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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38강 정여호수아

누가복음 23:1-49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누가복음 23:34)

 

오늘 말씀은 십자가 현장 기록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셨고, 지금도 돌아오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사랑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십자가 위에서 울려 퍼지는 우리를 향하신 주의 용서의 음성을 새롭게 듣고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죄 없으신 예수께서 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까?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1-25)

1절을 봅시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며 고발하였습니다(2). 이에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네 말이 옳도다하셨습니다(3). 그동안 수많은 죄인과 반역자들을 상대해 본 빌라도는 이 대답을 듣고 예수께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시기로 자신에게 넘겨준 줄도 알았습니다(마가복음 15:10). 이에 그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말합니다. 4절을 봅시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그러자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합니다.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5) 이에 빌라도는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고 묻습니다(6).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면 관할지역을 문제삼아, 헤롯 왕에게 떠넘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7). 마침 헤롯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확인되자 마자 그는 예수를 헤롯에게로 보냈습니다(7).

8절을 봅시다. 헤롯은 오래전부터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뜻하지도 않게 예수님을 보게 되어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면하여 여러 말로 물어보지만 예수께서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9), 금새 흥미를 잃고 말았고, 이에 그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습니다(11). 헤롯도 예수께 죄가 없다는 점에서 빌라도와 그 의견을 같이 한 것입니다. 이로서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찌되었든 또 다시 재판을 해야되는 빌라도로서는 골치가 아팠고, 빨리 이 문제를 종결짓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자신뿐 아니라 헤롯도 예수께 죄가 없음을 알고 이렇게 도로 돌려보냈다고 어필합니다(13-15). 그러므로 그를 때려서 놓겠노라고 하였습니다(16). 매질을 당하는 예수님을 보면, 이쯤에서 그들도 만족하고 타협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18절을 봅시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이 바라바는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입니다(19). 민란을 일으켰으니 백성을 소동케 한 자요, 또 로마에 저항했으니 당연히 세금을 내지 말라고 했을 것이며, 무리를 선동하여 이끌었으니 왕처럼 행동했던 자입니다. 그런점에서 그는 정확히 예수님을 고발했던 3가지 죄목과 일치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행악자는 놓아주고, 죄없으신 예수님은 없이하라고 소리칩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습니다. 어떤 목자님의 표현대로 정말 모든 상황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놓고자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20). 그러자 그들이 더욱 크게 소리 지릅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21) 이에 빌라도가 마지막 정에 호소하며 세 번째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22) 그러나 이제는 막무가내입니다. 그들은 더욱 거세게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합니다(23).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이깁니다(23). 사람들이 이기고 빌라도가 집니다. 진리가 지고 불의가 이깁니다.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24),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였습니다(25).

여기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이긴 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과는 관계없이 세상의 모든 일이 목소리 큰 자들의 뜻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이것이 그들의 뜻대로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원과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신, 예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죄한 예수님이 체포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으심으로, 바라바 같이 죄인들이 풀려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가 대신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 죄인들이 율법의 그 저주에서 풀려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많은 죄인들이 살아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증거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서 놓임을 받습니다. 사람은 본질상 죄의 포로입니다. 바라바는 죄의 포로로 사는, 우리를 상징합니다. 바라바 같은 죄인도 놓임을 받았으니, 그 어떤 죄인도 놓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 사형집행 장소로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그런데 자신을 뒤따르며 슬피 우는 여인들에게 무엇이라 하십니까?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6-31)

십자가형을 언도받은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까지 자신이 달려야 할 나무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습니다. 밤새 끌려 다니며 심문당하시고, 채찍을 맞으신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자꾸 쓰러지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그들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였습니다(26). 그뿐 아니라 백성의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도 있었습니다(27). 그런데 예수께서 돌이켜 자신을 위하여 우는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 예수님이 지금 가시는 십자가의 길은 억울하고 비참하게 끝나버릴 슬픔의 길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원과 뜻이 이루어지는, 자기 백성들의 대속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가야만 하는 진리의 길이요, 영광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울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에 무서운 날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의 가혹함과 엄중함이 너무 커서 그 날에는 자녀를 낳고 기르는 행복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29).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며 산 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고 덮어버리라고 말할 정도입니다(30). 푸른 나무이신 예수님도 이 같은 이같이 하는데, 마른 나무같은 자들의 결국은 어떠하겠습니까(31)? 끝내 아들을 통해 보살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한 자들이 당할 심판은 그만큼 철저하고 엄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해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할 우리의 몫입니다. 지금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마태복음 5:4). 아멘!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달리신 그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32-39)

32절을 봅시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갔습니다.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습니다(33). 십자가형은 당시 가장 극악한 죄인들이 받는 형벌입니다. 그런데 죄없으신 예수께서 이 같은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신 예수님의 그 고통이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작은 가시만 찔려도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섭니다. 작은 못 같은 것에 찔리기만 해도 몰려오는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군병들은 예수님의 손을 펼쳐서 그대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살이 찢기고 힘줄은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붉은 피가 사정없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럼에도 군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못 박은 채로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시편 기자는 십자가 형벌의 고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편 22:14-15) 그런데 이 같은 고통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다 같이 34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예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싹 쓸어버려 주옵소서이렇게 기도해야 할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아버지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들이 누굽니까? 죄 없는 자기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십자가 죽음으로 내몰아간 장본인들입니다. 그 누구보다 많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었지만, 그 사랑과 은혜를 원수로 갚는 무리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다 알지만,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끝내 불의와 타협한 빌라도입니다. 예수님이 뭔 일을 하든 말든 전혀 관심 조차 없이, 오직 나 자신만의 영광과 욕심만을 채우며 사는데 혈안이 된 바로 죄인들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때, 이제 곧 있으면 죽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이 아니라 저들을 향해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저들, 곧 죄인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크고 많은 죄가 용서함 받는데 있었습니다. 이사야서는 증거합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이사야 53:12)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자기 영혼을 버리시며까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그 순간에도 저들은 무엇을 합니까? 그 아래에 있는 군인들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습니다(34). 백성은 서서 뭔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구나 하며 팔짱을 끼고 구경하고 있습니다(35). 관리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하고 비웃고 있습니다(35). 군인들도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희롱하고 있습니다(36,37). 심지어 같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도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나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비방하고 있습니다(39). 저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이 용서의 기도가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0-43)

십자가에 달린 한 행악자가 예수님을 조롱할 때에 다른 한 행악자는 그 반응이 달랐습니다. 40,41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방하던 옆에 있는 그 사람을 꾸짖으며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십자가 형을 받으면서 과연 이제까지 몇 명이나 자신이 받는 형벌에 대해서 당연하고 여겼겠습니까?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가 죄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이 행한 것이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비록 예수님이 자신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있지만 이 분은 죄가 없는 분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갑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 이 행악자는 예수님이 당신의 나라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도 데려가 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렇게 말을 못하고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 예수님은 염치없는 그의 기도를 받아주셨습니다. 그것도 바로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 약속해 주십니다.

이처럼 같은 행악을 했음에도 한 행악자는 심판을 받고, 다른 한 행악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낙원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운명을 갈랐습니까? 그 차이는 어디에서 정말 온 것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해 드리신 그 용서의 기도가 그에게 귀에도 들린 것입니다. 그 기도가, 십자가에 같이 못 박혀 죽어가던 행악자의 그 마음을 옳은 데로 이끌었습니다. 멸망과 심판을 향해 달려가던 그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그의 영혼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 돌아와서 겸손히 주께 나아가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행악자 만큼의 큰 죄는 범하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 엄밀히 따지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무심한 군병들, 비방하는 관리들, 구경하고 있는 백성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눈에 보이는 욕심을 따라, 육체의 본성을 따라 행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 죄로 인해 장차 당하게 될 수치과 그 심판의 고통이 어떠한지 잘 알지도 못하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만 쫓아 열심히 달려가기 바쁜 삶을 살아갑니다. 목자로 산다지만 저 또한 이러한 삶의 쳇바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가을수양회가 끝나고 다시 삶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 같은, 죄가운데 헤매고 있는 자신을 매일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게 이번에 예수님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이 용서의 음성이 새롭게 들려왔습니다. 주님의 이 기도가 교만과 나태와 비방으로 치닫고 있는 저를 다시 멈춰 세워주십니다. 제 영혼이 잠잠히 주의 구원을 바라며, 저로 엎드려 다시 기도하게 하십니다. 제가 언제라도 주께서 제게 들려주신 이 용서의 기도를 따라, 죄에서 돌이키는 믿음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저를 낙원으로 인도하시는 주의 이 사랑의 음성을 듣고 제가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예수께서 숨지실 때 누구로부터 어떤 고백이 있었습니까?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44-49)

44절을 봅시다. 때가 제 육시쯤 되었습니다.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정오 12시가 될 때까지 고통 속에 계셨습니다. 그때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습니다. 이것이 제 구시 곧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45).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커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 길이 열렸습니다(히브리서 10:20). 그때에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숨지셨습니다(46). 이 모든 일을 지켜본 백부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47)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48),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습니다(49). 예수님은 철저히 죄인으로 심문을 당하고 죄인으로 참혹한 십자가형을 받으며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지켜본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이 의인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의 고백대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의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주신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알 때, 우리에게 낙원, 곧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이시간 행악자의 고백한 그 고백이, 그의 기도가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구원의 은혜를 누리길 기도합니다. 아멘!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누가복음 23:34)

2022년 누가복음 38강 메시지 2301-2349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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