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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7.06.10 11:55

2017년 누가복음 23강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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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23강                                                                                                   김요한

누가복음 10:1-24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누가복음 10:2)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보내시면서 예수님 마음이 편치는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이리 같고, 제자들은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1-2)

1절을 봅시다. “그 후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한 후입니다(누가복음 9:51).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십니다(9:22).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로 했다는 것은 죽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셨습니다. 칠십은 온 세계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면서 세계 선교를 이룰 꿈을 가지셨습니다. 칠십 인을 따로 세우셔서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셨습니다.

보내시면서 둘씩 보내셨습니다. 왜 둘씩 보내셨을까요? 한 사람이 졸면 옆 사람이 깨우고, 또는 한 사람이 뭐 좀 먹자 하면, 옆 사람이 ‘가자’ 하여 서로 격려하기 위해서.. 물론 이런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씩 보냄으로써 확실한 증거를 삼고자 하십니다. 두 세 증인이 팩트를 확정시킵니다(신명기 19:15).

그렇게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하라 하셨습니다. 2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예수께서 칠십 인의 제자들을 각 동네로 보내시면서 ‘많다’ 하지 않으시고, “일꾼이 적으니”라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제자. 칠십 인! 많다.’ 싶은데, 예수께서는 적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일꾼이 적으니 어떻게 하라 하셨습니까?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셨습니다. 추수 때를 놓치면 다 익은 곡식을 버리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추수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긴박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십니다. 그냥 내가 열심히 추수하면 될 것 같은데,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청하라 하십니다.

여기서 추수는 주인의 뜻에 따라 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추수하는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추수할 것이 많다고 보십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면서도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4:35, 누가복음 9:52,53).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을 보면서도 추수할 대상으로 보십니다. 캠퍼스를 보시면서도 추수할 것이 많다고 보십니다. 추수는 하나님 나라로 거두어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한 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아셨기 때문입니다(9:51).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예수께 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할 일꾼들을 추수하는 주인에게 보내주소서 하라 하십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추수할 일꾼들이 가서 무엇을 하라 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라(3-16)

3절을 봅시다. 칠십 인을 보내시면서 추수할 일꾼들이 오면 가라 하지 않으시고, 지금 가라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야 할 각 동네가 이리들이 잔뜩 있는, 뭐 뜯어 먹을 거 없는가 하는 탐심의 눈이 가득한 세상임을 아셨습니다. 그러면 보내지 말았어야 하는가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갈지어다” 하십니다. 어린 양을 그렇게 이리 가운데로 보내실 때는 예수님의 뜻이 있으셨습니다.

4절을 봅시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리 같은 세상에 갈 때는 준비가 많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돈이 있어야 할 것 같고, 여행 장비가 필요한 것 같고, 무엇보다 인맥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인사 잘 하고 메일 주소, 폰 번호를 서로 주고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이나, 준비물, 인맥을 의지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라 하십니까? 5절을 봅시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하십니다. 돈이나, 인맥을 관리하러 온 것이 아니라, ‘평안’을 선포하라 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하십니다(6). 사람의 반응이 어떠하든 예수께서는 “평안”을 선포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하십니다. ‘피자 먹고 싶은데, 피자 없어요?’ 하지 말고 주는 대로 먹고 마시라 하십니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삯을 받으면서 자기 마음에 맞는 삯을 받으려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하십니다(7).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그렇게 하라 하십니다(8상).

그래서 영접하는 집에서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라 하십니다(8하,9). 병자들을 고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라 하십니까? 병이 무엇입니까? 병은 질서를 잃어버리는데서 생깁니다. 의사 분들이 치료를 마치고 항상 환자들에게 말하기를 ‘마음을 평안하시고..’라 합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병에 걸리지 않지요. 병은 마음과 몸이 질서를 잃어버리는데서 생깁니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병이 낫는다 함을 질서의 회복일 텐데, 이는 곧 하나님 나라로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이 선포되었을 때, 이를 듣는 자가 영접하면 병에서 나음을 얻습니다.

그런데 영접하는 동네도 있지만 영접하지 않는 동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영접하지 않는 동네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말씀하십니다. 10,11절을 봅시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하십니다. 영접하든지, 영접하지 않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라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께서 어린 양 같은 제자들을 이리 같은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듣고도 영접하지 않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12절을 봅시다. 말씀을 듣고도 영접하지 않은 소돔은 유황불에 타버렸습니다(창세기 19:24,25). 그런데 말씀을 듣고도 영접하지 않는 동네는 소돔 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 동네가 어떤 동네입니까? 13절을 봅시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고라신과 벳새다는 예수께서 주로 활동하신 갈릴리에 있는 동네이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예수께서 모든 권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셨는데도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그들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하십니다. 평안이 선포되고,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14절을 봅시다. 심판 때에 말씀을 듣지 않은 두로와 시돈이 그들보다 견디기 쉬울 것입니다. 15절을 봅시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갈릴리 중심 도시인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평안이나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높아져 있으면 누구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이 세상에서 최고입니다. 가장 옳은 것으로 스스로 판단이 되기 때문에 예수께서 아무리 권능으로 무슨 일을 행하여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니 회개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음부에까지 낮아질 것입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가 내 생각하고 다르다 해서 그 사람에게 죄송할 것은 없습니다. 스스로 내 자신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지는 스스로 판단할 문제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을 저버리는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 즉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칠십 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보내심을 받은 대로 갔습니다. 그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안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항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7-24)

17절을 봅시다. 이렇게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께 보고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거라사 광인을 조용하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헛소리하고 이상한 짓 하던 사람들이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그들이 보았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우리가 2017 인제 양산 여름수양회에서 이를 보기를 원하여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8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칠십 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였지만 예수님은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탄. 사탄은 하나님 나라의 대적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사람을 탐심으로 인해 죄를 범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종 삼았습니다. 하나님 역사의 대적자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주요 목적은 사탄을 완전히 밟고자 하심입니다(창세기 3:15). 하나님께서 이를 약속하셨습니다.

19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십니다(20).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칠십 인으로 이리 같은 세상에 보내시는 것도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이리 같은 세상에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가서 평안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을 때,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습니다. 곧 그들은 사탄의 지배를 벗어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를 기뻐하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예수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마태복음 7:21).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냈다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그들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셨습니다(마태복음 7:22,23).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그들이 예수께서 “갈지어다” 하셨을 때, 갔기 때문입니다. ‘이리 같은 세상에 양 같은 나를 보내시다니, 예수님이 나를 아시는 거야, 모르시는 거야’ 이렇게 하지 않고, “갈지어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갔습니다.

왜 갔을까요? 하나님 나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내가 연약하든지, 세상이 이리 같든지,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고자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임에서는 일대일, 제자 양성이 그 사람의 믿음의 큰 업적이 됩니다. 보고서에서도 ‘ㅇㅇㅇ 목자님이 올 한 해 충성스럽게 일대일을 하여 ㅇㅇㅇ가 제자로 세움 받았습니다.’ 하고 씁니다. 그런데 몇 십 년을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한 일은 그저 왔다 갔다 한 일 뿐인 것 같으면 내 자신은 무슨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아기로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표적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은 고난 받고 죽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크신 권능으로 하신 일은 제자들, 고난 받는 십자가 말씀에 반발하는 베드로와 제자들과 씨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베드로는 말씀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기도하게 되었고, 기도하였을 때 그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우리가 과연 무엇으로 기뻐하여야 할런지요? 내가 과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내 이름이 보고서에 기록되는 것으로 기뻐하여야 할 것인지, 아니면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으로 기뻐할 것인지? 눈에 내가 이루어놓은 업적이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과연 나를 어떻게 보실 것인지?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항복시키고 온 칠십 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0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말씀역사에 확신을 가지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칠십 인을 이리 같은 세상에 보내실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그런데 칠십 인으로 인해 말씀역사 있음을 보셨습니다. 세계 선교의 비전을 보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21절을 읽어봅시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렇게 된 것은 – 곧 어린 양 같은, 어린 아이 같은 칠십 인으로 이리 같은 세상에 보내셨는데, 말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십니다. 천지를 주재하시는 아버지께서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무엇인가를 안다 싶은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제목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 지혜롭지 않고 슬기도 없는 것 같은 어린 아이. 그런데 어린 아이는 천진난만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Hi!’ 하고 환하게 인사를 합니다. 벌써 지혜가 생기고 슬기가 생긴 아이들은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나를 해하지는 않을까 하며 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이 사람들은 어린 양이며,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있는 대로 듣고, 자기 생각대로 말하였습니다. 자기 생각이 들어가게 되면 어린 아이 같이 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듣고 지키어 돌에 맞으면서도 예수님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보며 잠자듯이 죽었습니다(사도행전 7:55-60).

우리 중에도 어린 아이 같이 예수님 말씀을 좇아가는 사라 사모님, 또 벧엘 팀, 리브가 팀, 비전40팀, 리빙스톤 팀이 있습니다. 상황과 조건에 따르지 아니하고 말씀을 들은 대로 믿고 행하고자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캠퍼스 형제, 자매들이 들며 나며 생명의 꼴을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있는 그대로 예수께 나아오는 사람을 쓰십니다.

저는 누구를 만나든지 어린 아이처럼 그 사람에게 ‘Hi!’ 하고 인사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참 그게 어렵습니다. 제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처럼 듣고 지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어 감사합니다.

22절을 봅시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셨습니다. 23절을 봅시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제자들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오직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 보였습니다(9:36). 예수님을 보는 눈이 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리라 하시는 예수님, 그리스도, 메시야는 많은 선지자들과 임금이 보고자 했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추수할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리고 자기 욕심 따라 행하다가 사탄의 종이 되어 풀리지 않는 인생문제로 병들어 헤매는 캠퍼스 형제, 자매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평안을 찾아줄 일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꾼이 적습니다. 말씀대로 복음을 전할 일꾼이 적습니다. 일꾼이 있다 하더라도 세상은 이리 같고, 캠퍼스에 나아가야 할 일꾼들은 어린 양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접을까요? 그만 둡니까? 다른 데, 다른 일을 알아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은 이 시대에 추수하는 주인, 하나님 아버지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기도하라 하시니 감사합니다. 여름수양회 준비에 할 일이 많사오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기도하고, 우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주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누가복음 10:2)

 

2017 누가복음 23강 메시지 1001-1024 김요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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