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INJE UBF

메시지

조회 수 5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2023년 사도행전 19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사도행전 20:1-38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바울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행전 20:31)

오늘 말씀은 바울 사도가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고별 메시지입니다. 고별메시지인 만큼 바울 사도의 목자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같은 목자의 길을 가고 있고, 가고자 하는 우리가 무엇보다 깊이 새겨야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께서 오늘 말씀 통해 이 시대를 목자의 삶을 감당할 힘과 방향과 지혜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합니다. 가는 도중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1-12)

에베소 말씀 사역을 통해 소아시아가운데서 일어난 놀라운 구원역사를 체험한 바울 사도는 소요가 그치자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에베소를 떠나 2차전도 여행 때 개척했던 마게도냐로 갔습니다(1).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지방을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 곧 고린도에 이르러 거기 석달동안 있다가 배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고자 공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배 타고 가고자 하는 계획을 수정하여 걸어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3). 돌아가는 그의 여행 일정에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였습니다(4). 7명은 누구입니까? 바울의 1-3차에 걸친 사역의 열매들로 각 이방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왜 이들을 동행하게 했을까요? 그들이 각 교회를 대표하여 흉년으로 굶주리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로마서 15:26). 이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돌아보고 또 실제문제를 섬기는 일에 동참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가 성령안에서 서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려 한 것입니다.

5,6절을 봅시다. 7명의 대표자들이 먼저 드로아에 도착했고, 바울과 누가를 비롯한 선교팀들이 5일 후에 합류하여 일주일동안 머물게 됩니다. 7절을 봅시다. 그 주간의 첫날 주일에 떡을 떼려 모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늦은 밤중까지 강론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듣고 있다가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일으켜보니 이미 죽었습니다(9). 하나님의 말씀 듣다가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바울이 말씀을 너무 오래 강론하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같이 듣고 있던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며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믿는데 예기치 못한 사건을 마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데 그 사람이 살아나기보다, 도리어 이상하게 되거나, 죽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경험할 때 불신과 원망, 상처, 온갖 쓴 뿌리 같은 것이 올라와서 속이 시끄럽게 되거나 또는 감정적이 되어 떠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당혹스런 사건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즉시 내려가서 죽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몸을 안고는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하였습니다(10). 그러자 호흡이 끊어졌던 유두고가 다시 숨을 내쉬기 시작했습니다. 죽었던 그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엘리야가 죽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 같은, 엘리사가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것 같은, 베드로가 죽은 여제자 다비다를 살린 것과 같은 일이 그 밤중에 일어났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께서 바울의 믿음의 간구를 들으사 죽은 유두고를 살려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두신 뜻은 항상 선하심이 드러났습니다. 주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일에 바울 사도가 부활 믿음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항상 선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눈에 돌아가는 상황과 형편에 어떻게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미리 결론짓고 낙심하거나, 떠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능히 이루심을 믿어야 합니다(빌립보서 1:6). 제가 이번 여름수양회 역사를 생각할 때 심히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11절을 봅시다. 바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올라가서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습니다. 이 일로 사람들이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습니다(12). 무엇보다 바울 사도가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나아갈 큰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23).

이후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겨(13-27)

13절을 봅시다. 바울 일행은 앞서 배를 타고 앗소로 갔고 바울은 홀로 걸어서 갔습니다. 앗소에서 합류하여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 밀레도에 이르렀습니다(14,15).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입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기 위해 에베소를 거치지 않고 배를 타고 가기로 작정했습니다(16). 이에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오게 하였습니다(17). 바울은 이제 그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직감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고, 시간은 너무도 부족합니다. 그들의 목자요, 믿음의 선배요,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제 마지막 고별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자신이 아시아에서 어떻게 목자생활을 했다고 증거합니까(18)?

같이 19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앞에서 보면 에베소 역사는 바울이 날마다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함으로(19:9),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음으로 일어난 역사라고 이야기했습니다(19:20). 그래서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 이 모든 역사는 바울 사도의 모든 지혜와 열정, 혹은 은사나 탁월한 성경 실력으로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긴 역사였음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인한 시험을 참고 인내하는 역사였음을 말합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모든 겸손을 말합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고, 자기를 낮추는 마음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또한 겸손은 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 속에서 이웃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을 혈통이나 배경이나 조건으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주신 본질적인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비록 거스르고 반발하고 대적하는 자들일 지라도, 그들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낮아지는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며 자리를 낮추고 목소리를 낮추고 주께 엎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바울은 눈물을 말합니다. 우리가 언제 눈물이 나옵니까? 낮아져 섬기는 자리, 실패와 아픔과 시련의 자리에 있을 때 나옵니다. 아무리 섬겨도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로 인해 탄식하고 애통하고 근심하고 속앓이를 하면서 흘립니다. 그렇게 나름 섬긴다고 섬기지만 실제로는 자기 속에 영혼들을 향한 어떤 긍휼과 사랑의 마음도 없고, 그래서 주께 드릴 것은 죄와 허물밖에 없어 탄식함으로 흘러나옵니다.

이를 볼 때 바울의 목자생활은 결코 신나는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지적 탁월함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닌 많이 참고 많이 아파하고 많이 견디는 내적 성숙함으로 감당한 생활에 있었습니다. 결국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화려한 말솜씨나 지혜나 지식이나 힘이 아닙니다. 겸손과 눈물과 인내입니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옛날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을 돕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진심과 애정을 쏟은 것만큼 진심과 애정으로 돌아오면 얼마나 좋습니까? 진심 대신 오해, 애정 대신 상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섬겼다가 상처를 받고 환멸을 느껴 사람 자체가 싫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시련을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견디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모든 겸손과 눈물로 양들이나 역사를 섬겼다고 하지 아니하고 주를 섬겼다고 고백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양들을 섬기는 목자이기에 앞서 주를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섬기는 자리에 믿음으로 굳게 서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거스르고 대적하고 박해하던 자신을 주께서 일체 오래 참으시고, 어떤 긍휼과 사랑으로 섬겨 주셨는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디모데전서 1:16).

그러면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를 섬기면서 구체적으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봅시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그들에게 전하여 가르쳤습니다.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 말하면 바울 자신에게 큰 피해가 올 수 있습니다. 여러 비난과 반발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익한 것이라면 어떤 댓가를 치른다 할지라도 거리낌 없이 다 가르쳤습니다. 거리낌 없이 가르친 그 유익한 것의 실제 내용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봅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했습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있는 죄인이며,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사하셨음을 믿는 믿음을 갖도록 끊임없이 도운 것입니다. 이를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동일하게 가르쳤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는 이런 인간의 실존을 제대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복음을 거리낌 없이 가르치고 증거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볼 때 주로 MBTI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자신의 도덕적인 기준이나,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서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복음의 말씀에 기초해서 사람을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안경을 끼고 사람을 보고 문제를 보고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놓치는 순간 우리는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을 하며 인간성이 훌륭한 사람들을 볼 때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특히 생기발랄하고 즐겁게 살고 있는 캠퍼스영혼들에게는 회개하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개의 복음을 믿고 전하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다보면 회개의 복음을 실제로 전하지 못하고, 지식적이고 교훈적인 성경공부만 하다가 끝나기 쉽습니다. 복음을 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일대일을 해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진전이 없습니다. 일대일을 1년을 하고 2년을 하고 3년을 해도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과 복음적인 가치관을 가질 때 이에 속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로마서 3:10). 또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로마서 3:23).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의로울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추하고 더러운 죄인입니다. 우리가 이를 깊이 알고, 깨닫고, 또 깨닫게 하고 증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죄사함의 복음의 능력이 역사하는 생명의 수양회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22절을 봅시다. 이제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한고 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고 합니다(23).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이 달려갈 믿음의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합니다(24). 복음을 따라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고, 복음만을 믿고 의지해서 사람을 돕고, 이 복음을 증거하고자 자기의 생명까지 기꺼이 드리고자 하는 바울 사도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당당히 말합니다(26).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다고까지 말합니다(27). 그러므로 이를 듣고 받은 에베소 장로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합니까?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28-38)

28절을 봅시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먼저 바울 사도는 성령께서 너희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는 감독자로 세우셨음을 알고 삼가야 한다고 합니다. ‘삼가는 것깊이 주의하고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를 위하여 그렇게 하고, 또 온 양떼를 위하여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왜 그들이 이같이 삼가야 합니까? 이는 바울 사도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그들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9). 심지어 지금 함께 온 자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30). 그런데 이제까지 그들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그들의 목자 바울은 떠나갑니다. 다시 그들에게 오지 못합니다. 그들을 더 이상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 같이 31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바울 사도는 이미 그들에게 사나운 이리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것은 자신이 삼년 동안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면서 이미 가르치고 전해 준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들이 이를 기억하고 붙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로 볼 때 그들이 배운 것이 부족하여 어긋난 길을 가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뭘 몰라서 문제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듣고 받은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머리가 커질수록 자기 고집을 꺾지 않으려고 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흐를수록 자기 고집을 피우고 욕심을 채우며 자기 합리화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신앙의 연수가 흐를수록 더더욱 배운 말씀을 기억하고 붙들고 순종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이 일생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도 타락하지 않은 비결일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32절을 봅시다. 그는 주와 주의 은혜의 말씀만을 의지하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또한 금이나 은이나 의복에 대한 일체의 탐심에 끌려가지 않았습니다(33). 양들에게 본이 되고자 스스로 일하며 필요한 것을 충당했습니다(34). 또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곧 주의 말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주는 생활에 힘썼습니다(35).

제가 주님과 주의 종들의 수년간의 섬김과 눈물로 훈계로 지금 목자의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머리가 굵어지고 마음이 높아졌는지 거리낌 없이 유익한 것을 증거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형제를 거리끼게 하는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역사와 진리를 세운다면서 겸손과 온유함보다 조급함과 분노로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공동체에 힘을 빼고 형제와 자녀들을 실족하게 하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그것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말씀을 통해 저를 향한 주님과 주의 종들의 겸손의 섬김과 눈물을 잃어버린 것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역하는 저를 위해 모든 겸손과 눈물로 일체 오래 참으신 주님을 제가 어느새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이 사랑으로 다시 돌아와야 겠습니다. 저를 위해, 그리고 양떼를 위하여 더욱 정신을 차려야 겠습니다. 목자로서 삶의 기반과 질서가 다 끝나고 무너져 버린 것 같은 지금 이때 다시 주께 엎드리고, 주를 섬기는 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 사도는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양들을 섬겼던 선한 목자였습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명을 더욱 중히 여겼던 사도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바울 사도와 같은 귀한 주의 종들의 섬김과 사랑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이를 항상 기억함으로 자기를 위하여, 양떼들을 위해 삼가는 겸손과 섬김의 자리로 계속 나아갈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생명의 복음을 누리고 나누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사도행전 20:31)

 


2023년 사도행전 19강 메시지 2001-2038 정여호수아.hwp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9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24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8.20 46
48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23강 메시지(천모세) file 이제현 2023.08.13 62
47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22강 메시지(김아브라함) file 이제현 2023.08.09 44
46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21강 메시지 (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7.30 51
45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20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7.16 52
»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19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7.10 54
43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18강 메시지(천모세) file 정여호수아 2023.07.02 65
42 사도행전 2023 사도행전 17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6.25 68
41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16강 메시지(정여호수아) 정여호수아 2023.06.18 45
40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15강 메시지(김아브라함) file 정여호수아 2023.06.11 53
39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14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6.05 56
38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13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5.28 48
37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12강 메시지(천모세) file 정여호수아 2023.05.21 49
36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11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5.14 65
35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10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5.07 50
34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9강 메시지(김아브라함) file 정여호수아 2023.04.23 35
33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8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4.16 68
32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7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3.28 50
31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5강 메시지(김아브라함) file 정여호수아 2023.03.12 61
30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4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23.03.05 49
Board Pagination Prev 1 2 ... 3 Next
/ 3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