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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강 메시지

마가복음 1:16-45

 

 

권위 있는 새 교훈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마가복음 1:27)

예수님은 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리에 오셔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셨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6-20)

16절을 봅시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 전파의 주 무대는 갈릴리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갈릴리 해변이었습니다. 그 해변에는 어부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열심히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그들을 보시고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17). 물고기를 낚으면 그 물고기를 팔아서 자기 배를 불립니다. 그러면 사람을 낚아서 뭘하겠다는 것입니까? 낚는다는 표현이 좀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실제로 많은 이단들이 사람을 낚아서 자기 배를 불립니다. 그러나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심판에서 끌어 올린다는 말입니다. 죄로 가득한 세상 바다에서 심판을 향해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건져 올려서 구원을 얻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거룩한 일에 예수께서 어부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왜 하필 이 어부들을 부르셨을까요? 어떻게 보면 그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충성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예수께서 보시는 것은 지적인 능력이나 어떤 외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충성입니다. 그래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4:2). 자기 할 일을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2:4).

그러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8절을 봅시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19,2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 안에서 그물을 깊고 있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도 보시고 그들도 부르시자 그들이 그 아버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바로 옆에 아버지가 있는데도 부르시는 예수님이 놀랍습니다. 그 부르심에 즉시 따르는 이들의 모습은 더욱 놀랍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따를 수 있었을까요?

어부의 삶을 그린 소설 중에 유명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숱한 역경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어려움을 이겨낸 노인의 이야기는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그 감동의 끝은 사실 허망함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되었는데 잡은 큰 참치는 상어에게 다 빼앗기고 노인만 살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게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설이 어찌 한 어부에 대한 이야기만이겠습니까? 사실은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린 우리 인생들의 이야기입니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어떠했을까요?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매일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말고는 별로 다를 것도, 특별할 것이 없는 그런 단조롭고 무료한 일상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허무와 염증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음성이 그들에게 한 줄기의 빛으로 임하여 그들의 심령을 깨웠습니다. 가슴을 뛰게 하였습니다. 가슴 뛰는 그 일에 그들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겼습니다.

우리는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썩어 없어질 물고기 한 마리에 울고 웃는 그런 허망한 삶이 아니라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물질을 취하는 것을 넘어, 사람을 취하는 삶임을 증거합니다. 사람을 돕고 살리는 일에 도전하고 실제로 살려내는 일임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그 사람은 이 같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된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요즈음 이러한 중요한 가치가 너무 전도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돈을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사람을 그 돈 아래에 두고 자기의 목적과 수단으로 삼고자 합니다. 실제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라는 의사나 간호사 조차도, 이 직업을 선택하는 이유가 돈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심지어 평생을 같이할 배우자조차 이런 가치와 기준을 따라 선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께서 사람 살리는 어부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 음성이 가지는 의미는 더욱 가치있고 소중합니다.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더욱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일을 귀하게 여기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볼 때 귀하고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복음역사를 시작하면서 제자들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복음역사의 핵심이 다른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세우는 데 있고, 제자들을 구원역사, 곧 주께서 하고자 하시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동참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을 부르신 후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21-28)

21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들어가셔서 무엇을 하셨습니니까? 예수님은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이로 볼 때 복음 역사는 곧 말씀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증거하고, 가르치고, 그 가르친 말씀을 듣고, 배우고 생각하는 그 곳에서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22절을 봅시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랐습니다.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말씀을 많이 알고, 말씀에 정통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없었습니다. 마가가 대놓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비교할 정도로 권위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7장을 보면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되 마음은 멀었습니다. 또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침으로 주를 헛되이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도록 가르쳤습니다(7:6-8). 이를 생각해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과 달랐던 것은, 곧 권위가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으로 공경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 주를 참되게 경배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 말씀 자체를 믿고 말씀에 순종합니다. 말씀에 담긴 뜻과 본질을 생각하고 이를 드러내고 증거하고 가르칩니다. 거기에 힘이 있고 권위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힘과 권세가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권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23절을 봅시다.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4) 이에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25,26). 이를 보고 다 놀라며 이같이 말합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27,28). 앞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에 놀랐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의 말씀 한마디에 더러운 귀신들이 순종하는 것에 더욱 놀랐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능력있게 역사할까? 권위가 있을까? 고민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볼 때도 이건 예수님이니깐 가능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저자 직강해니깐 당연히 그렇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지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에 순종함에서 오는 권위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와 같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9). 그리했을 때 성령이 위로부터 임하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으셨습니다(10,11). 예수님 자신이 이같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따랐기 때문에, 제자들도 그가 부르셨을 때 즉시 따랐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기에, 그가 증거 하는 말씀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극복했기 때문에(13), 더러운 귀신도 그 말씀 앞에 맥을 못 추고 즉시 쫓겨냈습니다.

말씀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참된 권위와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서기관들과 같이 될 뿐입니다. 말씀은 아는 일에 있어서는 더러운 귀신들이 더 앞섭니다. 알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고 떱니다(야고보서 2:19). 그러나 귀신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이렇게 반응할 뿐입니다. 양상은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이것이 더러운 사탄의 세력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의 주님과 주의 말씀에 대한 자세와 태도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이런 자세와 태도를 계속 고수하는 사람은 더러운 사탄의 세력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삶에 예수님이 가져다 주시는 복음의 능력,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보살핌과 다스림을 받을 수 없습니다. 봄학기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주의 말씀을 실제에서 듣고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늘로 부터오는 능력을 덧입고 죄와 더러운 귀신의 세력을 능히 이기고, 일상에서 생육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 일 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29-34)

29절을 봅시다. 회당에서 나온 예수님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는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입니다(30). 이에 예수께서 나아가서 그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을 들었습니다(31). 이를 볼 때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의 실제 문제에 관심이 있으시며, 능히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제압하실 뿐 아니라, 질병까지도 능히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일에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32절을 봅시다. 사람들은 저물어 해 질 때까지, 곧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온 동네가 그 문에 모일 정도였습니다(33). 영육간에 아프고 병든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아파도 안식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고참 받으러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에게 생명과 안식을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그 안식일이 도리어 백성들을 속박하고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율법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문자적으로 지킬 때 하나님의 계명이 도리어 사람을 속박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런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주인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다스림에 뒤틀리고 어그러진 이곳 포도원에 주인되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가져오시기 위해, 주인을 거부한 포도원 농부들에 의해 세워진 그 울타리를 허물고, 포도원 주인의 아들의 권위로 찾아오셨습니다. 이를 알고 사람들이 회당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계신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참된 안식을 주심을 알고 예수께로 모여듭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각종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 주십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34). 더러운 귀신들에 의해 거룩하신 예수님의 정체가 공개적으로 선언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열광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찾을 정도가 인기스타가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35-39)

35절을 봅시다. 시몬의 집에서 늦은 시간까지 아픈 사람들을 돕고 섬기시느라 몹시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날 새벽 아직도 밝기전에 한적한 광야로 나가셔서 거기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복음보다는 자기 인생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몰려오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주의 뜻과 방향을 구하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36). 이는 단순히 뒤따르는 정도가 아니라 박해자나 사냥꾼이 추격하거나 수색하듯이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의 뒤를 밟아서 추격해 왔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한 것일까요? 모든 사람이 주를 찾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의 마음이 상당히 고무되었던 것 같습니다(37).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애타게 찾는 그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십니다. 내가 거기서도전도해야 하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고 하십니다(38).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39).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목적은 자기 인생 문제 해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땅 가운데 오신 목적은 전도입니다. 전도는 말 그대로 를 전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리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회개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죄와 사탄의 포로된 데서 자유를 얻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구나 인기에 편승하여 자신이 이땅가운데 오신 그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 또한 무슨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지 이를 분명히 하고, 이 길을 가는 자신을 따르도록 도우셨습니다.

나를 찾고 나를 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 계속 머물고, 여기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끊임없이 파고들어 옵니다. 저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생명력이 있어 한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할 때 그때부터 부패해버리게 됩니다. 복음이 더 이상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틈타고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기도로 싸워야 합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그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따라갈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잠시 흔들릴 수는 있지만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심하고 믿음의 길을 계속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0-45)

40절을 봅시다. 한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은 전염성이 강하여 매우 부정한 병입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나오면 안됩니다. 자칫하다가는 돌에 맞아 죽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위협을 무릎쓰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그만큼 낫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에 그가 주께 꿇어 엎드려 이같이 간구하였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이 간구를 볼 때 그에게는 예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자신을 받아 주실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주께서 자신을 원하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병도 병이지만 그동안 계속 외면 당해왔던 그의 내면의 고통과 아픔이 느껴집니다. 이런 그를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습니다(41). 사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그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를 터치하셨습니다.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내가 원한다는 것을 그가 실제로 느낄 수 있도록 모든 경계선을 허물고 사랑의 터치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의 원함과 깨끗함이 그에게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그가 깨끗하여 졌습니다(42). 예수님은 깨끗하여진 그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의 깨끗해진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또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습니다(43,44).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엄히 경고하셨음에도 그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물러 계셔야만 했습니다(45). 그런가운데서도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습니다(45).

나병환자는 믿음으로 나아와 병에서 놓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예수님을 곤욕스럽게 하고, 하나님 나라 복음역사를 방해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원하기를 바라면서도, 예수님이 원하는 뜻은 거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일시적으로 병을 고침받을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능력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고, 더러운 귀신들이 쫓겨나고,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질병을 떠나가게 하였습니다. 또한 욕심에 기초한 사람들이 원함과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지금 우리에게도 이 복음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죄와 사탄에 포로된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회복시킵니다. 살립니다. 온전케 합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데서 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에서 순종하여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이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 역사하길 기도합니다. 모든 뒤틀리고 어그러지고 무너진 것들이 치유되고 회복되고 소생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날뿐 아니라 또 살리는 일에 도전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마가복음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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