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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로마서 12강 정여호수아

로마서 9:1-33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9:16)

로마서 8장 끝 절에서 바울 사도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9장에 들어오면서 그는 자신의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대인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을 볼 때 그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평소에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다가도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 하나님께 대해 서운한 마음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이끌어 가시는가?’ 싶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대인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나도 결국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그의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 때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 새롭게 읽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찬찬히 객관적으로 성경본문을 관찰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바울 사도가 성경 본문에서 무엇을 발견하였습니까?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1-9)

1절을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그는 하나님 앞에 선한 양심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그에게도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바울 사도처럼 마음에 근심과 고통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대한 실제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이런 질문이 있을 때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시 성경을 읽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믿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 확신하게 되고, 그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사도의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3,4절을 봅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바울 사도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수고로 인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얻고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형제 곧 골육의 친척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져 저주를 받는 길로 가는 것을 계속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 일은 그에게 있어서 큰 근심이요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들 대신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 얻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이렇게까지 간절하고 그들이 구원 얻기를 원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자신의 동족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4,5절을 봅시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곧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그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먼저, 그리고 직접 보았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가장 먼저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백성이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습니다(요한복음 1:11).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 사도는 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만민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결국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하여 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이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다같이 6,7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성경을 다시 읽고 자세히 본문을 관찰하면서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폐하여지지 아니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6절 하반 절을 다시 봅시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가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뿐 아니라 이삭을 낳기 전에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창세기 16:15). 그리고 후처 그두라를 통해 낳은 여섯 명의 서자들도 있었습니다(창세기 25:1,2).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여덟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무엇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8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바울사도는 육신의 자녀, 즉 혈통을 따라 난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 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9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사라에게서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고민은 이 말씀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가 약속의 자녀가 되는가라는 고민이 계속되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 성경을 또 자세히 읽고 묵상에 묵상을 거듭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읽고, 또 기도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생각하였습니다. 고난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고난 끝에 무엇을 발견하였습니까?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10-33)

10절을 봅시다. “그뿐 아니라로 시작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 뿐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창세기부터 새로 읽는 가운데, 아브라함에 이어 이삭을 읽었습니다. 리브가가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습니다(10). 그런데 11절 상반 절을 봅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2절을 봅시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뭐지?’ 싶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생각을 벗어나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보다 더 심한 말씀을 또 읽었습니다. 13절을 봅시다. 또 기록 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에서가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기 때문에 택함을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에서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을 해서 택함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팥죽 사건 이전에, 에서가 결혼하기 훨씬 이전에 두 사람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로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11절 하반 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됩니다.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마음에 힘든 생각이 듭니다. 이삭이 약속의 자녀로 택함 받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시니 선뜻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왜 누구는 택하시고 누구는 택하지 않으십니까? 왜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십니까?’ 따지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14절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은 불의한 분 아닌가?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이 아니신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이 하나님께 불의가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같이 15절을 읽어봅시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이 말씀은 출애굽기에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창세기 다음에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풀리지 않았던 문제가 출애굽기에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다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계속 읽으면 그 문제가 또 풀립니다. 또 문제가 생기면 또 계속 읽으면 그 문제가 또 풀립니다. 성경 본문이 문제를 만들고, 또 그 문제를 풀어줍니다. 그래서 성경공부가 재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힘들어지자, 하나님이 눈에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그만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고는 이것이 자신들의 신이라고 하고는 거기에 번제를 드리고 먹고 뛰놀았습니다(출애굽기 32:4-6).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진노하셨고 이스라엘을 진멸하고자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시면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의 영광을 보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19절을 찾아서 읽어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애굽의 은혜를 입고도 금송아지를 숭배한 이스라엘은 그 행위로서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다 그 죄로 말미암아 진멸 당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진멸하지 아니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될까요?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3장에서 이미 이같이 증거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3:10-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한마디로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진멸받아 마땅한 진노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에베소서 2:1). 이런 사람을 구원하신 분은 오직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증거합니다. 다같이 16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가 원함으로 된 일도 아니요,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로서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생각할 때 또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또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생기는 문제가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 또 그 문제가 어디 쉽게 풀리겠습니까? 17절을 봅시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출애굽기를 보면 바로가 아주 완악합니다. 하나님이 무시무시한 재앙을 통해서 여러 번 그를 치셨건만 바로는 쉽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살만 하면 또 완악해지고 숨 쉴만 하면 또 완악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바로를 세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의 강펀치를 한번만 맞고 KO되었을 텐데 그는 10라운드까지 갑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바로의 완악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실뿐 아니라 하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를 듣고 어떤 사람 중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절을 봅시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하나님께서 바로를 완악하게 만드셨다면 누가 그에게 허물을 돌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시는데 누가 그 뜻을 거스를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바로가 완악하게 된 것은 그를 완악하게 하신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20,21절을 봅시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한 덩이의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되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인생이 우리를 지으신 주인 되신 하나님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드셨는가 따질 수 없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왠지 마음이 개운치 않습니다. 바로나 천한 그릇이 되는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선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기 맘대로 하는 독재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독재자이십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쥐꼬리만 한 권세만 있어도 그것을 악용하고 횡포를 부리는데 쓸지라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성품을 따라 그 주권을 선하게 쓰십니다.

어떻게 선하게 쓰십니까? 22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습니다(22). 이는 하나님은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23). 이 긍휼의 그릇이 누구입니까? 24절을 봅시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바울사도는 이를 어떻게 확신했습니까? 25,26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하셨습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하셨습니다(27,28).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하셨습니다(29). 이 말씀대로 의를 따르지 아니했던, 하나님 백성 아니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의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었습니다(30). 그러나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31). 그들이 어찌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행위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32). 그리함으로 기록된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는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가 되었습니다. 그를 믿지 아니함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33).

이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택하심, 즉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고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16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은 우리가 원했다거나 우리가 노력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부끄럽지만 저는 한 때 제가 스스로 잘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착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를 택하셨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저를 목자로 부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단 1%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목자가 되고 보니 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며, 실수를 밥먹듯이 하는 사람이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감정과 혈기를 다스리지 못해 주변 사람을 괴롭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저는 제가 이렇게까지 자격 없고 형편없고 대책 없는 죄인인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 같은 자를 주의 종으로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셨는지를 생각할 때 너무나 놀랍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시간 자격 없고 보잘 것 없는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구원역사에 쓰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긍휼하심을 의지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자기 생각과 의를 내려놓고 먼저 주의 뜻을 구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사도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긍휼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원함과 의지와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앞으로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을지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능력이 많으시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지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 지요!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끝까지,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로마서 9:16)

 

 

2020년 로마서 12강 메시지 로마서 0901-0933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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