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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갈라디아서
2018.02.16 07:17

2018년 갈라디이서 6강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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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갈라디아서 6강 김요한

갈라디아서 6:1-18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 예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을 듣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생명의 삶을 살고자 하는 믿음으로 남은 일생을 복음대로 살고자 하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믿음과 소망을 가진 사람들끼리 믿음의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사람들 끼리 갈등이 생깁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30주년 예배를 앞두고 사모님 중심으로 주일예배 후 대청소를 하자 했더니 어떤 목자가 사모님하고 일하면 힘든 데요 하였습니다. 힘들더라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 좋지 않나 싶습니다. 청소 하나 하더라도 사람들과 같이 해야 하는데, 갈등이 생기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고,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1-10)

1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우리가 함께 하다 보면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납니다. 결혼한 형제가 엉뚱한 영상을 보다가, 아내에게 그 현장을 딱 걸립니다. 곤혹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럴 때 “신령한 너희는”이라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같은 형제들이며, 또 그들은 신령한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갈라디아 교회 사람이든 지금 여기 우리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라디아서 5:24).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려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범죄 한 일이 드러난 그 사람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합니다. 죄를 범했는데 그냥 두면 누룩 같이 믿음의 공동체에 죄가 슬금슬금 퍼져나갈 것입니다.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잡되 신령한 성도들은 어떻게 바로 잡아라 하십니까?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라 하십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부드러운, 따뜻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라 하십니다. “온유”는 5장에서 읽은 바와 같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육체의 욕심은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려 하지 않고 어찌하든 성령을 따라 행하고자 하면 누구든지 온유를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됩니다.

온유한 심령, 어떤 사람이 온유한 그렇게 거칠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될까요? 1절 하반절을 다시 봅시다.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자신을 살피는 사람이 온유한 심령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을 살펴 볼 때, ‘아 나도 똑 같은 시험을 받지 않을까’ 두려움이 생깁니다.

온유하다 함은 출애굽기의 모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사십 세까지 궁중교육을 받으면서 무슨 일이 어떻게 되는지를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더 이상 바로의 공주라 하지 아니하고 노예 백성인 히브리 사람으로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그래서 애굽 사람의 잘못 뿐만 아니라, 같은 동족에 대해서 잘못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 사람으로부터 내쫓김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나서 광야에서 처갓집 양들을 돌보면서 사십 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모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얼마나 낙심이 되었을까요. 그에게 있던 자신을 내세우고자 했던 것들이 다 사라진 것 같습니다. 팔십 세가 되어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때에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서 그는 자신이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 출애굽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출애굽기 4:10). 그런 그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출애굽 역사에 쓰임 받고자 담대히 자신을 내쫓았던 그 사람들에게 가서 주의 말씀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내가 누군지 살펴보는 사람은 절대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육십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가며 별 일을 다 당하고 별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출애굽기 34:8). 그런 그라도 참다못해 한번 만 치면 될 것을 두 번 쳤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민수기 20:11,12). 사람이 온유해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볼 때, “신령한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누구라도 온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말씀에 따라 자신을 살펴봅니다.

그래서 성도 간에 서로 짐을 지게 됩니다(2상).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도 그 사람에게 짐이고, 그 죄를 바로 잡는 것도 부담이고 짐입니다. “회개하라”는 전하는 것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게나 서로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든 말씀을 배우는 사람이든 서로 간에 짐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2하).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는 말씀대로 하지 못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우리를 위해 죄인 된 우리를 위해 그 죄 값을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내 죄 값을 예수께서 지셨다는 말씀이 부담이 되어서 내 죄는 내가 져야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육체에 머무는,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는 사람의 생각이지 않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법, 십자가의 법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요한일서 1:9). 그래서 짐을 서로 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면서 무엇이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3). 할례 받고 율법을 지키다고 하면서 자신을 살피지 않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방향을 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절을 봅시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하십니다(4상). 말씀대로 행하고 있는지를 스스로를 살피는 것이 우리 각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랫 우리가 스스로를 살피며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발견한 소감을 들으면 감동이 있습니다. 은혜가 됩니다. 자신을 살펴보면 자신이 잘못한 것이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멈추고 기다리는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합니다(4하). 자신이 잘하는 것은 자랑하고 싶습니다. 나의 잘 하고 있는 것을 남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가끔 쓰레기를 치우면서 누군가가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하여 누군가가 올 때를 기다릴 필요는 없지요. 그 자랑은 내 스스로 가지면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5).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스스로 확정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하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속이면서,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을 말씀 가르치는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7상).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7하).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8).

육체을 위하여 심는 것은 자신의 욕심을 따라 심는 것입니다. 단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그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정과 욕심에 따르는 것일 것입니다. 사람의 정과 욕심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자존심이지 않을까요. 제가 언제 화를 내는가 스스로를 살펴보니 제 자존심, 제 의에 흠이 생겼을 때, 제 의와 자존심을 어찌하든지 세우고자 화도 내고 야단도 치고 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심는 것은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자신을 정과 욕심을 예수 그리스도에 못 박은 자로 여기고 스스로 주님을 사랑하여 성내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참고 또 참고 오래 참을 때 성령께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 같이 9절을 읽어봅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바울 사도는 선을 행하면서 얼마나 낙심할 일이 많았을까요. 그러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 2:2). 그리고 그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 15:3,4). 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로부터 죽인다는 위협을 받고, 또 유대인 아닌 사람들로부터 자기들의 욕심과 자기 의를 건드린다고 흠씬 두들겨 맞아 죽을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사도행전 14:19).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그 여종으로 인해 돈을 벌던 주인들이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알고는 바울을 고발하여 바울이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사도행전 16:17-24). 뿐만 아니라 그렇게 환난을 견디며 복음을 전함 받아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다시 에전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심지어는 바울의 약점을 문제 삼고 비판하니 얼마나 낙심이 되었을까요. 나중에 보면 바울 곁에 디모데, 디도 같이 믿음이 깨끗한 몇 사람만 바울 곁에 남았습니다(디모데후서 4:10-12).

그러나 그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합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항변할 때 얼마든지 낙심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저는 베드로를 볼 때 죽었다가 깨어나도 복음을 전하는 일은 별 소용이 없는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2하).

그래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자 하였을 때 잠을 잔 베드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십자가가 무서워 숨은 베드로, 부활하여 오셨는데도 물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라도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베드로를 만나고 말씀을 전하고 심겼습니다.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같이 낙심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가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낙심이 어떠하였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고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온전하시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만이 온전하시고 오직 홀로 영광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고 따라가는 것은 주의 말씀을 내 마음으로 듣고 주님 다시 오실 그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있을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사시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십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증거하십니다. 주의 말씀을 붙드는 사람은 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10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원수에게라도 기도하고 착하게 하라 하십니다. 가정은 사람 사는 데 있어 가장 기본단위입니다. 가정이 무엇을 기초로 이루어지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말씀을 따라 사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이 복의 근원이 되기까지 오래 참고 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변화되고 사라가 변화되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 기초가 믿음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믿음의 가정에 별별 일들이 다 생기기 때문에 믿어서 무엇하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저만 해도 저의 가정을 생각할 때 주일 메시지를 전할 자격이 있는가 자괴감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원토록 유월절 어린 양을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제게 무슨 자격이 있어사가 아니라 다만 주께서 하신 말씀대로 하게 되는 것은 주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들에게 그리하는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낙심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려 할까요? 그 비결을 말합니다.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으니(11-18)

11절을 봅시다. 바울 사도의 자랑입니다. 그는 친필로 이 핀지를 썼습니다. 그가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그들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하였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썼습니까?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썼습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임입니다(13).

그러나 바울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14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저는 주의 말씀대로 행하면 주께서 어떤 병자도 고치셨으니, 주의 말씀 전하는 사람은 병도 걸리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내요 동역자는 암에 걸렸고, 육개월만에 제 곁을 떠났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딜 봐도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2장 2절 말씀이 제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돌아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붙들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리고서부터 무슨 일을 겪을 때마다 제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외 다른 것은 없는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제 속에 조금씩 온유의 열매가 맺혀져 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제가 전할 메시지의 핵심임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믿음만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레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15). 주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못해 에덴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는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온전하게 새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누가 어떻다 저떻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증거합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6-1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선을 행하는 일에 낙심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때에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 소망으로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2018 갈라디아서 6강 메시지 0601-0618 김요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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