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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을수양회 주제 메시지                                                                                                  정여호수아

로마서 7:7-8:39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로마서 8:39)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7:7-13)

7절을 봅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바울은 앞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3:21). 또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다고 하였습니다(4:15). 또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7:5). 우리는 율법에 대한 이 같은 부정적인 말을 계속 듣다보니 그러면 율법 자체가 죄인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바울 사도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다고 합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바울 사도 자신이 죄를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신이 탐심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7). 십계명 중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입니다(출애굽기 20:17). 앞에 아홉 가지 계명은 행위로 옮기지만 않으면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탐내지 말라는 이 마지막 계명은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문제였습니다. 다른 것은 다 지킬 수 있었는데 이것만큼은 바울 사도의 마음에 걸림이 되었습니다. 죄가 마지막 이 계명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타서 바울의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습니다(8). 탐내지 말라고 하니 더욱 그 마음속에서 갖고 싶은 욕심이 생겨 바울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에 율법을 알지 못할 때에는 그는 죄를 지으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계명이 이르자 그 안에서 죽어지내던 죄가 살아나고 그 살아난 죄가 바울을 죽였습니다(9).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바울에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10).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그를 속이고 그것으로 그를 죽였습니다(11). 다시 말하면 죄가 계명을 기회로 그를 속이고 그 계명으로 그를 죽인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이 죄는 아닙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12). 그러면 선한 것이 바울에게 사망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입니다(13). 이로볼 때 율법의 역할은 사람으로 죄를 깨닫게 하고, 또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왜 거룩한 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소욕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7:14-25)

다같이 14절을 봅시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그러니까 문제의 원인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해야 할 사람에게 있습니다. 즉 사람이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합니다(19).

바울 사도는 율법과 씨름하는 중에 한 가지 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1절을 봅시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곧 그의 속에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법과 악을 행하고자 하는 육신의 법이 서로 대치하여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줄다리기에서 항상 악을 원하는 육신의 법이 이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지체 속에서 악을 행하고자 하는 육신의 법, 선을 행하려는 마음의 법을 항상 이겨서, 그를 죄의 법으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눈을 뻔히 뜨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22,23). 그는 이제 죄를 짓게 되는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의 노력으로는 그의 안에 있는 죄의 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신에게 절망하며 그에게서 탄식이 나왔습니다. 24절을 봅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런데 그는 이 절망과 탄식 끝에 또 무엇이라 증거합니까? 다같이 25절을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그가 왜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그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데,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마음과 몸이 따로 따로 움직여서 죽음의 고통 가운데 있는 자신을 구원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가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어떻게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 주셨습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11)

다같이 8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음이라사람이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 있으면 바울사도처럼 죄로 인해 끊임없이 정죄의식에 시달리며 사망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였습니까? 3,4절을 봅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율법은 행할 때라야만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말미암은 연약한 사람은 율법이 신령한 줄 알지만 이를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이룰 수 없었던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6:23).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모든 죄를 그에게 다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을 따라 행할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치러야 할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루셨습니까? 죽으셨습니다. 저주 받은 몸이 되어 나무로 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누구에게 이렇게 하셨습니까? 4절을 다시 봅시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입니다. 즉 바울 사도처럼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믿는 사람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육신의 소욕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같이 자신의 속에 있는 영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육신과 영의 소욕이 달라 고통합니다. 이런 중에도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5).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7). 때문에 육신에 있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8).

그러나 9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게 됩니다.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함은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음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2:3).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면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에 거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10절을 봅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다같이 11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누구든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면 그 사람 속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그 사람 안에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곧 하나님께서 그 사람 속에 있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몸이 영을 따르지 않아 죽을 것 같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그 죽을 몸도 살리실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 소망으로 삽니다. 그러면 이 소망, 죽을 몸도 하나님께서 살리실 소망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와 함께 영광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2-18)

12절을 봅시다.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닙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13). 그런데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그야말로 고난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14절을 봅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15). 이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해 주십니다(16).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종의 상태에서 해방된 것 만해도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종은 주인의 눈치를 보며 두려워합니다. 항상 긴장해야 하고 부자유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근본적으로 아버지와 은혜와 사랑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거리낌이 없습니다. 실수를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실수를 해도 아빠 아빠하며 천진난만하게 달려가 그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인제 겨울 학생수양회에서 산책을 하는 도중에 요한목자님 등을 향하여 감히 큰 눈덩이를 던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아니었습니다. 레베카 목자였습니다. 그때 저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정말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곧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자한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14절을 봅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종은 아무리 잘해도 상속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아무리 부족해도 상속자입니다. 상속자는 아버지가 소유한 재산뿐 아니라 권리나 특권 등 모든 것을 물려받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상속받는 것은 장차 누릴 특권과 영광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도 함께 상속 받는 것입니다. 자녀에게는 주어지는 영광과 특권에 따르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다시 사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생각했습니다. 이를 생각한 끝에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다같이 18절을 봅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현재 받고 있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게 되면 그 고난 자체에 빠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고난은 어떤 고난이든 힘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무서워서 자꾸 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은 고난으로 끝이 아닙니다. 장차 받게 될 영광이 있습니다. 이를 실제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하되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저는 요즘 내가 과연 무슨 영광을 보기 위해 이 길을 가고자 하는 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목자의 삶이 기쁘고 마냥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 점점 고난의 강도가 강해지고 세지다 보니 정말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8:19-25)

20절을 봅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도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들도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며 탄식하고 고통 하는 이유는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온 땅을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17). 그러나 주님 다시 오실 그날, 피조물들도 이제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그 날을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 11:6-9).

그런데 고통하며 탄식하는 것은 피조물뿐이 아닙니다. 23절을 봅시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에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는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수양회에서 말씀 받을 때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지만 다시 금방 자만심과 쾌락에 빠지고, 그래서 자신에게 임했던 평화와 기쁨도 사라지고 맙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영혼은 속량 되었지만 우리의 몸이 아직 속량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아직도 죄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요, 또 세포 세포마다 정욕이 들어박힌 죄악 되고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단단히 결심을 하고 잤는데도 아침에 일어나 보면 해가 중천일 때면 억울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투쟁을 하는데도 인터넷 서핑하다가 음란한 그림을 보고 나면 신선했던 마음은 다시 더러워지고 시들어버립니다. 정말 몸이 원수 같고 세상이 밉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광의 자유를 원합니다. 머리 쥐어뜯으며 갈등하지 않아도, 매주 소감 쓰며 회개하지 않아도, 그냥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 원수 같은 몸을 입고, 죄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온전한 자유는 우리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첫 열매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들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 그를 믿는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몸 그대로를 가지고 살아나는 게 아닙니다. 그 날에는 이 썩을 몸 대신에 썩지 않는 몸으로, 이 욕된 몸 대신에 영광스런 몸으로, 이 약한 몸 대신에 강한 몸으로, 이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42-44). 곧 그 날에는 영혼의 속량뿐 아니라 몸의 속량까지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가 장차 얻게 될, 현재 받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러면 몸의 속량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24,25절을 봅시다. 우리가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닙니다(24). 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25).

그런데 우리가 이 소망이 있더라도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여 우리의 힘만으로는 끝까지 참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누가 도와주십니까?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26-28)

26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우리가 고난이 계속되고 죄가 반복되면 연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때에는 기도로써 힘을 얻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조금 힘들 때의 일이지, 너무 힘들면 기도조차 할 수 없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같이 연약한 우리를 성령께서 친히 도우십니다.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친히 간구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27). 우리의 죄악 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이르지 않도록 걸러주시고, 우리의 부족함과 필요를 아심으로 이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이 잘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일이 어렵게 돌아가면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는 성공이나 실패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같이 28절을 봅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선한 뜻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29-30)

29,30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곧 하나님은 우리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자 하십니다.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본으로 삼으셔서 우리 모두 그를 닮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선한 뜻입니다.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매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에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나 한 사람을 위해 이미 오랜 동안 섬세하게 일해 오셨고, 또 앞으로의 계획까지도 세워두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여러 많은 고난이 있지만 그 모든 일이 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시고, 장차에는 영화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의 삶은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실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믿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1-39)

31절을 봅시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같이 32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가장 아끼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습니까? 또 우리의 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셨는데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33)? 또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지금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호해주시고 친히 간구해 주시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34)?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겠습니까(35)? 지금 우리의 처지가 기록된 말씀처럼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을지라도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36).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37,38).

저는 이번 수양회를 오면서 심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수양회 하루 전 제가 마음으로 오래 동안 섬기던 어떤 형제로부터 앞으로 우리 모임에 나오지 않겠다는 정중한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온 몸에서 힘이 쫙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 자신과 형제자매들을 붙잡고 있는 질기고도 강한 죄의 세력 앞에 제가 완전히 KO패를 당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내가 과연 앞으로 계속 캠퍼스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여러 복잡한 생각에 머리는 계속 아프고 메시지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양회 와서 다시 말씀을 통해 위로와 힘과 소망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도 저를 고발하고 정죄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붙들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당하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는 잠깐의 고난이며, 또 이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받는 이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 곧 제 몸의 속량과는 비교 할 수 없음을 마음에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저를 향한 사랑을 끊지 않으실 것이며, 저로 능히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끝까지 붙잡아 주실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가 끊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기고 기쁨으로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혼이 구원을 얻었지만 아직도 연약한 육신을 입고, 죄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다시 죄에 빠지고 탄식하며, 또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는 데 따르는 고난 때문에 고생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입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과, 우리를 향하신 선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끊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아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로마서 8:39)

 

 

 

2019년 가을수양회 메시지 로마서 0707-0839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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