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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4강 정여호수아

마가복음 2:18-2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22)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예수님, 죄인들과 함께하심으로 치료하시는 이 예수님으로 인해 낡은 율법과 전통으로 굳어져 가던 이스라엘 가운데 새로운 생명의 역사, 곧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이를 대적하고 갈등하는 역사도 시작되었습니다. 갈등 가운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18,19)

지난 주 말씀에서 세리 레위가 구원을 얻은 기쁨에 겨워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이고 동료 세리와 죄인을 초대하였는데(15)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와서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사람들이 또 다른 문제로 예수께 와서 따집니다. 18절을 봅시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금식은 마음에 작정하고 밥 먹기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밥 먹기를 중단합니까?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일 때 그러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일 년에 딱 한번 대속죄일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라 명시되어 있습니다(23:27). 곧 금식은 자신의 죄나, 가정의 죄나, 공동체의 죄로 인한 애통과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 견딜 수 없을 때,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대속죄일 뿐 아니라 BC 586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민족적 각성을 위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 또 페르시아의 학살을 면한 날을 기념하는 부림절에 금식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경건한 유대인을 중심으로 일주일에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금식이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신앙생활 좀 한다는 사람들은 꼭 해야 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떠들썩한 잔치까지 벌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따져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금식하지 않느냐?”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9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지금은 혼인잔치 중이라 금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즐겁고 기쁜 날에 어찌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당시 혼인 잔치가 있을 때는 금식일에도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혼인 잔치가 있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혼인 집 신랑이요, 제자들을 포함한 세리들과 죄인들을 혼인 집 손님이라고 하십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이사야 625절을 보면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실 날을 기쁨의 혼인잔치에 비유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신부를 취하는 신랑으로 증거하며, 자신은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로서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하였습니다(3:29). 곧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임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세리 레위와 그의 친구들은 신랑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 제자들은 그의 결혼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입니다. 이 식사 자리는 죄인들의 떠들썩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배설한 구원의 천국잔치입니다(마태복음 22:2). 금식할 때가 아닙니다. 아니 금식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금식 자체를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금식해야 할 때가 있다고 하십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라 하십니다(20). 결국은 신랑이 중요합니다. 다 빼앗겨도 신랑되신 예수님을 가졌다면 기쁨의 날이고, 다 가졌어도 예수님을 빼앗기고 잃어버린다면 가슴을 치며 슬퍼할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뭘 하고 안 하고 어떠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21-22)

예수님은 왜 지금 금식할 수 없는 지에 대해, 2가지 비유를 더 말씀해 주셨습니다. 21절을 봅시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생베 조각은 물에 빨면 수축됩니다. 그래서 낡은 옷에 붙인 상태로 빨면 기운 새 것이 낡은 옷을 당기어 옷이 금방 해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22절을 봅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새 포도주는 발효력이 엄청합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가 발효할 때의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일 그렇게 했다가는 결국 가죽부대는 터져버리고, 그 안에 있는 포도주는 다 쏟아져 버립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위의 두가지 내용은 당시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아주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일까요? 생베 조각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가 공존할 수 없듯이, 예수님과 예수님이 가져오신 복음 또한 사람이 만든 낡은 전통이 함께 공존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복음을 사람의 가르침과 전통으로는 가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둘려고 하거나, 이리 저리 가져다 붙이고, 물에 술을 타듯이 술에 물을 타듯이 섞어 버릴려고 한다면 결국은 둘 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생베를 자신의 낡은 옷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낡은 옷을 벗고 생베로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생각을 버리고 부대 자체를 새 부대로 아예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들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각과 사역을 끌어당겨서 자기의 낡은 자기들의 생각이나 전통에 붙이려고 합니다. 기존의 자신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과 생각을 그대로 고수한 체 예수님의 사상과 가르침을 담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가 옳으며, 자기가 의인입니다. 자기 생각과 방식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끝내는 그것이 틀렸다고 정죄해 버립니다. 그야말로 낡은 가죽부대입니다. 그러나 새 부대는 다릅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합니다. 말씀에 따라 겸손히 자신을 정직히 돌아보고, 언제라도 고치고 바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배우고자 합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내 생각을 앞세우기보다 예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무엇이 정말 복음에 합당한가를 수없이 고민하고 번민하고 갈등합니다. 갈등속에서도 힘겹지만 주께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되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담으려는 그 사람은 결코 낡은 가죽 부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포도주와 부대 둘 다 버릴 수 있기에 그렇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왕성한 복음의 생명력을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고 변화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고 몸부림칩니다. 우리는 너무도 빨리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되신 예수님을 담고 수용하기 위해 계속 변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나 새포도주 예수님을 담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병든, 다양한 유형의 죄인들을 담는 것이기도 합니다. 봄학기 새로운 세대, 새로운 영혼들을 돕고 섬기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요즘은 이메일이나 문자나 카톡으로 학생들과 연락을 주고 받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대부분 인스타 같은 DM(Direct Message)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니들은 왜 문자와 카톡 안쓰냐고 해야 할까요? 아니겠죠? 우리가 DM을 써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의 모습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과 같습니다(1:9). 예수님은 죄로 병든 우리를 고치기 위해 자신을 찢으시고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립보서 2:8). 우리가 이를 알고 기억할 때 우리 모든 연약함과 죄악된 본성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어떤 영혼도 담아낼 수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찢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계속 감당할 수 있습니다. 봄학기 우리가 새롭게 도전하고 시도하는 동아리 강좌, 캠퍼스모임, 런치미팅을 통해 캠퍼스에 생명력 있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증거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새 부대가 되고자 하는 우리의 몸부림과 소원과 기도를 받아주시고 다만 일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후에 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3-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23). 이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따지며 말합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4)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5,26절을 봅시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상식적으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라고 문제를 삼는다면, 그 일을 하는 것이 안식일에 왜 문제가 되지 않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 같으면 다른 사람의 밭에 들어갈 때 낫을 대면 문제가 되지만 손으로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댈 것 같습니다(23:25). 아니면 배가 고프다보니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잠시 잊은 것 같다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리며 이야기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대응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을 예로 드시며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것도 안식일법보다 더 위에 있는 제사법을 어겼음에도 정죄받지 않았음을 말씀하십니다. 회막에서 제사법을 어겨서 다른 불을 드림으로 죽었던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생각해 본다면(민수기 3:4), 제사법을 어긴 다윗과 그와 함께한 자들도 반드시 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를 허용한 대제사장도 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였기 때문에 특별히 선처를 베푸신 것일까요? 물론 제자들의 상황이 밀 이삭을 잘라먹어야 할 정도로 배가 고프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배고파 죽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배고픔의 문제 뿐만이 아닙니다. 이를 어긴 사람이 바로 다윗이라는 점입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성전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이요, 무엇보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왕입니다(사도행전 13:22). 곧 다윗은 장차오실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이런 다윗과 그와 함께한 자들이 율법의 요구를 뛰어넘을 수 있는 권위가 있었다면, 다윗의 주로서 다윗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그보다 더 큰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안식일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 성전 안에서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태복음 12:5). 그래서 마가는 특별히 제자들이 안식일에 길을 열면서밀 이삭을 잘랐다고 표현하였습니다(23). 곧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 구원의 왕의 행차를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제사장들입니다.

현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신분과 위치는 어떠할까요?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왕 되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 또한 이 시대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는, 그가 가져다 주실 참된 구원과 안식을 위해 길을 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베드로전서 2:9).

이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27절을 봅시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본래 목적과 취지는 그야말로 사람에게 안식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안식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사탄의 꾐에 넘어가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자신의 안식을 확보하려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안식에서 멀어져,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 평생 쉼없이 죽어라고 일하다가 쇠하여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우리 인생들을 이같은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20:8). 이를 통해 그 삶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의 통치 아래서 주어지는 생명과 안식에 만족하고, 이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곧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노동과 노력으로,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겠다는 삶의 자세에 대한 반성입니다. 자기가 주인되어 자신을 주장하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닙니다. 참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감사함과 자원함으로 생업을 중단하는 날입니다. 엿새 동안은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고 확대하기 위해 일을 할지라도 하루는 그 일을 중단함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사는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람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주신 그 거룩하고 복된 날을,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날로 바꾸어 버렸습니다(27). 이로 인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그 거룩한 계명이, 도리어 사람을 괴롭게 하는 무거운 멍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안식일의 본래의 취지와 정신을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왜곡되고 훼손된 안식일을 회복시키시고 사람들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 새 포도주로 상징되는 복음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의 목적과 정신을 회복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고 변질되고 왜곡된 율법을 처음 본래의 상태 돌려놓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마태복음 5:17). 이같이 율법을 본래 목적대로 돌려놓으실 수 있는 이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다 같이 28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의 주인은 여호와이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안식일’(23:3), ‘나의 안식일’(31:13)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선언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안식일 해석에 대한 자격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창세 때 안식일을 제정하신 바로 그 분이십니다. 그가 이 땅에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2:10).

이제 종교지도자들은 엄청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에 자신들이 지켜오고 고수해왔던 금식과 안식일에 대해서 이를 예수님의 해석과 뜻대로 받아들여지 말아야 할지 그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갈등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그 인생가운데 예수님이 찾아 오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들리면 이런 내면의 갈등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가치관과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일로 때때로는 비난이 일어나고 첨예한 갈등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으로 몰리면 누구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의 시간을 예수님은 기어이 그 사람안에 일으키십니다. 적당히 하고 끝내는 수준이 아니라 끝장을 봐야 할 상황으로 몰고 가십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지금 여기까지 몰아 붙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죄사함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판단의 근거가 하나님 진리의 말씀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을 것입니다. 정말 그런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진리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할수만 있다면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도망갈 수 없도록 막다른 골목으로 끝까지 몰아 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정말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기준을 다시 잡아야 합니다. 이로 볼 때 예수님안에서의 비난이나 갈등의 시간은 나의 판단과 생각이 새 부대인가 낡은 가죽부대인가를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괴롭지만 사실은 아주 고마운 시간입니다.

지금 봄 수양회를 앞두고 가장 힘내서, 합심해서 준비해야 시점인데, 또 다시 갈등 상황이 벌어지고, 예상치 못한 사탄의 역사가 있는 것 같아서 제 마음이 많이 슬펐습니다.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뭘 더 잘 하려 하면 할수록 도리어 제 안에 있는 죄와 부족한 허물들이 드러나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사탄이 틈타고 들어오는 일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 괴롭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이 일이 꼭 잘못되거나 나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낡은 가죽부대가 되지 않고 새 부대가 되게 하실려고 주의 선하신 섭리가운데 갈등 상황을 일으키시고 허용하시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뭘 하려 하면 할수록 저의 죄와 허물이 더 많이 드러날 것입니다. 계속 갈아 엎어야 할 것들을 주께서 하나하나 더 많이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러나 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제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새 부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복음이 주는 진정한 생명과 안식을 누리고 이를 나누는 일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쓰실 것입니다. 제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갈등 상황으로 인해 힘을 빼거나 중간에 꺾이지 아니하고, 이 일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해석하고 하나 하나 풀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완악하고 허물많은 죄인을 갈등 속으로 끝까지 밀어 넣으셔서 어찌하든 복음을 믿고, 주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주님의 깊으신 사랑에 이 시간 감사합니다. 아멘!

예수께서 오사 복음이 선포됨으로 새 시대가 왔습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처럼 놀라운 역동성과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낡은 기존의 질서와 삶의 방식 그대로인 상태로는 담아낼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갈등하고 충돌합니다. 그 갈등과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찾아온 그 인생에게 예수님이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하시는 일입니다. 새 부대가 되기까지 반드시 겪어가야하는 과정입니다. 우리 안에 구원과 생명과 안식을 주시려고 예수님은 이 일하기를 끝까지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무리 완악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꺾지 않으시는 예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날마다 듣고 받아 낡은 가죽을 벗고 새 부대가 되어 실제에서 생명을 누리고, 또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계속해서 예수님이 빚어가시는 새 부대가 되고, 예수님 안에서 서로를 수용하고 담아낼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 2:22)

 

2024년 마가복음 4강 메시지 0218-0228 정여호수아.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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