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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 사도행전 16강                                                                                                           김요한

사도행전 20:1-38

 

 

회개와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사도행전 20:21)

가을수양회를 마치고 말씀공부를 하는데 어떤 형제가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데 지금 여기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으면 하나님 나라 간다고 그냥 맥 놓고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믿음으로 도전한다며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막 해보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럴 때 믿음으로 사는 본, 모델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소감을 들으면 공감이 가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힙니다. 성경에는 그 믿음의 증인들이 허다하게 많습니다(히브리서 12:1).

오늘 본문은 치열하게 믿음으로 산 바울 사도의 증언입니다. 곧 소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강론하기를 날이 새기까지(1-16)

1절부터 봅시다. 에베소에서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는 도시였고, 마게도냐는 지금의 유럽 발칸 반도 북쪽 지역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 곧 발칸 반도 남쪽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2). 그는 선교 여행 동안 에베소에서 그러한 것 같이 어디서나 제자들을 세우고, 또 그 제자들을 불러 권하였습니다. 복음역사는 복음을 듣고 따르는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남은 사람이 복음역사의 핵심이 됩니다.

3절을 봅시다.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있다가 배타고 다시 바다 건너 수리아로 가고자 할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발칸 반도의 북쪽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방해가 있으면 돌아가기도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바울과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선교여행에서 만난 각 지역 동역자들,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였습니다(4).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포함한 바울 일행을 기다렸습니다(5). 그들은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 일주일 머물렀습니다(6).

7절을 봅시다. 그 주간의 첫날, 곧 주일에 그들이 떡을 떼려 하여 모였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고, 같이 식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입니다.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식사 후에 바울이 그들에게 강론하였는데, 이튿날 떠나야 하였기에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열정입니다.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밤중까지 강론이 이어지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8,9절을 봅시다. 그들이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바울의 강론을 듣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일으켜보니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 저런 말 하며 떠들었습니다. 강론을 멈춘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하고(10), 다시 올라가 또 떡을 떼어 먹고는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습니다(11). 사고가 있었지만 강론은 그렇게 날 밤이 새기까지 계속되었고, 유두고라는 청년은 살아났습니다(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보면 별별 일들이 다 생깁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강론 중에 실수로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고, 그야말로 죽은 몸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이라도 이기고 현재에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로마서 8:37). 사망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38,39).

바울은 생각할 것이 많아서인지 걸어서 앗소에 갔고, 거기서 배를 타고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 아시아 땅 밀레도에 이르렀습니다(13-15). 16절을 봅시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가려 함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오순절에 거기 모이는 사람들에게 선교 보고도 하고,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 교회의 연보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주님의 때를 따라 움직이고자 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가까운 밀레도에 잠시 머물면서 바울 사도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이 고별 메시지에는 바울 사도가 복음역사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지가 들어있습니다.

먼저 그가 무엇을 하였습니까?

 

회개와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17-27)

17절을 봅시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였습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이년이 넘게 말씀을 듣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따로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강론하여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한 곳이었습니다. 얼마나 가보고 싶었겠습니까.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에베소를 지나가지만, 바울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의 제자들에게도 권할 말이 있었습니다. 특히 교회 장로들에게 할 말이 있었습니다. 장로는 교회 생활을 오래한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18절을 봅시다. 그들이 오매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그들은 바울을 알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복음역사는 행함입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여 말로 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야고보서 2:17). 행함이 있어야 복음이 전하여집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행하였습니까? 19절을 읽어봅시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바울 사도는 먼저 자신이 모든 겸손을 행하였다 하였습니다. “겸손겸손은 손을 앞으로 모으고, ‘제가 부족합니다하고 자세를 낮추는 것도 겸손이라 할 수 있지만, 나아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도 겸손이지만, 여기서의 겸손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역사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자 자신의 뜻을 항상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났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말씀을 읽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따를 때 겸손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야말로 something입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nothing으로 만드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온전한 겸손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리새 교육을 받으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을 something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리하였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부활하신 예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는 이후에 자신을 이같이 사랑하신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 그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따랐습니다. 겸손하고자 하였고, 겸손하였습니다.

저는 something이 되고자 어릴 때부터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괜찮은 직장을 다니게 되었지만, 스스로를 돌아볼 때 something이 아니었습니다. 교수가 되고 목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something은 아니었습니다. 늘 부족한 자신으로 인해 괴로웠습니다. 이런 제게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6절에서 8절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신을 something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but made himself nothing,”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8) ‘천 번을 불러도 내 눈에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은 십자가의 그 사랑 나를 살리려 하늘 보좌 버리신 나를 사랑하신 분 그 분이 예수요천 번을 불러도 내 눈에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이 흘린 눈물은 안타까움이요 애통이었습니다. 자신과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고통 하는 사람에 대한 애통, 무엇보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겸손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겸손과 눈물로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았습니다. 말씀을 아는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희한한 논리로 복음을 전하고 복음대로 사는 바울을 시험하였습니다. 말씀을 아는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복음을 듣고 생명의 삶을 살고자 하는 성도들을 희한하게 시험하였습니다. 지금도 여러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믿으려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서는 안 되고,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여야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멀어지도록 시험합니다.

이들을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 사도는 모든 겸손과 눈물로 이같은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기고 거리낌 없이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어디서나 에베소 성도들에게 전하여 가르쳤습니다(19,20).

그가 그렇게 거리낌 없이 가르친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같이 21절을 읽어봅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민족에 대해 차별이 없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이든 누구에게나 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복음, 좋은 소식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 둘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 회개는 후회또는 반성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회개, 悔改, repent, 돌이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누가 회개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온전해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회개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회개할 수 있을까요? 살다보면 여러 실패를 겪고, 후회하고 반성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가 있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렇게 바울 사도의 회개의 증언을 받아들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브리서 11:1).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증언을 들을 뿐입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사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대로 죽으시고, 말씀대로 다시 사셨고, 말씀대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말씀대로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대로 행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죽을 몸도 살아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있게 됩니다. 이를 믿는 믿음을 가지도록 바울 사도는 끊임없이 말씀을 따라 증언하였습니다.

22절을 봅시다. 바울 사도는 이제 그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그에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 하셨습니다(23). 이를 알면서도 그가 굳이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그는 그가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 그가 달려갈 길이요,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라 하였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회개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처음부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셨습니다(마가복음 1:15). 바울 사도는 자신이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오직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 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 15:10). 하나님도 모르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를 증언하는 일을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라 하였고, 이 길을 그가 달려갈 길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25) 그러므로 오늘 바울 사도는 그들에게 증언하기를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그가 깨끗하다하였습니다(26). 그 사람들이 구원 받는 일은 바울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들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그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그들에게 전하였음이라 하였습니다(27). 바울 사도는 이리저리 눈치 안 보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거리낌 없이 다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별메시지 마지막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부탁합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28-32)

28절을 봅시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합니다. 생각하고 행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 가운데 그들 장로들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습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그들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그들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을 바울 사도가 아노라 하였습니다(29,30). 그 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예수께서, 또 바울 사도가 증언한 것처럼 이런 사람들이 항상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할 일은 일깨어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이 년이나 강론한 것을 넘어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31). 그리고 그들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 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그들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하였습니다(32). 장로들, 즉 리더, 곧 목자가 주의 역사에 쓰임 받는 비결은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사람 살리는 일에 쓰임 받으려면 주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으면 그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마태복음 13:8).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베드로 사도도 장로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베드로전서 5:1-3).

특히 어떤 부분에 대해서 본이 되라고 하였습니까?

 

이 손으로 쓰는 것을 충당하여(33-35)

33,34절을 봅시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복음역사든 무슨 일이든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돈이 필요하다 하여 돈을 탐하지 않고 스스로 그 쓸 것을 충당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복음역사에 쓰임 받을 때 이렇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 518절에서,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탐심에 있어서는 되지 않음을 강조하였습니다.

35절을 봅시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면 복음역사에 염려 없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6:35,38,30).

그리고 헤어졌습니다. 헤어지면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함께 기도하니(36-38)

36절을 봅시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헤어짐은 슬픈 일이지만, 그들은 모든 겸손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였습니다(37,38).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사도 바울에게는 그 자신이 달려갈 길이 있었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는 회개와 믿음을 증언하는 삶입니다. 이는 우리가 읽은 바 그 동안의 사도행전 말씀과 또 로마서 말씀으로 볼 때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한 끝에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회개와 믿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힘든 것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 더욱 가까이 있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속이 시끄러워서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용서할 수 있나요? 회개하는 사람, 하나님께 대한 회개가 있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말씀대로 삽니다. 용서하려면 힘이 들지만, 때로는 고통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으면 지금 여기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학생은 공부를, 학사는 자신이 할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사도 바울에게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 또한 회개와 믿음을 삶을 지금 여기서 살게 복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사도행전 20:21)

 

2018-2019 사도행전 16강메시지 2001-2038 김요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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