라 확신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이 단 1도라도 주께로 향하고 이를 구하는 마음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심장으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안에 이루신 일인 줄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주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에 쓰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27-30)

27절을 봅시다. 바울 사도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는 바울사도가 그들과 함께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또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28). 이 같이 그들이 복음을 위해 힘써 협력하고 용기를 내는 것 자체가,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그들에게는 구원의 증거입니다(28).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29). 곧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바울과 같은 싸움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습니다(3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그 심장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우리를 존귀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일에 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고, 또 이를 대적하는 자들과 싸우는 복음에 합당한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계속하여 말씀을 따라 사랑에 지식과 총명을 더하며,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주를 위하여 고난 받는 일을 귀하게 여기고, 이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립보서 1:20)

 

 
2023년 빌립보서 1강 메시지 0101-0130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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