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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0강 정여호수아

마가복음 6:1-29

 

 

둘씩 둘씩 보내시며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마가복음 6:7)

요즘 갈수록 전도하기 어려운 시대라고들 합니다. 복음수용력이 너무도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만 그러할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 시대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플랜카드를 걸어놓고 가장 반기고 환영해 줄 것 같았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배척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바른 말 한마디를 했다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도하기 좋은 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상황과 형편에 꺾이지 않으시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제자들을 전도여행에 보내기까지 하십니다. 이를 보면 예수님 자신이 두려워하지 않고 믿기만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소망과 비젼이 무엇인지 알고 또 이것이 우리의 소망과 비젼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고향에서 배척받으실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선지자가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1-6)

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랐습니다. 앞에서 보면 여기서 거기는 가버나움입니다.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는 곳입니다. 이곳을 떠나 이제 예수님은 자기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이곳에 제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가버나움보다 더 열렬한 환대를 받을 거라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절을 봅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과 같았습니다(1:27). 그런데 그 다음 반응이 가버나움 사람들과 다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고 합니다. 그의 지혜와 권능이 어찌 됨이냐고 합니다(2). 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고 합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이름까지 죽 나열합니다. 그 누이들도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여기 있지 아니하냐고 합니다(3). 비아냥거림과 멸시가 그대로 다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대놓고 배척합니다(3). 거부합니다.

이들이 왜 이러는 것일까요? 앞에서 보면 예수님의 친족조차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3:21). 친밀함은 오히려 경멸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너무 잘 아는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됩니다. 그래서 메신저와 가까운 사람들이 주일에 은혜받기가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후배가 말씀을 전해도 그러합니다. 더구나 지난 과거를 잘 아는 후배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배척하는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4절을 봅시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선지자가 받는 마땅한 대우로 여기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통해 선지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을 봅시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길 정도였습니다(6). 지금까지는 그래도 종교 지도자들이나 유대교와 상관없는 거라사 지역의 이방인들이 안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가장 잘 안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안믿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예수님의 치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굳이 이런 모습을 제자들에게 다 보여주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신 걸까요? 예수님 따르는 제자의 삶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환영받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처럼 배척받고 거절당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앞으로 겪게 될 일이 만만치 않을 줄 알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각오를 단단히 한다고 해도 거절 받고 배척 받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 거절 받고 배척 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웬만한 일들은 몇 번 경험하면 익숙해지지만, 거절과 배척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거절받는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거절 받고 배척 받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아니 익숙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배척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습니다(딤후3:12). 혹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배척받는 일이 없습니까? 그런 분은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후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둘씩 둘씩 보내시며(6-7)

6절 하반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모든 촌에 두루 다니며 가르치셨습니다. 배척받고 인정을 못받으면 낙심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더 적극적으로 다른 동네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배척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은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 전도를 하신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꺾이지 않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도 이 일에 동참시키십니다. 어떻게 동참시키십니까?

다 같이 7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열두 제자들을 부르사 보내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와 함께 있게 하사 그 하시는 것을 보고 배우게 하였습니다(3:14).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양성이 다른 국면에 접어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밖에 나가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심정이십니다(10:16). 그러나 그들은 언제까지나 온실속에 화초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직접 경험하고, 밟아봐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를 보내시되 둘씩 둘씩짝을 지워서 보내셨습니다. 한 사람씩 보내면 총 12팀으로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둘씩 묶어서 6팀을 보내셨습니다. 왜 둘씩 둘씩 보내셨을까요? 율법에 따라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증언에 효력이 있기 때문이었을까요(19:15)?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앞에서 고향에서 배척받는 내용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된 배척과 거절을 당할 때 한 사람이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둘이면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혹 하나가 넘어지더라도 다른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4:10).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전에 혼자 캠퍼스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혼자 가니 담대함이 확실히 떨어졌습니다. 더구나 한 두번 거절당하자 마음이 낙심되어서 그냥 학생들 관상만 보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동역자와 함께 가니 달랐습니다. 돌아오고 싶어도 동역자가 좀 더 도전하자고 해서 끝까지 좀 더하고 왔습니다. 이렇게 둘이 함께 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든든한지 몰랐습니다. 복음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둘이 합심하여 구할 때 주께서 친히 일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18:20).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처음 내보내실 때부터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서 파송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대책없이 그냥 내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면서 보셨습니다. 어떤 능력을 주셨습니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입니다(7). 이로 볼 때 파송되는 제자들이 세상가운데로 나아가서 해야 할 싸움은 어떤 싸움입니까?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더러운 귀신 곧 악한 영들과 대적하는 영적인 싸움입니다(6:12). 양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과의 치열한 영적 전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적들을 섬멸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를 지급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8-14)

다같이 8,9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보통 여행 갈 때 우리는 꼭 필요한 옷부터 캐리어에 넣습니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뭐니뭐니 해도 머니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것들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팡이만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오직 예수님이 주신 권능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주머니에 오천원만 있어도 그 오천원 의지하지 하나님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저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의지 할만한 다른 것을 가지고 가면, 그것들을 의지하기 때문에 온전히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도하고자 할 때 마냥 두렵습니다. 손에 집히는 뭐라도, 좀 있어 보이는 것이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교수나 교직원 정도는 아니더라도 뭐라도 명함 정도는 내밀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말주변도 좋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박사 학위정도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다 없더라도 최소한 약간의 돈이라도 있어야 뭐라도 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할 때 복음이 결코 역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도는 보이지 않는 사탄과의 영적인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있어 보여도 그런 것은 사탄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을 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이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놀라운 일을 행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은과 금으로 된 일이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로 된 일입니다(3:6). 17장을 보면 바울 사도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은 아덴 사람들은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되심을 전하자, 그 음란했던 고린도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고전2:1-4). 온갖 더러운 귀신의 세력에서 고통하는 영혼들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실제에서 붙들고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을 돕는 문제앞에서 다만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수님이 주신 권능만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이제 먹고 자는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을 통해 반드시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제자들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그 하는 말을 듣지도 아니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11).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거기서 나가라고 하십니다. 먹는 문제로 일절 타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십니다(11).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올 때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상종을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전도여행을 보내는 곳은 이방지역이 아니라, 유대지역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라고 하면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라도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을 향해서 분명히 경고하라고 하십니다. 그가 유대인이라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방인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결과에 대한 책임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있지 않고 복음을 듣는 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다보면 그 결과에 따라 마음이 요동합니다. 잘되면 당연히 좋지만, 잘 안되고 계속 거절당하면 마음이 위축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책임이 전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니 결과에 매이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 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12,13절을 봅시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주신 권능만 믿고 순종하여 나갔습니다.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들도 그대로 다 행하셨습니다(1:15,34). 보내신 분의 뜻대로 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작은 예수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났습니다(14).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자 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14-29)

14절을 다시 봅시다. 갑자기 헤롯 왕이 등장합니다. 그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자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 아니냐며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살아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권능의 역사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옛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였으나(15), 유독 헤롯만 요한이 살아났다며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는 그가 요한의 목을 베었기 때문입니다(16). 제자들의 전도의 영향으로 헤롯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헤롯은 왜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까?

전에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를 든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보고서 세례 요한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지적하자 헤롯이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17,18). 그러나 그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고 있었습니다(20). 그러나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기회만 보고 있었습니다(19). 마침 기회좋은 날이 왔습니다(21). 그것은 그의 딸 살로메가 헤롯의 생일날에 춤을 추어서 헤롯의 마음을 녹인 것입니다(22). 이에 흥에 겨워 헤롯이 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자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아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했습니다(23-25). 헤롯은 심히 근심하였으나 큰소리친 것이 있기 때문에 요한을 목 베어 그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살로메에게 주었습니다(26-28). 그렇게 요한이 갔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했습니다(29).

이것이 성경이 기록한 요한의 최후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위대한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7:28). 그런데 그의 죽음을 보면 너무 허망해 보입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 너무나 무력하게 보입니다. 어떻게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부도덕한 왕의 맹세 같지도 않은 말과 악한 여자의 사주를 받은 어린 소녀의 요청 때문에 갑자기 죽임을 당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너무도 담담하게 그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억울하게 죽었다던가 이런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여기서 요한의 죽음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당시 갈릴리 지역의 왕이었던 헤롯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돈과 권력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자기가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없는 제자들과 정반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일말의 양심 때문에 세례 요한의 책망을 달갑게 들으면서도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치와 자존심 때문에 원하지 않는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 날마다 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광란의 파티를 벌이며 즐겁게 사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죄와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아 죽을까봐 늘 전전긍긍하고 두려워 떠는 한낱 죄인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당시 의인을 박해하던 세상 권력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의 실존을 볼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알고 보므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배척과 박해가운데서도 전도하기를 멈추지 아니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어두운 그 시대를 밝히는 유일한 소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것만이 죄가운데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도하다가 배척을 받고 세례 요한처럼 박해를 받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 의미없는 개죽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제자들을 통한 흥왕한 복음역사가 그냥 된 일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 한 사람의 고귀한 희생과 섬김과 죽음의 결실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가 맺힌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2:24).

우리나라의 복음역사도 세례 요한같은 한 사람의 순교의 피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의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조선에 옵니다. 그런데 그는 대동강변에 내리자마자 조선의 관리에게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것으로 그의 선교는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으면서 남긴 그 성경을 전해 받은 박영식은 그것으로 자기 집 벽에 발랐다가 후에 이를 읽은 최치량이 변화되어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습니다. 이것이 평양장대현교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죽음으로 뿌려진 선교의 씨가 후에 많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배척과 박해로 인해 전도가 위축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때일수록 더욱 열심히 전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내보내셨습니다. 상황과 형편에 휩쓸리지 않으셨습니다. 배척과 박해의 때에 도리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고, 더욱 적극적으로 믿음으로 도전하셨습니다. 배척과 박해는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로 예수님 안에 더욱 뿌리 내리게 하고 자라게 하는 햇빛과 양분이요 동력입니다. 우리가 보이는 고난에 눈이 가려지지 않고 주의 말씀을 따라 소망을 보며 믿음의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둠속에서도 주께서 이루어 가시는 소망의 역사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이 많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복음의 빛은 더욱 찬란하게 빛납니다. 빛의 가치와 힘과 위력이 큽니다. 우리가 험한 바다와 같은 이 세상에 작을 불을 켜서 비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권능을 믿고 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실 걸 믿고 계속 믿음으로 세상에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마가복음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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