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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021년 마태복음 38강 정여호수아

마태복음 25:31-46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예수님은 세상 끝 날 주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 열 처녀, 달란트 비유로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로 어떻게 깨어 준비하여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인 양과 염소 비유도 그 연장선상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날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1-33)

31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셨습니다(누가복음 2:7).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이사야 53:2). 또한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습니다. 누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이사야 53:3).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다릅니다. 능력과 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십니다. 영광스럽게 오셔서 원래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자기 영광의 보좌 곧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32절을 봅시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십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입니다. 제가 2009년 케냐 아프리카수양회 참석했을 때 양과 염소 떼를 실제로 볼 수 있었는데 서로 비슷하게 생겨서 잘 구분이 안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도 양과 염소가 같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자나 불신자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않습니다. 요즘 일용할 양식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분해서 재앙을 내리시는 것처럼, 각각을 구분하시는 그 날이 옵니다. 양이냐? 염소냐? 오른편이냐? 왼편이냐?로 구분되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중간지대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둘 중에서 한쪽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택하심을 받아 양으로, 또 오른편에 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험을 잘 보려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재판장이신 예수님의 판결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의 판결 기준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34-46)

34절을 봅시다. 그때에 임금은 먼저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요즘 같은 세상에서 부모님께 아파트 한 채라도 상속을 받으면 대박입니다. 그런데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공의로 영원히 다스려지는 나라, 더 이상 해됨도 상함도 없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들이 이런 큰 복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35,36절을 봅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그러자 의인들은 의아해하며 도리어 주께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37-39). 이에 임금이 대답합니다. 다 같이 40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누구입니까? 본문을 볼 때 굶주리는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입니다. 지금 당장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들입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하루를 버티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누구 하나 믿고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여기 내 형제 중에 하나 라고 하신 것을 보면 주와 복음을 위해 살다가 이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주의 종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들에게 베푼 선행이, 곧 자기에게 한 것이라 하십니다.

사람이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누구라도 좋은 마음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여러 한계상황에 부딪히고, 내 코가 석자면 그 돕던 손을 그만 거두어들입니다. 또 현실적인 보상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섬기지 않게 됩니다. 세상 대부분의 섬김은 그에 따르는 보상을 기대합니다. 인맥을 쌓고 사업의 도움을 받고자 친절을 베풀고 섬깁니다. 봉사점수를 얻고자 없는 시간을 짜내어 봉사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서는 그런 보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의 성공가도에 인맥이 되어 줄 수 없고 긍휼과 사랑대신 판단과 정죄를 쏟아 붓기 쉬운 사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없이는 실제로 섬길 수 없는 사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지극히 작은 자를 도울수록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시간과 물질을 허비해 버리는 것 같고, 공연한 수고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외면해버리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우리가 캠퍼스 복음역사를 섬길 때 부딪히는 본질적인 어려움도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갈수록 먹고 살기 힘든 현실문제, 영적 소원을 갉아먹는 시대적 분위기,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여론의 악화 등등의 여러 문제들이 우리로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은 투자한 만큼 거두고 싶은 마음, 수고한 만큼 되돌려 받고 싶은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 더 크고, 더 앞서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겨야 합니까? 예수께서 지극히 작은 자와 같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시며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도록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8).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죽어지내고 있을 때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대속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허물과 실수, 죄악을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때마다 붙들어 주셔서 이 날까지 믿음 위에 서 있게 하셨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긍휼을 받았으니 긍휼 베풀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 시간 주께서 지극히 작은 저 같은 자를 버려두지 아니하고 돌보셨음을 기억합니다. 제가 부모님 문제와 정욕, 전공, 장래 문제로 인해 온갖 운명적인 생각과 죄 가운데 헤매고 허덕일 그때에 주께서 주의 종들을 제게 보내주셨습니다. 피터 리 선교사님께서 일하던 도중에 잠깐 짬을 내어 귤봉다리를 들고 제 자취방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얼마 못 버는 가운데서도 아끼지 않고 밥을 사주셨습니다. 피터 리 선교사님뿐 아니라 여러 목자님들이 틈만 나면 집으로 초청해서 고기반찬으로 밥을 먹여주셨습니다. 눈먼 강아지 같은 학생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섬기고 감당해 주시고 계십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이분들이 저에게 이렇게 하실까 싶습니다. 예수님께 거저 받은 그 은혜를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없고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제가 주님과 주의 종들에게 이 같은 많은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제가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을 때 저도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작년 주님의 이 은혜 안에 거하지 못했을 때 가정에서 실제로 동역자와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양들과 동역자들에게 어떻게 행했을지는 말하기도 민망합니다. 제가 올해 나이 40세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무엇을 행하고 살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게 남은 것은 목자 타이틀과 경건의 모양뿐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제 여기서 깨어나고자 합니다. 저 한 사람과 제 가정과 저의 자녀들을 넘어서서 동역자들과 양들의 실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자 합니다. 가까이 있고 관계성 있는 형제, 자매 한 사람 한 사람을 돕고 싶고, 진심으로 섬기고자 합니다. 솔직히 아직도 각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그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를 따라,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어떻게든 섬기고자 할 때, 주께서 제 눈도 뜨게 하실 것입니다. 보일 것이 보이게 하시고 저로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만나든, 누구를 대하든 지극히 작은 저 한 사람에게 주께서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기억하고, 그 마음을 항상 간직하여 각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은혜 베푸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다음으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어떤 선포를 했습니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그들은 앞서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에 들어가게 될 복 받을 자들과 대비가 됩니다. 그들은 왜 이런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42,43) 이에 대해 왼편에 있는 자들도 의아해 하면 반문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이에 임금은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45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이번에도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외면하는 것이, 곧 나를 외면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로 볼 때 지금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인생이 영생이냐 영벌이냐를 결정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을 깨어 준비하는 믿는 자가 살아야 할 삶의 핵심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46절을 봅시다.“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4장부터 시작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로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삶은 계속 엎치락뒤치락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은 평가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우리 삶에 참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인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에서 재판장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기준을 명백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곧 주께 받은 달란트로 장사하는 것은 지금 여기서 내 옆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온전히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가까이에서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일생에 있어서 몇 사람 안 될 것입니다. 지금 내 주변에서 늘 만나고 대화하고 도울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섬기라고 보내 주신 주의 형제들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지극히 작은 나 한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놓기까지 섬겨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따라 지금 여기서 주께서 보내주신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기고 감당하여 주님 다시 오실 그 날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태복음 25:40)

 

2020-2021 마태복음 38강 메시지 2531-2546 정여호수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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