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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 사도행전 14강                                                                                                  정여호수아

사도행전 17:1-18:28

 

 

두려워하지 말며 말하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사도행전 18:9)

바울 사도는 아시아에서 말씀전하기를 힘쓰다가 주의 뜻에 순종하여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건너가 유럽선교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성을 소동하게 하여(17:1-9)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바울 사도가 빌립보로 갔을 때 옷감장사 루디아의 집과 또 간수의 집이 주를 믿고 세례를 받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후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크고 번성한 도시라 이곳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1). 이에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였습니다(2). 바울사도는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의 회당이 있으면 먼저 그곳에 들어가 강론하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기 때문입니다(로마서 9:4,5).

그러면 바울이 강론한 성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절을 봅시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4).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였습니다(5). 야손의 집을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자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6).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6,7)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반역죄로 몰아갔던 것처럼 이들도 바울과 실라를 로마에 반역하는 죄인들로 고소했습니다. 이에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였지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었습니다(8,9).

이같이 바울 사도가 어느 선교지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핍박하고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 모르는 헬라인들은 복음을 듣고 영접하는데, 하나님께 택함 받은 유대인들이 도리어 대적자가 되어 복음전파를 방해하니 바울 사도의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이런 일을 계속 당하면서도 바울 사도는 또 유대인의 회당에 찾아가,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과거에 자신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런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빛으로 찾아와 일방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자신을 생각할 때, 자신처럼 율법과 전통에 매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적하고 비방하는 동족들을 볼 때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이 생겼습니다. 로마서 93절에서 그는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신의 형제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했습니다(로마서 9:3).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든 먼저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 곳을 찾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현재 저의 가족과 친지들 중에 아직 예수님을 믿는 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가족들을 생각하면 늘 제 마음이 무겁고 또 아픕니다. 가족이기에 더욱 복음 전하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상한 심정을 가지고 계속해서 저의 가정에 복음 증거 하는 일에 도전하여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로 인해 데살로니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된 바울과 실라를 형제들이 밤에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7:10-15)

10절을 봅시다. 베뢰아에 도착한 바울은 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다같이 11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먼저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습니다.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할 때에 다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상대가 말을 할 때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고 생각하는 너그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런 품성이 말씀에 대한 자세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상고한다는 말은 자세하게 골라내다’ ‘조사하다’ ‘탐색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자세히 생각 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이 정말 맞는지? 틀리는지?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그 뜻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질문이 생기면 또 성경을 읽고 생각했습니다. 잘 이해가 안되면 이해가 될 때까지 본문 말씀과 씨름했습니다. 이를 날마다 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을 봅시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로 볼 때 믿음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베뢰아 사람들처럼 말씀을 듣되 너그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받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듣고 받은 말씀을 성경에 기초해서 깊이 상고, 곧 생각할 때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성경을 이 같은 자세로 듣고 읽고 생각을 하면 이것이 그러한가?” ‘정말 그런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때때로 내가 믿음이 없어 의심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는 믿지 않고자 함이 아니라 진짜 믿음을 갖기 위해 한 발자국 더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기존의 생각과 편견을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받는 자세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자라고 성숙해지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의 성경공부로 성경지식이 쌓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속으로 이미 말씀을 잘 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알고 있는 본문에 대해서 말씀을 공부하거나 메시지를 들을 때는 이미 아는 내용이므로 질문이 생기지도 않고, 또 지겹다고 여기며 대충 흘려들을 때가 실제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형제들과 일대일을 준비하면서, 또 메시지를 전하고자 준비하면서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하게 되니, 제가 정말 말씀을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후 성경을 대하는 저의 마음의 자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하는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질문이 있으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더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고 생각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다시 제 마음에 말씀이 새롭게 들리는 역사가 있고 또 말씀공부가 이전보다 더 재미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을 알고 있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너그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계속 받고, 이것이 정말 그러한가하며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야 하겠습니다. 제 마음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씀을 듣고 받는 좋은 땅과 같이 30, 60, 100배의 믿음의 결실을 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베뢰아에서 이 같은 말씀 역사가 있자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이곳까지 원정을 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였습니다(13). 이로 인해 형제들이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렀습니다(14). 아마도 얼굴이 알려진 바울은 베뢰아에 더 이상 머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고, 실라와 디모데는 이곳에 좀 더 머물면서 베뢰아 사람들의 믿음을 더 굳게 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바울만 따로 데리고 아덴으로 인도하였고,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라는 말을 형제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을 아덴에서 기다렸습니다(15).

바울은 그들을 기다리면서 아덴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17:16-34)

16절을 봅시다. 바울은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아덴은 지금의 아테네입니다. 아테네는 헬라 철학의 중심지입니다. 또 도시 곳곳에 신전들과 신상들이 가득했습니다. 저 같으면 그 웅장함에 놀라며 사진 찍기에 바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격분하였습니다(16). 바울이 볼 때 그것은 탁월한 예술품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우상들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을 하였습니다(17). 심지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했습니다(18).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육체는 어차피 악하기 때문에 마음껏 육체의 욕망대로 살게 내버려둬야 한다는 쾌락주의를 주장했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런 육체는 이성으로 다스리고 훈련해야 한다며 금욕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당시 이 두 사상이 헬라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전하는 바울의 복음은 이 둘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바울을 말쟁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18). 이에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바울에게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하였습니다(19,20). 겉으로 볼 때는 이들이 베뢰아 사람들처럼 상당히 소원이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는 목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21). 그래도 바울이 볼 때 이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단에 새길 정도로 종교성은 많았습니다(22). 이에 바울은 하나님은 그런 우상 신들과 달리 오직 유일하신 분이시며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천지의 주재이심을 분명히 밝혔습니다(24). 또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24). 그 당시 아테네의 신들은 신전에 있었습니다. 또 헬라 사람들은 신들에게 제사를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야 신들의 노여움을 사지 않고,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필요가 없고 오히려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며(25),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에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신 분이십니다(26).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시며(27), 우리가 그를 힘입어 기동하며 존재합니다(28).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29). 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우상을 섬기던 것들을 간과하셨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으며(30),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분명한 증거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31).

아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32절을 봅시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을 뿐이었습니다(33,34).

이후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가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18:1-8)

181절을 봅시다.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고린도는 항구가 있어 상업이 크게 발달한 무역도시였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했습니다. 풍요하게 살다보니 풍기가 아주 문란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사람 같다는 말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삶을 산다는 의미로 통할 정도였습니다. 또 이곳에는 많은 이방신전들이 가득한 우상숭배의 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덴에서 우상들로 인해 힘들었던 바울이었는데 이제는 그보다 더한 고린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물질적으로 궁핍하였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역자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이곳에서 아굴라라 하는 본도 출신 유대인을 만났습니다. 아굴라는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떠나라고 추방령을 내렸을 때,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이곳 고린도로 새로 왔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였습니다. 그 일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3).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동역으로 바울사도는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물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4).

하나님은 바울사도가 고린도에서 홀로 힘겨워 하고 있을 그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이들은 이후로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함께 하며 동역합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갈 때 그들은 함께 가서 개척역사를 동역합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 선교비전을 품었을 때는 먼저 로마로 가서 선교의 길을 닦아주었습니다. 바울은 후에 이들 부부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로 동역하였다고 하였습니다(로마서 16:3,4). 하나님은 이렇게 바울이 막막한 개척역사를 이루고자 할 때 좋은 동역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1차 전도여행 때는 바나바와 동역하게 하시고, 2차 전도여행에서는 디모데와 실라, 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동역하게 하십니다.

제게 동역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이전에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역사를 섬기며 여러 많은 일들을 겪어보면서 제 주위에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마음을 나누고, 함께 복음역사를 섬기는 동역자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귀하고 또 감사한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결코 복음역사를 섬길 수가 없습니다. 바울사도도 수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이같이 세계선교 역사를 실제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동역자의 귀함을 알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좋은 동역자가 되고, 계속하여 합심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힘 있게 섬겨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봅시다. 얼마 후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든든한 믿음의 동역자들이 합류하고, 또 그들이 가져온 빌립보 성도들의 지원금으로 인해 그가 적지 않은 위로와 힘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또 마음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생겨 다시 말씀 연구에 집중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바울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사역에 전념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고 말씀에 붙잡힌 그는 말씀을 따라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였습니다(5). 아덴에서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힘을 내어 다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울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아덴에서는 사람들과 변론하고 쟁론하며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설득력 있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지만 이곳 고린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밝히 증거했습니다(고린도전서 2:1,2).

그러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6절을 봅시다. 그전까지는 잠잠하던 유대인들이 또 대적하여 바울을 비방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했던 것처럼 다시 유대인들을 피해 다른 성이나 도시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방하는 그들에게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하였습니다(6). 그리고 거기서 옮겨 회당 옆에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7). 그는 멀리 가지 않았습니다. 회당 바로 옆에 있는 집으로 옮겨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8절을 봅시다.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포기하지 않고 디도 유스도의 집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을 때 놀랍게도 다른 사람도 아닌 회당장 그리스도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었습니다. 회당장의 선한 영향력으로 인해 이후에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와서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같이 바울의 새로운 도전과 시도는 열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서 이 같은 역사가 일어나고 있을 그때에 바울 사도는 두려움에 심히 떨었습니다.

주께서 이런 바울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18:9-17)

놀라운 고린도역사가 시작되고 있을 그때 밤에 주께서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9,10절을 봅시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이로볼 때 지금 바울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기절하여 성 밖에 버려졌는데도 다시 일어나서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에서는 죽도록 매를 맞고 차꼬에 채워져서 깊은 감옥에 갇혔을지라도 그곳에서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복음역사가 한창 일어나고 있고 제자들이 서 가고 있는데 무엇이 그를 두렵게 했을까요? 바울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이때 그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2:3). 유대인들이 다시 몰려와서 훼방하지는 않을까 두려웠을까요? 지금까지 바울의 사역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보면 말씀역사가 있다 싶으면 어김없이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박해하고 바울은 또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고 또 역사가 일어난다 싶으면 또 다시 유대인들이 쫓아와서 훼방을 놓고 박해를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을 한 번 두 번 겪을 때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겪다보니 바울도 점점 지쳐가고 두려움이 엄습하였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디도 유스도의 집은 유대인의 회당 바로 옆이기 때문에 또 언제 누가 바울을 공격하고 박해할지, 언제 바울을 테러하고 돌을 던질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늘 긴장하며 두려움 속에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이런 긴장감 가운데서 나아온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깨우치고, 회개를 가르치고, 용서와 믿음을 심는 일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점점 두려워집니다. 멀리서 볼 때는 소망스러웠는데, 가까이할수록 그 사람을 붙잡고 있는 죄의 세력이 보이고 거기에 압도당하여 소망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소망을 잃어버리면 사람을 돕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시간과 물질을 쏟아 부었으나 아무런 열매 없이 고생만 하다가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이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정작 해야 할 일을 할 수가 없고 움츠러들고 소심해집니다. 두려움 때문에 점점 소극적이 되고 침묵하고 싶고 그냥 가만히 있고만 싶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고 있는 바울에게 밤에 주께서 환상가운데 나타나 도와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주께서 바울에게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10절을 다시 봅시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주님은 바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므로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로볼 때 바울 사도는 자기 혼자만 있는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주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대적하여 그를 해롭게 할 것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바울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주께서 항상 함께 하시므로 어떤 사람도 그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에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영접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이 아직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두려워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은 침묵하지 말고 입을 열어 말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두려워서 침묵하고 말하지 않으면 이 성중에 주께서 예비하신 주의 백성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고린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주의 역사를 섬기면서 정말 매일 매일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양들을 돕는 것도 두렵습니다. 제가 말을 잘못했다가 동역자들에게 비방을 듣지는 않을까 또 양들을 실족시키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저의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 저의 동역자에게 상처를 주고, 자녀들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계승역사를 한 후 인제 역사가 어떻게 될지 두렵습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고자 할 때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때때로는 정말 침묵하고 싶고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도망가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저와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말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도 대적하여 저를 해롭게 할 자가 없음을 약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모든 속 두려움을 이기고 침묵하지 말고 담대히 말하여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주께서 저를 쓰시길 기도합니다.

바울은 주의 말씀에 힘을 얻어 1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쳤습니다(11). 그러자 또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가야 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갈리오에게 가서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고소하였습니다(13). 아마도 그들은 새로 부임한 총독이기에 자기들이 말하는 것을 쉽게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 달리 총독 갈리오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4-16절을 봅시다.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하고는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버렸습니다. 바울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갈리오 총독을 통해서 바울을 대적자들의 손에서 섬세하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후 바울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18:18-23)

18절을 봅시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수리아로 떠나갔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함께 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는데, 이는 바울이 일찍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시점에 어떤 서원을 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 같이 어려운 곳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며 개척역사를 섬기겠다고 서원하며 결단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하나님 역사를 형편대로, 되는 데로 섬기지 않고 일정 기간을 서원하고 하나님 앞에서 근신하며 헌신적으로 개척역사를 섬겼습니다. 이후 바울은 에베소와 가이사랴, 갈라디아와 브루기아의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였습니다(19-23). 바울은 복음의 씨만 뿌려놓고 알아서 자라라고 방치하지 않고 부지런한 농부처럼 끊임없이 개척지를 돌아다니며 다시 제자들을 굳게 세우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그의 관심과 섬김과 돌봄으로 개척지의 제자들이 주의 사람들로 세워져 갔습니다.

24절을 봅시다.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자 그곳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라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왔는데, 그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주님의 도를 배워서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누가 도와줍니까? 26절을 봅시다.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그의 말을 듣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풀어주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고 그분이 나사렛 예수님이신 것과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생명에 이르게 됨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볼로는 즉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고 아가야 지방으로 건너가서 성경으로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증언함으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27,28). 바울 사도를 통해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동역자가 되었고 이제는 그들을 통하여 아볼로가 변하여 좋은 복음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끊임없이 두렵습니다. 말씀을 전했다가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가 두렵고, 나로서는 어떻게 해결 할 수 없는 상황과 형편으로 인해 두렵고, 나 자신의 죄악됨과 연약함으로 인해 두렵기도 합니다. 나 혼자라는 생각에 두렵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바울사도와 같이 언제 어디서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침묵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담대히 증거 하는 주의 사람으로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사도행전 18:9)

 

2018-2019 사도행전 14강 메시지 1701-1833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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