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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여름수양회 주제 4강 이다윗

요한복음 21:1-25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한복음 21:15)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한 군인이 창으로 죽으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피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그 죽으신 것을 한 번 더 확인하였습니다(요한복음 19:35).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러 온 여자들이 이를 보고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고, 예수님은 첫 번째, 두 번째 제자들에게 다시 살아난 자기의 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세 번째 나타나신 기록입니다(1,14).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확실히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겠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보고도 확실히 믿지 못한 제자들이 무엇을 하였습니까?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1-3)

오늘 본문의 장소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디베랴 호수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하셨습니다(마가복음 14:28). 그래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갈릴리로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와 있겠다고 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안 오셨나하고 기다리는데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기다라는 것만큼 시간이 더디 가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었는데, 다들 시몬 베드로를 자꾸 쳐다보았습니다. ‘이렇게 계속 기다리기만 할 건지.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하면서 또 시몬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고, 이제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니, 내가 뭐라고 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앞서 예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첫 번째 나타나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하셨습니다(20:21-23). 그래서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대로 같이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으니, 어딘가 계시겠지요. 어떻게든 만날테니, 먼저 기도하고 말씀대로 전도하러 갑시다.‘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3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먼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였습니다. 어부였던 그는 장소도 예전에 자신과 그들이 고기 잡았던 갈릴리 호수겠다, 딱 물고기 잡으러 가기에 좋았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다 같이 예전에 버려두었던 그물과 배를 챙겨서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모습을 두 번이나 보았고,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이 할 일도 들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머리로는 알 듯 말 듯하고, 배는 고프고, 일단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여 죽기 싫은 사람의 최선의 방법인 것 같습니다. 일단 살고 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밤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3). 처음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서로, ’옛날 실력이 안나오네어쩌니 하면서 하였겠지만, 계속 아무 것도 잡히지 않으니 앞으로 살 일이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도 물고기 잡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크게 두 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첫 번째는 대학교 4학년때와 둘째는 이제 대학원을 끝내고 사회로 나가야 할 지금이 그렇습니다.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 저는 졸업 이후 어떻게 먹고 살지 슬슬 긴장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로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한참 기쁨이 넘쳤을 때였고, 취업걱정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고 난 다 잘 될거라 여겼습니다. 막상 현실문제가 가까이 다가오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희 아빠는 한국전력공사에 다니시는데, 저의 앞날이 걱정되셨는지, 한국전력공사에서 이번에 대규모 공개 채용을 하는데, 대졸 사원으로 지원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런데 안 간다며 거절했지만, 계속 전화가 왔습니다. 동생은 고졸 사원으로 지원을 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아빠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누그러뜨리려는 방편이었던지, 아니면 스스로 보험을 들려고 했던 건지, 저는 한국전력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지원서를 썼습니다. 뽑아볼테면 뽑아보라는 느낌으로, 맘껏 썼습니다. 결과는 동생은 합격하였고, 저는 불합격하였습니다. 생각보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한편 저는 돈을 벌려고 일자리를 택하고 평생 그 일에 매여 산다면 얼마나 불행할까 라는 가치관이 말씀을 통해 생겨있었고, 세리 레위처럼 다 버리고 예수님만 따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달란트도 잘 활용하며, 하되, 이왕 부업으로 할 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실 세리 레위만큼도 아니었습니다. 컴퓨터 게임 좋아하고, 그냥 이쁜 여자 만나서 평범하게 월급이나 받으며 행복하게 살자는 현실주의자였지만, 주께서 많은 친구들을 통해 주께로 이끄셨고, 진정으로 행복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무 쓸모없던 저를 살리신 것처럼 저도 사람을 살리는, 그런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전공인 전자, 로봇공학, 그리고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저의 달란트를 하나님께서는 로봇으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DGIST에 들어가면 이렇게 살겠다고 서원기도 하였고, 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6년이 지나고, 이제 대학원이라는 돈 받고 하고 싶은 연구할 수 있는 곳에서 이제 나가야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가 한 달에 연구 및 생활비로 받는 게 112만원이고, 저축은 못할 정도인데,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이 보장되어 있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됩니다. 얼마 전에 결혼을 하여 책임져야할 아내가 있으니, 예전엔 굶어 죽기야하겠나, 하던 제 마음에 뭔가 묘한 기분이 듭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뭔가 아주 작은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일 걱정되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했으면서, 대학원 나와서 백수가 되는 것이 겁이 납니다. 돈이야 어떻게 벌면 되겠지만, 부모님이 뭐라 보실까, 교회 형제, 자매님들이 어떻게 볼까, DGIST 가서 로봇 연구한다고 나보다 먼저 신입생들에게 소개하는 정여호수아 목자님이 얼마나 실망할까, 이다윗 목자는 실패했다. 라는 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죽을 것 같이 싫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교회 내에서 여러 섬기는 일들에 너무 나 자신을 드리지 말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나봅니다. DGIST의 믿는 선배들도 교회 목사님께 말씀드려서 섬기는 일을 내려놓는다고 말씀드리라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래도 인정이라도 받으면 힘이라도 날 텐데, 그런 것도 해주지 않으니, 오히려 다윗 목자님~‘ 하며 십자가를 지우는 것같은 목자님들과 이야기를 하면, 괜히 힘이 빠졌습니다.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을 따르다가 안 따랐을 때, 허무했고, 또 슬펐을 것 같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지고 끌어올리고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반쯤 미쳐있었던 것 같은데, 이게 뭘까 싶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껏 따라온 주님은 보이지 않고,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갔지만, 옛날 형편보다 더 안 좋게 되었습니다(누가복음 11:26, 베드로후서 2:20).

이 일을 어찌합니까? 처음부터 주님을 따르지 말았어야 할까요? 말씀 따라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할 때, 일단 물고기를 잡으며 사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제자들도 이렇게 하였는데, 대부분이 이렇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 번째 나타나셨고(14),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요한복음은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물고기 잡으러가서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제자들을 모아서 오류공유회의를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와서 조반을 먹으라(4-14)

4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얘들아 너희게게 고기가 있느냐물으셨는데도(5)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사람은 이미 자신이 이렇다 확신한 것은 정말 그렇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죽음은 어떨까요? 예수님이 가까이 계신데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요한복음 1:5). 누가 죽은 사람이 감히 살아났다 생각하겠습니까? 다시 사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본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물고기 많이 잡도록 도와주셨습니다(6). 그제서야 자신들을 처음 부르셨던 그때 그 장면이 생각났는지(누가복음 5:1-11),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눈이 떠졌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7).

베드로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면서 자존심은 완전 바닥이 났고(마가복음 14:71,72), 그래도 다른 제자들을 책임지기 위해 물고기를 잡으러 갔으나 실패한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저는 자존심 또는 열등감이라 불리는 이것이 꽤나 쌘데, 자존심이 바닥을 쳐야만 자기 발견이란 것을 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자기 발견이 어려운 사람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던 초기 한참 감사와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말씀으로 무장된 가 못 할 것이 없고, 앞으로 기다리는 것은 행복만일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고 그 말씀과 삶이 일치가 되고자 노력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러지 못하는 다른 사람이 먼저 보이고, 또 내가 보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이 죄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가가 더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건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이 되었고, 저는 제 나름대로 제가 의인이라 생각이 더 강하였습니다. 그래도 내가 모든 말씀을 다 알아가고 지키면 되지 않은가?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인제센터에선 나보다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 생각하였습니다. 왜 저런 이기적인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나. 속으로 끙끙 앓았습니다. 내 속에 암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니, 말씀 따르는 사람들은 죄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말씀 따르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죄책감 안 느끼고 더 잘 사는 것 같아, 짜증났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아무리 불평해봤자, 내 속만 시끄럽고, 정작 내 자신은 그 모든 화살을 다시 나한테로 돌리는 꼴이 되었습니다(마태복음 7:2). 대학교 2학년 때 어떤 목자를 겨냥해 이기적이고, 자기 자랑하는 사람이라고 정죄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모든 목자님들을 정죄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일대일 목자님들이 너도 똑같은 죄인이라고 하니까, 그 목자들까지 없애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 니죽고 나죽자하며 4-5시간을 붙들어 놓고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3년을 하니, 다른 사람은 날 어떻게 볼까 항상 예민해졌고, 스스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악에 가득차 내가 얼마나 말씀따라 잘 하고 있는지를 토대로, 그대로 하지 않는 목자의 행동을 가지고 여호수아 목자님이 인정할 때까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모세목자님 앞에서는 고함을 치며 성경책을 찢어 모세목자에게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저의 자존심은 바닥을 쳤고, 저는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2012년 겨울 어느날, 예수님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전혀 기쁘지 않은 나 스스로에 한숨만 나왔습니다. 그리고 소감을 쓰며, 사탄이 날 왜 이렇게 괴롭히나. 구원의 뿔 예수님이 그렇게 강하시다면 구해줬으며 좋겠다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사탄의 계략에 걸려들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에 바쳐 소리치는 무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님은 주님을 못 박게 한 나라도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기뻤습니다. 워낙 많이 듣고 알고 있는 말씀인데도 이상하게 그랬습니다. 한참 죄의 늪에서는 빠져나갈 수 없다고 느낄 때였는데, 어둠에 빛이 비추이는 기쁨을 느꼈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마음도 싹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저는 죄의 늪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저의 남은 인생을 주님께 새로 받은 인생이라 생각하고 살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의사도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을 치료하셨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이 것은 제가 밑바닥 같고 성질이 사나울 때 그런거라 더욱 큰 은혜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은혜를 붙잡지 못하고 부활을 믿지 못하고, 물고기를 잡으려 가려고 하고 있는 제게, 부활하셔서 세 번째 자기를 나타내신 예수님의 기록을 메신저로서 깊이 투쟁할 수 밖에 없는 은혜가 주어져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밤새 물고기 잡은 제자들을 위해 숯불 생선구이로 아침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8,9). 어렸을 때 저희 집에선 보통 엄마가 아침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어떻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셨나 싶습니다. 장막에 살면서부터는 아침 식사당번을 정해서 아침을 준비하는데, 그 전날 뭐할지 생각하고, 미리 장봐야하고, 밥 미리 얹어놓고 하려면, 제가 해보니까 처음엔 재밌게 한다 하더라도, 사랑 없이는 오래가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요즘엔 레베카목자님이 주로 아침식사를 준비해주는데, 그 전날 밤 기분 안 좋아도, 아파도 아침식사를 해주시는 걸 보면 부모의 사랑을 느낍니다.

더군다나 예수님 말 안 듣고 물고기 잡으러 온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느꼈을까요? 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뭐라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바로 생선과 떡을 먹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하셨습니다(10).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잡은 물고기를 받아주십니다. 허물을 감당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저의 허물도 오히려 귀하게 받아주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의 허물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인데, 정죄 받은 모든 목자들께는 죄송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제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렸습니다(11). 그물에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되었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11). 그리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셨습니다(12). 조반을 함께 먹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실제로 부활하였음을 확실히 말하여줍니다. 영혼은 조반을 먹을 수 없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시며 이런 사랑을 보이시는 걸 보고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더 확실히 안 것 같습니다.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을 받았던 것인지,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직접 떡과 생선을 나누어주셨습니다(13).

이처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함께 계심에도 믿음으로 말씀따라 나가지 못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세 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었습니다.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17)

15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15)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물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베드로란 이름이 주어지기 전의 이름으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부르셨습니다. 베드로의 뜻은 반석, 교회의 반석(마태복음 16:18)이라는 의미인데, 베드로가 그런 책임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마음이 말하는 그대로, 대답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대답하였습니다. 이전에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마가복음 14:29) 하던 모습과는 다릅니다. 주의 긍휼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 주님을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 하십니다.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것은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님께 죄 사함을 받고 나서, 주의 어린 양을 먹이는 일을 하며 살겠다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선 주의 어린 양들을 매년 새롭게 맡기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어린 양이 아니라 나의 어린 양으로 만들어 버리는 저 자신을 뒤늦게 발견하곤 하는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 목자님에게 방향을 주며 내 양이니까 똑바로 잘해라이런 뉘앙스를 풍겼습니다. 제가 책임감으로 나의 양들을 먹이고 나 자신을 높이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복음이 증거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예수님의 어린 양들을 섬기기 이전에, 예수님과의 일대일 사랑의 관계성이 단단히 되어 있는지 확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제가 오직 주님의 값없이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주님의 어린 양을 먹이데, 제가 값을 바래선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디모데후서 1:9).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두 번째, 세 번째 이를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세 번째 물으실 때에 베드로는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근심하여 답하였습니다. 근심이 안 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께 어떻게 하였는지 떠올랐을 것 같습니다. 특히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말하고(마가복음 14:31), 하루도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아침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하였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비록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또 물고기를 잡으러 갔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많이 듣고 따른 베드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을 부인하고, 부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고기를 잡으러 갔다는 게 제게는 한편 위안이 됩니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세 번이나 물어주셔서 주의 사랑을 확실히 붙들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것은 죽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확정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것 없이는 또 물고기를 잡으러 가게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과 베드로 간의 사랑의 확정과 이를 토대로 주님의 어린 양을 먹이고자 하는 사명을 받은 베드로가 어떠한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18-25)

18절과 19절을 봅시다. 내게 베드로에게 진실로 진실로 이르셨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19). 이는 실제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미리 말씀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을 더 사랑하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기만 그렇게 팔을 벌리고 남이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는 삶을 살게 될 것이 싫었던 것인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습니다. 마침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이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20).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21)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고난의 길을 가야할 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나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하고 있다가도 다른 사람은 뭐하나 눈을 돌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안하는데 나만 하는게 느껴질 때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사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주를 믿고 따르려는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길 원하십니까? 확실한 것은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내 속에 확정하고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고백받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이를 통해 그 믿음이 더 성장하고 주의 말씀대로 교회의 반석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말씀을 읽고 듣고 받아 예수님과 서로 사랑의 관계성을 점점 더 견고히 해나가서 베드로처럼 믿음이 반석같이 성장하며, 누가 뭐라 하든지 내 자신이 예수님을 기쁨으로 따르며 캠퍼스 주의 어린양을 먹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한복음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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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창세기 2019년 창세기 23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19.08.25 100
30 창세기 2019 창세기 22강 메시지(김요한) file JohnKim 2019.08.18 143
29 창세기 2019년 창세기 21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19.08.15 118
28 창세기 2019년 창세기 20강 메시지(천모세) file 정여호수아 2019.08.04 200
27 창세기 2019년 창세기 19강 메시지 file 정여호수아 2019.07.28 92
26 창세기 2019년 창세기 18강 메시지(김요한) file JohnKim 2019.07.15 107
25 창세기 2019년 창세기 17강 메시지(천모세) file JohnKim 2019.07.13 138
24 창세기 2019년 창세기 17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19.07.07 131
23 창세기 2019년 창세기 16강 메시지(김요한) file JohnKim 2019.07.01 156
22 창세기 2019 창세기 15강 메시지(천모세) file JohnKim 2019.06.25 163
21 창세기 2019년 창세기 15강 메시지(정여호수아) file 정여호수아 2019.06.23 158
20 창세기 2019년 창세기 14강 메시지(김요한) file JohnKim 2019.06.20 166
19 창세기 2019년 창세기 13강 메시지(천모세) file JohnKim 2019.06.12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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